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읽고, 읽고, 또 읽어서 머릿속에 완전히 새겨 넣는 것.
이해가 힘들면 일단 먼저 외울 것.
이 방법은 어린 시절부터 제나가 메리엔에게 조언해 준 공부 방법이었다.
늘 공부가 힘들었던 메리엔은 제나의 조언 덕분에 보통의 성적은 유지할 수 있었다.
메리엔이 입매를 비틀며 비웃었다.
“별 볼 일 없는 신발도 제짝이 있다더니… 그 말이 딱 맞네. 그 여자도 어린 시절의 소꿉친구 같은 게 있고 말이야! 소꿉친구가 아니라… 이건 뭐, 첫사랑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은데!”
메리엔이 신나서 소리쳤다.
제나는 오랜만에 밝은 표정으로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내일 마르코스 백작저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한다니까 거기에서 일단 접촉을 시도해야겠어.”
“아? 그럼 멀리건 후작저의 파티 대신 마르코스 백작저로 간다는 말이야?”
메리엔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멀리건 후작저의 파티보다 마르코스 백작저의 파티의 수준이 낮을 것이라는 것은 불 보듯 훤했으니까.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못하는 메리엔의 한마디에 제나의 얼굴이 확 굳었다.
이 세상 누구보다 제나의 표정을 잘 읽는 메리엔이었기에 그녀는 얼른 다음 말을 덧붙였다.
“오랜만에 색다른 분위기의 파티를 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게다가 로저먼드 월시에게 제대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니까.”
메리엔은 제나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도 굳었던 제나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메리엔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놓은 방법은 있어? 어떻게 접근할 생각이야? 자연스러워야 할 텐데.”
“넌 어떤데? 떠오르는 방법 있어?”
메리엔의 물음에 제나가 되물었다.
흡, 긴장한 메리엔이 헛숨을 삼켰다.
제나가 이런 식으로 되물을 땐 저를 시험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 쓸모를 인정받고 제나 옆에 자리를 지키고 있으려면 이런 시험에서 통과해야 했다.
제나의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메리엔은 온 힘을 다해 두뇌를 팽팽 굴렸다.
꼴깍, 마른침을 삼킨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윌트슨 공작 부인과 월시 소공작이 서로 어린 시절의 첫사랑인 것을 이용하면 쉽게 접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
“어떻게?”
“윌트슨 공작 부인과 외모나 분위기가 비슷한 친구가 먼저 말을 걸면 딱딱하게 굴지 않을 거라 장담해.”
“…….”
“일단 그렇게 물꼬를 틀면 그 다음엔 우리가 다가가는 거지. 그렇게 얼굴을 트고, 친분을 만들면 되겠지.”
메리엔은 긴장되는 속내를 감추려 일부러 더욱 목소리를 높였고 씨익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제나가 생각에 잠긴 듯 턱을 쓰다듬으며 눈동자를 굴렸다.
“그래, 좋은 생각이야. 그런데… 누가 괜찮을까? 붉은 머리카락에, 녹안에, 마른 체형인 사람이…?”
“…셜리 힐렌버그 어때?”
“힐렌버그…. 남작가의 차녀였던가?”
“응, 맞아. 윌트슨 공작 부인보다 셜리가 키가 좀 더 크지만 비슷한 분위기일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것 같아. 그런데 친해? 난 한 번도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는데.”
“난 파티에서 몇 번 마주친 적 있어. 굉장히 호의적이었고.”
“좋아. 그럼 힐렌버그 영애는 네가 맡아. 할 수 있겠지?”
“알았어.”
짧게 대답한 메리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마음이 바빴다.
먼저 셜리 힐렌버그에게 연락해서 만날 약속을 잡아야 했다.
일단 편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내일 있을 마르코스 백작저의 파티에 동행하자고 말을 꺼내야 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월시 소공작에게 먼저 접근해 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절대 이상하게 들려서도 안 되고, 큰 부탁처럼 들려서도 안 된다.
적당히 가벼운 느낌이어야 했다.
셜리 힐렌버그와 평소 친했다면 부탁이 훨씬 쉬웠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와 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이래서 평소 인맥을 촘촘히 다져 두는 게 중요했다.
‘이번 기회에 친해지지 뭐.’
메리엔은 자신 있었다.
* * *
요즘 들어 제크론이 침실로 돌아오는 시간이 늦었다.
