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142)
  • 89화

    엘프윈의 침실에서 나오는 매튜의 표정이 시무룩했다. 

    기대를 많이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쌀알 한 톨 정도는 했나 보다. 

    ‘아무나의 이름이라든지, 자주 다니던 파티라든지…. 아무거나 하나만 걸려 주기를 바랐는데….’

    끄응, 한숨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으며 진료실로 걸어갈 때였다. 

    하인 한 명이 다가왔다. 

    “선생님, 주인님께서 찾으십니다.”

    “공작님께서 말입니까? 어디 계신데요?”

    “집무실에 계십니다.”

    “알겠습니다.”

    매튜는 바로 제크론의 집무실로 방향을 틀었다. 

    변이 마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실 거라는 예상을 품은 채 걸음을 빨리했다. 

    흥미로운 주제의 작업이었다. 

    윌트슨 공작성에서 일하는 주치의가 아니었다면 이번 작업에 참여할 수 없었으리라. 

    이런 이유 때문에 매튜는 윌트슨 공작성에서 오래오래 일하고 싶었다. 

    “지금 엘프윈의 침실에서 돌아오는 길인 거 같은데, 무슨 일로 간 것이었지?”

    “…네?”

    “로저먼드 월시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엘프윈은 자네를 불렀어. 그건 또 왜 그랬지? 무슨 용건이었지?”

    제크론의 용건은 매튜의 예상과는 아예 달랐다. 

    뜻밖의 질문이 마구잡이로 쏟아지자 매튜는 어안이 벙벙했다. 

    더 이상 질문이 쏟아지지는 않았지만 제크론은 거의 노려보다시피 매튜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건지 도대체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제크론의 물음에 곧이곧대로 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크론에게 아르젠토 차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마님께서 빈혈이 있는 것 같다고 하셔서요. 잠시 진찰을 봤습니다.”

    “…빈혈이었단 말이지?”

    팔짱을 낀 채 매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제크론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매튜의 대답을 조금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공작님은 평소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신데 마님에 대한 일이라서 그런가…. 예리하시네.’

    꼴깍, 마른침을 삼킨 매튜는 조용히 입을 닫은 채 제크론의 눈치를 살폈다. 

    제크론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흉포한 포식자의 표정에 매튜는 어깨를 움찔 떨어야 했다. 

    “지금 당장 엘프윈에게 가서 무슨 일로 자네를 만났는지 묻는다면 같은 대답이 나올까? 빈혈 때문이었다고?”

    “…….”

    매튜는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엘프윈과 말을 맞추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럴 필요성도 못 느꼈으니.

    ‘어떻게 해야 하나?’

    매튜는 머리를 팽팽 굴려 봤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실직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가 요즘 아르젠토 차 중독에 대해서 조사 중입니다.”

    “아르젠토 차?”

    “네. 신경 정신증 약물로 쓰이는 차인데, 의사의 처방 없이 과다 복용 시 중독되는 사례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

    제크론은 입을 꾹 닫은 채 매튜의 말에 집중했다. 

    매튜도 있는 사실을 조금 정화해서 말하는 것이기에 큰 무리 없이 설명을 술술 이어 갈 수 있었다. 

    “월시 소공작이 아르젠토 차에 중독됐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마님께 부탁드렸습니다.”

    “…….”

    “월시 소공작과 얘기 나누면서 아르젠토 차를 어디서, 어떻게 구할 수 있었는지 캐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런 부탁을 엘프윈이 순순히 들어줬다고?”

    “네, 감사하게도 그렇습니다. 월시 소공작과는 어린 시절부터 각별한 사이였으니, 그를 도와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크셨습니다. 물론 어린 시절의 기억은 없으시지만요.”

    “아르젠토 차란 말이지…. 흐음….”

    제크론이 침음을 흘렸다. 

    시원하게 뻗었던 짙은 눈썹이 일그러졌지만 그의 잘생김에 흠집이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매튜는 제크론의 질문이 여기서 끝나기를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좋아. 이제 그만 가 봐.”

    “네.”

    제크론이 손바닥을 팔랑거리며 나가라는 신호를 보내자, 매튜는 당장 몸을 돌렸다. 

    제크론의 집무실을 나서면서 소리 없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엘프윈의 아르젠토 차 중독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   *   *

    요소킨 수업 후, 제나와 메리엔은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상점가로 향했다.

    화려한 상점가를 지나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접어들자 곧 목적지에 닿았다. 

    지어진 지 100년도 더 되어 보이는 낡은 2층짜리 건물의 1층에는 간판도 달려 있지 않은 서점이 있었다. 

    중고 책을 거래하는 오래된 서점이었다. 

    화려하고 값비싼 드레스를 입은 귀족 영애의 등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였다. 

    “어서 와.”

    제나와 메리엔이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노파가 거친 목소리로 인사했다. 

    가난뱅이 평민이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귀족 영애에게 반말을 찍찍 날리는 것에 메리엔은 신경이 곤두섰지만 참아야 했다. 

    아쉬운 쪽은 이쪽이었고,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 저 노인네의 비위를 거스르면 안 됐다. 

    몇 년 전 뭣 모를 때는 상식 없이 무례한 노파에게 달려들어 땍땍 소리쳤다. 

