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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91/142)
  • 91화

    로저먼드 월시는 마르코스 백작저의 파티에 참석했다. 

    사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불참하려고 했다. 

    역시 술에 취한 상태에서 다시 아르젠토 차를 마시는 것의 후폭풍은 끔찍했다. 

    하지만 하는 일 없이 호텔 방에 가만히 빈둥대는 것은 어제 하루로 족했다. 

    그래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마르코스 백작저에 왔다. 

    “월시 소공작, 어서 오게. 잘 왔어. 자네가 안 오면 어쩌나 걱정했다네.”

    “그래, 오랜만이야.”

    로저먼드는 저를 반갑게 맞아 주는 마르코스 백작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라하브에 자주 오지도 않는데 올 때라도 이렇게 보면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자네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괜찮은가?”

    “응, 괜찮아.”

    괜찮지 않았지만 사실대로 말해 버리면 다음 대답이 길어질 것 같아서 대충 괜찮다고 둘러댔다. 

    대화가 길어지는 건 딱 질색이니까. 

    참석자가 스무 명 내외인 작은 규모의 파티였다. 

    로저먼드가 구석 테이블에 앉아 샴페인을 홀짝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로저먼드의 곁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여기 같이 앉아도 될까요?”

    낯선 목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가 로저먼드를 보고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에 녹안 그리고 하얀 피부에 마른 몸…. 순간 엘프윈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아…. 예.”

    “고마워요. 아직 친구들이 도착하기 전이라… 혼자 있기 좀 뻘쭘해서 그런데… 잠깐 말동무가 돼 주시면 안 될까요?”

    여자는 처음 보는 로저먼드에게 쭈뼛거리면서도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 왔다. 

    자주 겪는 상황이 아니라 로저먼드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쨌든 엘프윈과 비슷한 외모가 그의 눈길을 끌었으니까.

    로저먼드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만들어졌다. 

    “그러죠.”

    “우리 초면이죠? 전 셜리 힐렌버그예요.”

    “안녕하세요. 로저먼드 월시입니다.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호호, 여자는 작게 웃으며 호로록 샴페인을 들이켰다. 

    로저먼드도 샴페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라하브에서 지내시는 분은 아닌가 봐요? 전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인데, 이런 잘생긴 미남을 제가 기억 못 할 리가 없는데….”

    “맞습니다. 남부에 있는 영지에서 주로 생활합니다.”

    “아, 그러시구나. 그것 참 아쉽네요.”

    “네, 뭐.”

    잠시 정적. 

    로저먼드는 말주변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새로운 사람과 편안히 대화할 수 있기 까지 시간이 좀 걸리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셜리는 아닌 듯했다. 

    샴페인 잔을 다 비운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저도 이제 슬슬 라하브에서의 삶이 피곤해지기 시작했어요. 매일 밤 이어지는 파티, 게다가 파티에 참석하려면 유행에 맞는 옷과 장신구를 사야 하고….”

    “…….”

    “처음엔 모든 게 신기하고 재밌었지만 이 생활도 몇 년 하다 보니 질리더라고요.”

    “제가 지방 영지에서 주로 지내는 이유가 바로 그렇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라하브에서의 삶에 적응하는데 자신이 없어서요.”

    “어머, 우리 통하는 데가 있네요. 역시 왠지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보면 딱 안다니까요. 호호. 셜리가 기분 좋게 웃었다. 

    웃음은 전염된다고 했던가. 

    어느새 로저먼드도 빙그레 웃고 있었다.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호텔 방에서 나온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 

    “셜리, 늦어서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죠?”

    그때였다. 

    한 무리의 손님들이 둘 곁으로 다가왔다. 

    메리엔 도론과 제나 핸더슨 일행이었다. 

    셜리가 한층 들뜬 목소리로 그들을 맞았다. 

    “어서 와요! 기다렸지만 여기 계신 신사 분 덕분에 지루하지 않았답니다.”

    “어머, 그것 참 다행이네요! 감사해요, 신사 분. 안녕하세요, 메리엔 도론입니다.”

    “저는 제나 핸더슨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아, 네…. 로저먼드 월시입니다. 처음 뵙습니다.”

    난데없이 나타난 무리에 둘러싸인 로저먼드는 당황했다. 

    파티에 참석하면 언제나 가장 먼저 구석진 테이블을 차지하는 로저먼드였다. 

    사람들의 관심이나 시선이 썩 달갑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많은 사람들로부터 시선과 인사를 받자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로저먼드의 표정을 읽었던 것일까. 

    제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두 분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저희가 방해했나 봐요. 죄송해요.”

    “아, 아닙니다! 오붓한 시간이라니…. 그런 게 아닙니다.”

    로저먼드가 두 손을 내저으며 부정하자, 셜리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툴툴거렸다. 

    “어머, 저는 오붓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로저먼드 님께선 불편하셨나 봐요?”

    “아니요!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이 아니라….” 

