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142)
  • 92화

    ‘세르안과 나의 초상화라니….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감히 바란 적도 없는데….’

    지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몽글몽글 열이 올라왔다.

    “힘드시겠습니까?”

    “아니에요. 좋은 것 같아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는 브렌트를 향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브렌트가 작은 한숨을 내쉬는 것과 동시에 목소리를 냈다. 

    “마님과 도련님, 모자, 두 분의 초상화입니다. 공작님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눈에 힘을 준 채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브렌트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싶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공작님께서 서운한 소리를 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아셨죠, 마님?”

    “네?”

    “그러니까 공작님께서 가족 초상화에 자신도 넣어 달라고 해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번 그림은 모자 초상화로 그리고 싶으니까요.”

    아…. 그 얘기였구나. 

    브렌트가 몇 번이고 언급하는 게 이해되진 않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어요. 이번 작품은 모자 초상화라고 정확히 알고 있을게요.”

    “네, 감사합니다.”

    작업은 내일부터 진행하기로 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내 몸 상태를 고려하여 오전에 30분, 오후에 30분씩 작업하기로 했다. 

    브렌트는 꽤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작업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나는 브렌트가 왜 그토록 같은 얘기를 반복하면서 강조했는지 알 수 있었다. 

    “왜 가족 초상화가 아니라 모자 초상화지?”

    이미 브렌트의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지 제크론이 미간을 잔뜩 좁힌 채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했다. 

    스테이크를 써는 칼질이 여느 때보다 더욱 강렬했다. 

    마치 접시 전체를 잘라 버리고 싶은 사람 같았다.

    제크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부루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해할 수가 없네. 왜….”

    “가족 초상화는 다음에 그려요. 세르안이 좀 더 크면 말이에요.”

    “가족 초상화를 지금 그리고, 세르안이 좀 더 크면 그때 모자 초상화를 그리면 안 되는 건가?”

    실망한 눈빛과 풀이 죽은 목소리가 합쳐지자 제크론의 모습이 무척 애처로워 보였다.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어린 아기를 안은 엄마의 모습을 그리고 싶은가 보죠.”

    “그럼 그 옆에 앉은 아빠는?”

    “브렌트는 예술가잖아요. 그때그때 담고 싶은 것, 표현하고 싶은 것이 다르겠죠. 지금은 엄마와 아기의 모습을 담고 싶은 것이겠고요.”

    “당신 생각은 어떤데?”

    “난… 물론 가족 초상화면 좋겠지만….”

    순간 제크론의 눈동자에 작지만 확실한 희망의 빛이 어른거렸다. 

    희망 고문은 짧아야 했기에 나는 다시 재빨리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어쩔 수 없죠, 뭐. 붓을 쥔 사람은 브렌트니까요.”

    아주 잠시 반짝였던 희망의 빛이 바로 사그라들었다. 

    순간 제크론의 얼굴에 진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가 다시 아쉬운 소리를 할 요량으로 입을 벌렸지만 곧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꾹꾹 참는 모습이었다. 

    더 말을 해서 상황이 달라질 것 같지도 않고, 더 말을 해서 내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으리라.

    후우, 한숨을 내쉰 그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   *   *

    “도론 공녀의 파티에 초대받다니, 로저먼드, 자네, 꽤 하는데?”

    로저먼드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마르코스 백작저에 왔다.

    어제 파티에서 늦게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았던 탓에 피곤했지만 마르코스 백작의 초대에 불응할 수는 없었다.

    이래저래 절 챙겨 주는 친구의 친절을 무시할 수 없어서였다. 

    홍차를 들이킨 마르코스 백작이 두 눈을 반짝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는 메드록에서만 지내니 이곳 라하브의 사정을 잘 모르겠지. 그래서 말해 주는 걸세. 도론 공작가의 파티에 초대되었다는 것은 무척 기념비적인 일이라네.”

    “기념비적이라고?”

    아무리 공작가라 하더라도, 작은 파티 초대 하나에 기념비적이라니, 도가 지나친 과대평가 같군. 로저먼드는 홍차를 한 모금 머금고는 잔뜩 들뜬 친구를 심드렁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마르코스 백작은 더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기념비적! 게다가 큰 규모의 파티가 아니라, 절친한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소규모 파티에 초대됐다는 것은 뭐랄까…. 라하브 사교계에 제대로 눈도장을 찍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

    “…….”

    “사실 어제만 해도 그래. 도론 공녀와 핸더슨 공녀 일행이 멀리건 후작저 파티가 아니라, 내 파티에 참석해 준 것에 감개무량했다네.”

