소설리스트

93화 (93/142)
  • 93화

    로저먼드는 난데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살짝 놀랐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네. 윌트슨 공작 부인은 남부 출신이 맞습니다. 우리 가문과 엘프윈의 가문은 옛날부터 무척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엘프윈과 저도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습니다.”

    “어머나, 엘프윈이라고 이름을 직접 부르는 걸 보니 정말 두 분이서 친하셨나 봐요! 그랬구나! 놀라워라!”

    제나는 로저먼드를 신기한 듯 쳐다보며 고개를 거세게 끄덕였다. 

    술에 취했으며, 로저먼드의 이야기를 아주 흥미롭게 듣고 있다는 표시였다. 

    제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럼 혹시 공작 부인을 방문하시느라 남부에서 이곳까지 올라오신 건가요?”

    “사업 차 뎀프샤에 들렀다가 겸사겸사 엘프윈… 아니, 윌트슨 공작 부인도 만났습니다.”

    “두 분이서 소꿉친구신데, 윌트슨 공작 부인이 뭐예요? 그냥 이름 부르셔도 괜찮아요. 저희끼린데요, 뭘.”

    호호, 제나가 눈매를 반으로 곱게 접으며 상냥하게 웃었지만 로저먼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래도 지금은 어엿한 공작 부인이니 그에 맞는 예우를 해야지요. 그리고 이젠… 소꿉친구 같지도 않거든요.”

    “소꿉친구 같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나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하지만 로저먼드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푸념이 시작됐다. 

    “절 기억하지 못하더라고요.”

    “아…. 저런. 윌트슨 공작 부인의 기억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소꿉친구를 몰라볼 정도로 심각한 줄은 몰랐어요.”

    “네…. 그렇더라고요.”

    침울해진 로저먼드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제나는 그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얹으며 토닥토닥 쓰다듬었다. 

    다정한 그녀의 손길에 로저먼드는 조금은 위로를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그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속앓이했던 마음을 꺼내 보였다. 

    “아주 완전히… 딴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얘기가 하나도 통하지 않았어요.”

    “…….”

    제나는 아무런 대꾸 없이 로저먼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좀 전까지 조금 풀어진 것 같았던 제나의 눈동자가 또렷하게 빛났다. 

    제나뿐만이 아니었다. 

    메리엔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모두 조용히 입을 꾹 닫은 채 로저먼드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로저먼드는 자기 이야기에 심취해 있어서 모든 파티 참석자의 시선이 저에게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주저리주저리 말을 이어 갔다. 

    “기억을 잃었다고 그렇게 다른 사람이 되다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도저히.”

    로저먼드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소매로 닦아 냈다. 

    많이 취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그 사람이 가진 사상이나 생각 같은 건 변하기 힘든 거 아닙니까?”

    로저먼드는 동의를 구하듯 제나를 쳐다봤다. 

    눈물을 가득 머금은 처량한 눈빛이었다. 

    제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도 월시 소공작님과 같은 생각이에요. 기억은 없어도, 성격 같은 건 변하지 않을 것 같은데….”

    “성격이라… 맞아요! 성격도 완전히 달라졌어요!”

    제나가 편을 들어 줘서 용기가 났던 것일까. 

    로저먼드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그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거릴 정도였다. 

    로저먼드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지금 윌트슨 공작성에 있는 그 여자는… 엘프윈이 아니에요! 아니, 엘프윈일 수가 없어요! 절대!”

    마침내 로저먼드는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술에 취해, 자기 연민에 취해, 화에 취해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내뱉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얼토당토 않는 말을 듣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말이다.

    한번 시작된 로저먼드의 불평불만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아르젠토 차도… 필요하다고, 구해 달라고 매달릴 때는 언제고…. 건강에 나쁜 것이니 치료를 받으라니! 참 나!”

    “어머…. 공작 부인도 아르젠토 차를 즐겨 드셨군요…. 세상에나!”

    제나와 메리엔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곧 라하브에는 윌트슨 공작 부인에 대한 의심쩍은 소문이 퍼지게 되리라. 

    윌트슨 공작 부인은 어렸을 때부터 아르젠토 차를 즐겨 마셨다는 둥.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윌트슨 공작 부인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둥. 

    지금의 윌트슨 공작 부인이 진짜가 아니라는 둥. 

    진짜가 아니라면 과연 공작 부인의 자리를 꿰찬 그 여자는 누구냐는 둥.

    *   *   *

    모자 초상화 작업은 내 개인 응접실에서 진행했다. 

    브렌트가 요청한 자세는 간단했다. 

    세르안을 안고 안락의자에 기대앉으면 됐다. 

    작업 시간은 전적으로 세르안의 기분 상태에 달렸다. 

    아이가 자고 있거나 편안한 상태라면 작업이 시작됐고, 아이가 칭얼거리기 시작하면 작업을 멈췄다. 

    내 무릎에 앉아 꼼지락거리는 세르안을 바라봤다. 

    아이는 제크론을 닮은 까만 머리카락에 엘프윈을 닮은 초록색 눈동자를 지녔다. 

    이목구비는 엘프윈보다는 제크론을 더 많이 닮았다. 