    셜리의 불평에 로저먼드가 화들짝 놀라자 셜리는 눈매를 곱게 접으며 웃었다. 

    “장난이에요, 장난.”

    “어머, 얼굴 빨개지신 것 좀 봐! 귀여운 분이셨네요! 마음에 들어요. 우리 친하게 지내요.”

    호호호, 메리엔이 새로운 샴페인 잔을 로저먼드에게 건네며 방긋 웃었다. 

    매혹적인 눈빛과 함께. 

    쭈뼛거리며 샴페인 잔을 건네받은 로저먼드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조용했던 로저먼드의 테이블은 어느새 가장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됐다. 

    로저먼드는 새로운 분위기에 적응이 힘들었지만 가끔씩 이런 분위기를 만끽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   *   *

    “마님, 안 힘드세요? 제가 안을까요?”

    “아니야, 괜찮아. 이렇게 어릴 때 많이 안아 줘야지. 나중에 다 크면 안아 주고 싶어도 애들이 싫어한다니까.”

    칭얼거리는 세르안을 안고 토닥토닥 달래고 있는데, 주디가 걱정하는 눈길로 나를 봤다. 

    “마님은 아이도 처음 낳아 보신 분이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꼭 낳아 봐야 알겠니? 낳아 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도 있어.”

    주디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웃었다. 

    세르안의 칭얼거림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이제 곧 잠에 들 것 같았다. 

    “육아가 힘들지만, 죽을 것처럼 힘들지만, 이것도 다 한때야. 아기 크는 거 금방이다. 나중엔 안아 주고 싶어도 못 안아 줘. 그러니까 지금 많이 안아 줘야 돼.”

    전생에서 엄마가 언니에게 했던 말이었다. 

    언니는 첫 아이를 낳고 극한 노동인 육아를 몹시 힘들어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두세 시간마다 한 번씩 깨는 아기를 돌보느라 언니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엄마도, 나도 오후에 잠깐씩 들러서 돕기는 했지만 충분하지 않았으리라. 

    매번 힘들다며, 피곤하다며, 졸리다며 신세 한탄하던 언니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찡, 울렸다. 

    ‘그러고 보면 나는 완전 축복받았네. 육아를 도와주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으니까.’

    두 명의 유모가 2교대로 근무하며 24시간 아기 방에 상주했다. 

    유모들이 쉬는 시간에는 케이트와 주디도 세르안을 돌봤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세르안에게 젖을 물리는 것뿐이었다. 

    가끔 기저귀를 갈거나, 목욕을 시키거나, 재우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곁에 선 유모와 하녀가 쩔쩔맸기에 자주 할 수 없었다. 

    귀족 여인이 직접 육아를 하는 것은 무척 이상한 행동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1년 뒤엔 안고 싶어도 못 안을 테니까…. 보고 싶어도 못 볼 테니까….’

    내 품에 안긴 채 잠이 든 세르안을 꼬옥 안았다. 

    앞으로 1년 동안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주리라 다짐하면서. 

    비록 세르안은 나를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가장 연약했던 시절, 누군가로부터 받은 다정한 손길과 따뜻한 눈빛 그리고 부드러운 음성은 아이의 세포 어딘가에 차곡차곡 기록되리라. 

    ‘그래. 그거면 돼. 나는… 그걸로 족해.’

    어느덧 눈가에 열이 몰리기 시작했다. 

    슬픈 마음이 가득 담긴 눈물은 세르안에게 남겨 주고 싶은 기억이 아니었기에 나는 눈물을 눌러 담으며 아이를 침대 위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그때였다. 

    똑, 작은 노크 소리가 나자마자 문이 살짝 열리더니 브렌트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가 속삭였다. 

    요즘 내 침실을 찾는 모든 고용인들은 최대한 소리를 낮추라는 지시를 받은 모양이었다. 

    갓난아기가 있는 집이 그렇듯 말이다. 

    “마님, 잠깐 면담 요청드려도 될까요?”

    “좋아요.”

    우리는 침실에 딸린 개인 응접실에 마주 앉았다. 

    오랜만에 보는 브렌트의 표정이 밝았다. 

    제크론은 브렌트와의 1년 전속 계약에 동의했고,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브렌트는 앞으로 1년 동안 공작성에 머무르면서 공작성 안팎의 풍경과 인물들을 열 점 이상 그리겠다고 계약서에 서명했다. 

    소문에 따르면 계약 이후 브렌트는 공작성 이곳저곳을 거닐면서 그림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했다. 

    “실내악단 그림은 완성됐나요? 보고 싶어요.”

    “이제 마무리 단계입니다. 이번 주 중으로 완성될 예정입니다. 완성되면 바로 들고 와서 마님께 보여 드리겠습니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분명 마음에 드시리라 확신합니다.”

    브렌트의 얼굴에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떠올랐다. 

    초롱초롱 눈을 반짝이던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마님과 도련님의 모습도 화폭에 담고 싶습니다. 물론 마님의 건강이 괜찮다면 말입니다.”

    “아….”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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