    두 눈이 촉촉하게 젖어드는 마르코스 백작의 모습에 로저먼드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도론 공녀와 핸더슨 공녀는 대단한 사람들이긴 한가 보다.

    “그러니까 내일 잘해.”

    마르코스 백작이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웃었다. 

    백작은 로저먼드에게 진심으로 행운을 빌었다. 

    “자네도 이젠 웃어야지. 엘프윈 윌트슨 따위는 잊고 말이야.”

    마르코스 백작의 입에서 엘프윈 이름이 나오자 로저먼드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로저먼드의 표정 변화를 단번에 눈치챈 백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또, 또, 또. 바로 차갑게 식기는! 매번 엘프윈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정색하는 버릇도 좀 고쳐. 언제까지 그 여자 그늘에서만 머물 생각이야? 이제 자네도 자네 길을 가야지. 이젠 자네 차례라고.”

    “…….”

    “후계자 수업 잘 받고, 작위 제대로 물려받고…. 라하브 사교계에서도 눈도장 잘 찍고, 결혼도 하고…. 자네의 행복도 찾아야지, 이젠.”

    진심 어린 충고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에서 쓴물이 올라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후우…. 로저먼드는 한숨을 내뱉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야지.”

    앙다문 어금니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   *   *

    다음 날. 

    도론 공작저는 듣던 대로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하는 저택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로저먼드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호화로운 저택을 감상했다. 

    “어서 오세요, 월시 소공작님.”

    “환영합니다.”

    메리엔과 제나가 활짝 미소 지으며 로저먼드를 맞았다. 

    로저먼드도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로저먼드는 곧 후원으로 안내됐다. 

    그저께 만났던 셜리를 비롯한 대여섯 명의 손님들이 이미 와 있었다. 

    이미 안면을 튼 사이였기에 분위기는 금세 자연스러워졌다. 

    술잔이 채워지고 비워지기를 되풀이했고, 접시를 오가는 손들이 바삐 움직였다. 

    누군가는 노래를 불렀고, 다른 누군가는 시가를 폈다. 

    크고 작은 가십거리들이 슬며시 나오기 시작했다. 

    라하브 사교계의 정점에 위치한 집단들의 모임인 만큼 그들의 입에 오르는 가십거리는 모두 대단한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다. 

    로저먼드는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파티가 길어질수록 슬슬 취기가 오르면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좀 더 깊고 농밀해지기 시작했다.

    로저먼드가 두 눈을 반짝이며 다양한 가십거리들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한 대 피실래요?”

    제나가 시가를 로저먼드에게 권하자 그의 눈동자가 잠시 커졌다. 

    로저먼드는 손을 살짝 내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시가는 별로 즐기지 않으시나 봐요?”

    “핍니다. 자주 피우지 않을 뿐입니다. 주로 아르젠토 찻잎으로 만든 시가를 피웁니다.”

    “아…. 저런, 아르젠토 시가는 없는데 어쩌죠? 아르젠토 시가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 봤지만 직접 본 적은 없어요.”

    “괜찮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남부에서는 흔하지만 라하브에서는 흔하지 않다고요.”

    제나는 두 눈을 반짝이며 상체를 로저먼드 쪽으로 기울였다. 

    그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 눈치였다. 

    라하브 사교계를 주름잡는다는 공녀가 제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 주자 로저먼드는 흥이 났다. 

    제나의 붉은 입술이 매끄럽게 움직였다. 

    “남부에서는 흔하군요? 몰랐어요. 라하브에서는 아르젠토 차는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편이지만 시가는 본 적 없네요.”

    “남부에서는 아르젠토 차를 구하는 게 라하브에서만큼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발된 것이 아르젠토 시가지요.”

    “그렇군요! 월시 소공작님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알았어요.”

    아르젠토 시가와 차에 대한 이야기는 거기서 일단락됐다. 

    카드 게임이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취기가 오른 사람들은 헤실헤실 웃으며 원탁에 빙 둘러앉았다. 

    규칙이 간단한 카드 게임은 사람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긴 사람들은 환호성을, 진 사람들은 비명을 내질렀다.

    이기든 지든 모두 게임에 몰입하여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제나가 다시 로저먼드에게 말을 걸었다. 

    제나도 로저먼드도 저녁 내내 마신 와인 때문에 혀가 풀려 발음이 조금씩 뭉개졌다. 

    “그런데 월시 소공작님. 남부 출신이시면 혹시… 윌트슨 공작 부인과도 잘 아는 사이신가요? 윌트슨 공작 부인도 남부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아닌가…? 맞나?”

    제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맞은편에서 제나의 혀 꼬부라진 소리를 듣고 있던 메리엔이 제나의 연기력에 감탄하며 빙긋, 작게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