    원래 첫째 아이는 아빠를 많이 닮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세르안도 그런 경우에 포함되는 것 같았다. 

    아이는 자기 팔뚝만 한 헝겊 인형을 조몰락거리기도 하고 입에 넣어 오물거리기도 했다. 

    밤에 잠도 잘 잤고, 젖도 배부르게 먹어서 그런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우리 세르안 착하네! 칭얼거리지도 않고. 엄마 힘들지 않게 말 잘 들어줘서 고마워, 우리 아들!”

    “꺄…. 까르르! 아하…. 아까앙!”

    세르안이 팔다리 파닥거리며 몸 전체로 웃었다. 

    그 모습이 또 몹시 귀여워 어머나, 호호호, 하고 웃음이 났다. 

    그때였다. 

    “지금 그 표정 정말 좋으십니다! 계속 그렇게 웃어 주세요!”

    브렌트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사각사각, 캔버스를 오가는 연필 소리가 더 빨라졌다. 

    나는 시선은 세르안에게 고정한 채 브렌트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브렌트. 공작성에 남아 줘서요.”

    집중하고 있는지 브렌트는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말을 계속 이었다. 

    “요소킨 수업 모습도 그려 주실 거죠? 그리고… 고용인들의 모습도 그려 주면 좋을 것 같아요. 사실 공작성이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비결은 모두 고용인들의 노고와 정성 덕분이잖아요?”

    “…….”

    “아카데미 분교 건설 현장의 모습도 담으면 좋을 것 같아요. 완성된 모습은 담을 수 없겠지만 완성돼 가는 과정을 그리는 것도 너무 의미 있을 것 같아요!”

    “…….”

    작업에 집중한 브렌트는 계속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도 내 생각에 집중하고 있어서 브렌트의 대답이 굳이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또… 아, 맞다! 디아브 백작 부인의 아기와 우리 세르안, 두 아기의 초상화도 무척 귀여운 작품이 될 것 같군요! 제목은 ‘공작성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면 되겠네요.”

    호호,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벌써부터 그리워졌다.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겠다고 다짐은 했지만 가슴이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투둑.

    “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흘러나온 커다란 눈물방울이 세르안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차가운 감촉에 놀란 아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똥말똥 나를 봤다. 

    “저런, 세르안 놀랐지? 엄마가 미안해!”

    얼른 눈물을 훔치고 아이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세르안도 곧 나를 따라 생글생글 웃었다. 

    정말이지 착하고 순한 아이였다. 

    *   *   *

    동물 마법사 스탠리 랜더의 연구실. 

    제크론을 비롯한 변이 마물 조사단이 모두 모였다.

    연구실 중앙에는 창살로 만든 우리가 있었는데, 황실 마법 기사단이 생포해 온 마물이 갇혀 있었다. 

    수면 마취제를 주사한 덕분에 마물은 바닥에 엎드린 채 자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 마물을 가까이에서 볼 일이 많이 없었던 매튜는 흉측하게 생긴 마물을 보고 어깨를 떨었다. 

    스탠리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겉모습을 봤을 땐 기존의 마물인지 아니면 변이 마물인지 분간이 어렵지.” 

    제크론을 비롯한 황실 기사단 소속 소피아와 글렌은 마물들과 직접 싸웠기에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이번엔 제크론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마물의 몸에 칼을 쑤셔 보면 차이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피부와 살, 그리고 뼈가 조금 더 단단하지요.”

    “맞소!”

    신난 목소리로 외친 스탠리는 빠른 걸음으로 작업대로 향했다. 

    제크론을 비롯한 다른 조사단원들도 스탠리를 따라 커다란 작업대 주위에 둘러섰다. 

    작업대 위에는 다양한 마물의 것으로 보이는 뇌와 심장, 그리고 신체 일부분이 투명한 그릇에 담겨 있었다. 

    “자, 여기 차드엘 산맥의 전투 현장에서 죽은 마물의 사체에서 수집한 것들이오. 이것들에 라제브 약물을 부어 봤지. 라제브 약물이 뭔지는 알고 있소?”

    “설명은 필요 없고, 결과만 말해 주면 좋겠습니다.”

    제크론의 재촉에 스탠리가 언짢은 듯 미간을 잔뜩 좁혔다. 

    하지만 스탠리 역시도 실험 결과를 빨리 공유하고 싶은 마음은 마찬가지였기에 이번 한 번만 참기로 했다. 

    스탠리는 미간을 다시 펴서 표정 정리를 하고는 입을 열었다.

    “분명 보통 마물의 신체 조직과는 성분이 달랐소. 어떻게 다른지 알아내기 위해 갖가지 약물을 사용했지. 하지만 역시 쉽지 않았소.”

    모두들 입을 꾹 다문 채 스탠리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오랜만에 연구실을 채우는 긴장감에 스탠리는 전율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스탠리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라제브 약물에 녹인 마물의 사체가 무엇에 반응했는지 아시오? 바로 더바인 광석에 반응했단 말이오!”

    스탠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누군가는 흡, 하고 헛숨을 집어삼켰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저런,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마침내 제크론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스탠리에게 물었다.

    “더바인 광석이라면… 신성력과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