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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88/142)
  • 88화

    “이젠 후계자를 낳아 줬으니, 네 역할은 끝난 거 아닌가? 이젠 좀 편안히 자유롭게 살아도 되지 않아?”

    로저먼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역할이 끝났다고?

    자유롭게 살아도 된다고?

    ‘이 남자는 결혼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순간 화가 치솟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다정한 말로 구슬리면서 아르젠토 차를 어떻게 공수했는지에 대해서 캐물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서서히 내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설마… 예전 엘프윈과 이런 식의 대화를 했던 건가? 결혼은 그냥 형식일 뿐이라고? 그냥 후계자만 낳아 주면 되는 거라고? 그 이후에는 자유롭게 살 거라고?’

    내가 엘프윈의 몸을 차지했으니, 그녀에게 묻고 싶어도 물을 수 없었다. 

    후우, 답답한 한숨을 시원하게 내뱉고는 입을 천천히 열었다. 

    “후계자를 낳았으니, 이제 후계자를 잘 키우면서 살아야지. 애 키우다 보면 시간 훅훅 잘 간대.”

    “…….”

    “결혼해서 유부녀로 사는 생활도 괜찮아. 결혼 전 영애로서의 삶과 비교해 봐도 더 답답하거나 하지 않아. 어차피 귀족 여인의 삶이 다 거기서 거기잖아. 가문에 종속되어 있는 삶이니까.”

    “적응해 보려 해도 진짜 적응 안 된다. 완전 달라진 네 모습.”

    “그런데 로저먼드, 너는 왜 아직 결혼하지 않은 거야? 너도 결혼하고, 아이 낳고, 안정 찾으면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말이 우스웠던 것일까. 

    하! 그의 입에서 어이없는 웃음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한껏 가늘어진 로저먼드의 눈매가 날카롭게 빛났다. 

    “결혼하면 안정된다고, 아이 낳으면 안정된다고 누가 그래? 로맨스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거 아니야, 엘프윈? 그런 건 현실에선 없어. 모두 다 환상이라고, 환상!”

    “…….”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그런 건 잊어버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파탄 난 가정 때문에 너와 내가 얼마나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아, 그랬던 거였나?

    엘프윈의 친정인 하이그린 백작가나 로저먼드의 월시 공작가는 가정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건가?

    ‘그래서 비슷한 처지의 엘프윈과 로저먼드가 친해진 것이고?’

    상처로 얼룩진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힘들었을 두 사람이 안타까웠다. 

    베일에 감춰졌던 둘 사이의 접점에 대해서 약간의 실마리를 얻게 된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로저먼드가 예리한 눈빛과 목소리로 물었다. 

    “아르젠토 차는 완전히 끊은 거야?”

    어쭈, 아르젠토 차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꺼내시겠다? 

    반가워해야 하나, 괘씸해해야 하나, 분간이 잘 서지 않았다.

    나 역시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로저먼드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응, 물론.”

    “네 남편도 알아?”

    “…….”

    제크론을 건드리시겠다?

    심히 불편한 질문에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찻잔을 내려놨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찻잔과 받침대가 마찰하면서 내는 달그락 소리가 꽤 크게 울렸다. 

    마주앉은 로저먼드를 지그시 바라보는데 그의 입매가 한쪽으로 비뚜름히 올라갔다. 

    “그 반응…. 역시 네 남편은 모르는가 보구나.”

    후후, 하긴 그렇겠지. 로저먼드는 곧 여유롭게 웃으며 호두파이 조각을 입에 넣었다. 

    ‘뭐야, 이 자식!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더니. 내 속을 긁으러 온 건가?’

    로저먼드의 뜬금없는 방문의 목적이 대충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나는 웃음기를 지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게 뭐 대단한 자랑이라고 제크론에게 말하겠어. 될 수 있으면 평생 꽁꽁 숨기고 싶은 비밀인걸. 지우고 싶은 흑역사인걸.”

    “비밀? 흑역사?”

    내가 내뱉은 단어들을 주워다가 제 입에 담아 보는 로저먼드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주먹까지 말아 쥐었다. 

    옛 추억을 부정하는 내 말에 화가 많이 나는 모양이었다. 

    후우, 나는 한숨을 내뱉는 동시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로저먼드…. 여기 왜 온 거야? 싸우러 왔니? 나는 네가 사과하러 온 줄 알았어. 중독 치료를 받으러 온 줄 알았다고. 그런데 이게 뭐야, 대체….”