일을 차츰 줄이겠다고 말했지만 그게 영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제크론의 출중한 능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으니 어쩔 수 없으리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혼자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노라면 쓸쓸했다.
‘쓸쓸하다고? 뭐라는 거야…!’
스스로의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나는 요즘 내 입장을 자꾸 헷갈려 하고 있었다.
‘여긴 내 자리가 아니잖아. 언젠간… 떠나야 하잖아.’
앙다문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건강을 회복하고 나면 떠날 생각이었다.
제크론의 운명은 내가 아니라, 베로니카였다.
내가 이대로 계속 제크론의 옆에 있다면 제크론의 운명은 뒤틀리게 되리라.
운명이 뒤틀린 덕분에 나는 살았지만 제크론의 운명이 뒤틀리면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나, 엘프윈은 한낱 엑스트라에 불과했지만 제크론은 다르다.
그는 주인공이었다.
제크론의 운명이 바뀐다는 것은 이 세계의 운명이 바뀐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리라.
‘이 세계의 운명을 바뀌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싶지 않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곧 엑스트라는 조용히 사라져야 한다.
그것이 이 세계의 창조자가 그려 놓은 큰 그림이었으니까.
“후우….”
답답한 마음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난 너와 함께 가지 않아. 난 결혼한 몸이야. 난 여기에 있을 거야.”
“난 여기가 좋아. 이곳에서의 삶이 좋다고….”
지난번 로저먼드에게 큰 소리 쳤던 게 생각나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었다.
말을 하는 중간에도, 말을 다 내뱉고 나서도 그 말이 얼마나 이상한지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주 헛소리를 지껄여 놨다.
“으휴….”
또다시 한숨이 뿜어졌다.
한숨을 쉬는 만큼 걱정, 근심이 줄어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잡생각은 그만! 공부하자, 공부!’
나는 신문을 펴들고, 두 눈에 힘을 빡 줬다.
홀로서기를 하려면 세상을 잘 알아야 한다.
윌트슨 공작 부인이라는 타이틀을 떼고 ‘엘프윈’이라는 이름으로만 살아가려면 이것저것 많이 알아야 했다.
특히 이곳 세계에 대한 지식이 얕은 내겐 일단 신문 기사를 섭렵하는 것이 중요했다.
“앞으로 1년! 읏쌰! 읏쌰!”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공중에 번쩍 올렸다가 아래로 확 끌어당기며 스스로를 응원했다.
응원의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조금 용기가 생기는 것 같았으니까.
1년 뒤,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원작 소설의 내용이 그랬다.
그 전쟁에서 제크론은 큰 부상을 당한다.
마물의 독에 중독되는 부상이었다.
그리고 치유 신녀인 베로니카를 만나 치료받는다.
제크론의 상태가 워낙 특이했고, 위중했기 때문에 신성수 치료로도 그를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채택된 치료 방식이… 매우 19금 로맨스 소설스러웠다.
고대 왕국 시절에 행하던 방식이었으나, 지금은 그런 방식의 치료 행위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크론의 상태가 워낙 특이했고 위중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제크론과 베로니카는 중독 치료를 위해서 몸을 통하다가 결국 마음도 통하게 된다.
둘의 첫 베드씬이었던 치료 장면은 명장면이었고, 나는 그 부분을 여러 번 재탕했다.
삽화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으면 바로 그 장면을 재생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제크론과 베로니카의 입술이 뜨겁게 겹쳐졌고, 그리고….’
흐익!
낯뜨거운 장면이 머릿속에 몽글몽글 피어났다.
금세 얼굴에 열기가 몰렸다.
“안 돼!”
나는 양손을 휘휘 저어 제멋대로 생각나는 19금 장면들을 저 멀리 치웠다.
열기가 식자 다음에 찾아온 것은 짜증이었다.
‘이건 마치… 남편과 전 여친이 알콩달콩 사귀는 모습을 목격한 것 같잖아?’
으으,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들어찼고, 식은땀이 맺힐 것 같았다.
더 이상의 집중은 그른 것 같았다.
나는 신문을 고이 접어 침대 옆 협탁에 아무렇게나 올려놓고는 자리에 누웠다.
제크론이 돌아오기 전에 잠이 들기를 희망하며 나는 두 눈을 꼬옥 감았다.
지금의 마음 상태로 제크론의 얼굴을 보게 된다면 더욱 심란해질 것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