    하지만 결국 제 손해로 끝난 그날 이후 메리엔은 이곳에 들어오면 무조건 입을 꾹 닫았고, 모든 대사는 제나에게 맡겼다. 

    노파는 아무 말 없이 손님의 면면을 천천히 확인했다. 

    주름 가득한 얼굴의 작은 틈에서 회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서점 안에는 오래된 책 냄새가 났다. 

    윽, 메리엔은 얼굴을 한껏 찡그리고는 바로 부채를 펼쳐 얼굴 가까이에 대고 팔랑팔랑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서점 안을 둘러보며 노파 말고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제나가 재빨리 말했다. 

    “정보가 필요해요.”

    “어떤 정보?”

    “월시 소공작에 대해서 알아봐 줘요.”

    “월시 소공작이라….”

    노파는 두꺼운 돋보기를 찾아 끼고 장부를 펼쳐 의뢰 내용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연필 움직이는 소리가 서점 안에 조용히 울렸다. 

    “특히 윌트슨 공작 부인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서 부탁드려요.”

    “…윌트슨 공작 부인이라….”

    “월시 소공작의 근황에 대해서도요. 현재 어디서 묵고 있는지, 또 앞으로 한 달간의 세세한 일정도 필요해요.”

    “좋아. 선불인 거 알지?”

    받아쓰기를 다 마친 노파가 벗은 돋보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나는 지갑에서 지폐 뭉치를 한꺼번에 꺼내 노파에게 내밀었다. 

    돈을 세지도 않고 그대로 넘기는 제나를 향한 노파의 눈매가 잠깐 휘었다. 

    지폐를 받아 든 노파는 손가락에 타액을 묻히고 지폐를 세기 시작했다. 

    느리지만 야무진 손놀림이었다. 

    “좋아. 이틀 뒤 이 시간에 와.”

    노파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제나와 메리엔은 인사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자신들과 어울리지 않는 낡고 추한 장소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담긴 움직임이었다. 

    메리엔이 앞서 걷는 제나를 향해 뭔가를 묻고 싶어 입을 벙긋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때는 말 한마디, 한마디 조심해야 했다. 

    ‘물어보나 마나 머리를 팽팽 굴리며 계획을 짜고 있겠지.’

    메리엔은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하고 있는 제나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최고의 장면을 엮어 내기 위해서는 치밀하게 작전을 짜야 했다. 

    몇 가지의 변수도 다 생각해 둬야 했다. 

    부정 탈 만한 행동이나 발언은 삼가야 했다. 

    무엇보다 제나의 기분을 거스르는 행동이나 발언은 절대 해서는 안 됐다. 

    메리엔은 꼴깍,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꾹 닫은 채 걸음에 집중했다. 

    *   *   *

    로저먼드는 라하브의 한 호텔에 짐을 풀었다. 

    이곳에서 며칠 머무르면서 쉬다가 다음 주에 메드록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따뜻한 물로 채워진 욕조에 앉은 로저먼드는 생각이 많았다. 

    늘 그랬듯이 그의 머릿속을 채우는 생각 대부분은 엘프윈에 대한 것들이었다. 

    한 손에 들고 있던 붉은 와인을 호로록 마셨다. 

    입꼬리 끝으로 흘러나온 붉은 와인 줄기를 닦아 내는 그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아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점점 더 화가 치솟고 있었다. 

    “후우….”

    짙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바닥을 보인 와인 잔에 다시 와인을 따랐다. 

    ‘이젠… 진짜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언젠가 돌아와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귀족들의 결혼은 사실 명목뿐인 행사였다. 

    가문과 가문의 정치, 경제적 결합. 

    후계자를 생산하기 위한 결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엘프윈은 분명 약속했다. 

    “곧 돌아올 수 있을 거야. 후계자를 낳으면 그땐… 돌아올게.” 

    하지만 지금의 엘프윈은 과거의 약속 따위는 싹 다 잊어버렸을 게 뻔했다. 

    잊지 않았다면 저한테 이런 식으로 행동할 수는 없을 테니까. 

    로저먼드는 와인을 한꺼번에 쭈욱 들이켰다. 

    부드러운 와인이 식도를 타고 흘러 들어갔다. 

    “…난 너와 함께 가지 않아. 난 결혼한 몸이야. 난 여기에 있을 거야.”

    “…이곳에서의 삶이 좋다고.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아무렇지 않게 저런 말이나 내뱉는 엘프윈의 모습이 떠올라 로저먼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들고 있던 와인 잔을 테이블 위에 탁, 거칠게 내려놨다. 

    그 반동으로 테이블이 흔들리면서 와인 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챙그랑, 바닥에 부딪힌 와인 잔이 거친 파열음을 내며 산산조각 났다. 

    그는 그대로 욕조에서 나와 목욕 가운을 대충 걸쳐 입었다. 

    침실로 들어간 그는 서랍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아르젠토 찻잎이 든 상자였다. 

    오늘 밤은 이 녀석의 힘을 빌어야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둘이… 이런 사이였단 말이지?”

    후후, 제나의 입에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제나와 메리엔은 서점 노파에게서 받은 양피지 두루마리를 반복해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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