    나는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진심을 담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나는 정말… 내가 달라진 것처럼 너도 달라졌으면 했어. 내가 중독 치료를 받은 것처럼 너도 치료 받고 나아졌으면 했다고.”

    “…….”

    “마지막으로 부탁할게. 치료받자. 내가 도와줄게. 내가 옆에 있어 줄게.”

    그 순간 로저먼드의 두 눈이 빛났다. 

    이상한 광기 같은 게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역시 그렇지? 엘프윈, 너… 나랑 함께해 주는 거지?”

    “그렇….”

    나는 하려던 말을 온전히 다 끝낼 수 없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진짜 미친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진짜 미친 사람의 눈빛이 지금 내게로 향하는 로저먼드의 눈빛과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잡았던 그의 손을 놓았다. 

    하지만 이번엔 로저먼드가 내 손을 붙잡았다. 

    손아귀의 힘이 너무 억세서 잡힌 손이 아팠다. 

    “남편과 다정한 건 다 연기인 거지? 눈속임인 거지? 결국 마지막엔 나를 선택해 줄 거지?”

    “정신 차려, 로저먼드.” 

    “뭐…라고?”

    머릿속에 헛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런지 그는 방금 내가 한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면 제대로 들어도 이해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이해했는데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거나. 

    다시 그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또박또박 천천히 말했다. 

    “정신 차리라고. 난 너와 함께 가지 않아. 난 결혼한 몸이야. 난 여기에 있을 거야.”

    “그게 무슨….”

    “난 여기가 좋아. 이곳에서의 삶이 좋다고.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너도 그만….”

    로저먼드는 잡고 있던 내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마지막으로 준 기회였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다니. 내가 알던, 내 친구 엘프윈은 죽었어.”

    “로저먼드….”

    “넌 엘프윈이 아니야. 네가 엘프윈일 리가 없어. 진짜 엘프윈이라면… 내게 이런 말을 뻔뻔하게 할 리 없지!”

    로저먼드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인사도 없이 사라지는 그를 보며 나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를 따라갈 힘이 하나도 없었다. 

    순간 피로감이 확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로저먼드와의 만남은 항상 화가 나서 씩씩거리는 그의 얼굴로 끝났다. 

    일관성이 있다고나 할까. 

    ‘오늘도 실패했군. 매튜에게 미안하게 됐네.’

    로저먼드에게서 아르젠토 차에 대해서 알아내지 못했다. 

    아무리 기대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래도 로저먼드가 먼저 아르젠토 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땐 약간의 기대감이 슬쩍 올라오기도 했다. 

    ‘역시….’

    한숨을 푹푹 내쉬며 침대로 향했다. 

    휴식이 필요했다. 

    *   *   *

    제나 핸더슨과 메리엔 도론 일행을 태운 마차가 공작성의 현관 계단 앞에 멈춰 섰다. 

    요소킨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마차에서 네 명의 영애가 차례대로 내렸다. 

    그리고 때마침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는 로저먼드와 딱 마주쳤다. 

    하지만 서로 안면이 없었기에 그저 묵례를 가볍게 하고는 지나쳤다. 

    로저먼드의 빠른 걸음을 따라가는 집사장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가득했다. 

    로저먼드가 마차에 오르자 집사장이 큰 소리로 인사했다. 

    “월시 소공작님, 조심히 가십시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로저먼드를 태운 마차는 그대로 쌩하니 달리기 시작했다. 

    제나가 집사장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월시 소공작님께서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은데?”

    “그게… 저도 내막은 잘 모릅니다.”

    집사장은 말을 아꼈다. 

    공작성의 고용인으로서 바른 처신이기도 했지만 사실 진짜 내막을 모르기도 했다. 

    제나가 또 아는 척을 했다. 

    “월시 소공작님과 윌트슨 공작님과 친분이 있는 사이인 줄은 몰랐어요.”

    “주인님과 아니라 마님과… 아, 아닙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제나의 유도 신문에 집사장은 무심결에 쓸데없는 말을 해 버렸다. 

    중간에 정신을 차리고 말을 멈추기는 했지만 눈치 빠른 제나는 원하는 정보를 쏙쏙 제대로 빼들었다. 

    ‘오호, 월시 소공작과 윌트슨 공작 부인이라? 그림이 재밌겠는데?’

    문제는 월시 소공작에 대해서 아는 정보가 하나도 없다는 데 있다. 

    하지만 괜찮다. 

    돈이 있고, 방법을 안다면 정보를 사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으니까. 

    ‘앞으로 좀 바빠지겠군.’

    후후, 제나의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걸렸다. 

    메리엔이 제나의 표정 변화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로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작지만 분명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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