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142)

87화

세르안과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고 있을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케이트가 들어왔고, 로저먼드의 방문 소식을 알려 왔다. 

“로저먼드? 왜?”

“지나는 길에 들렀다고 해요. 선물 상자를 잔뜩 들고 왔어요.”

“흐음?”

로저먼드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두 달 전 모슈워에서였다. 

험악한 분위기로 끝났던 만남 이후 로저먼드를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지금 1층 응접실에서 기다리세요. 어떻게 할까요?”

“매튜를 만나야겠어. 매튜를 내 방으로 불러 줄래?”

“네, 알겠습니다, 마님.”

일단은 작전 회의가 필요했다. 

아르젠토 차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를 꺼내면 좋을지에 대한 매튜의 조언이 필요했다. 

날 치료하면서 아르젠토 차 중독에 관심을 갖게 된 매튜에게 나도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컸으니까. 

호출을 받은 매튜가 다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월시 소공작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님.”

“그래서 불렀어요. 아르젠토 차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접근하면 좋을지 해서요.”

“흐음….”

잠시 고심하는 눈치였다. 

너무 갑작스러운 방문이기도 했고, 로저먼드에게서 뭔가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안 한 지 오래였으니까. 

매튜의 고심은 길지 않았다. 

그의 미간에 잡혔던 주름이 곧 펴졌다. 

매튜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굳이 깨내려고 하지 마시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가시면 되겠습니다.”

“…….”

“여전히 옛 친구의 건강을 걱정하는 친구의 태도를 유지하면서 옛 이야기를 은근슬쩍 물어보세요. 마님께서 기억 못하는 옛 이야기 속에서 특별한 접점을 지닌 인물의 이름이 나오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알겠어요.”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월시 소공작이 아르젠토 차 중독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갑자기 그렇게 변하는 것은 쉽지 않겠지요. 그러니 천천히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네, 그렇게 할게요.”

나는 머릿속으로 매튜의 이야기를 되뇌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어려울 것은 없었다. 

친한 친구와의 대화처럼 자연스러우면 될 일이었다. 

걱정을 약간 가미하면서 말이다. 

매튜와의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다시 똑, 똑, 노크 소리가 났다. 

문 전체를 울리는 노크 소리가 평소와 달리 컸지만 떨림은 짧았다. 

문을 두드리는 사람의 주먹이 잔뜩 경직된 것 같은 소리였다. 

“들어와요.”

내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렸고, 제크론이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노크 소리만큼이나 잔뜩 굳어 있었다. 

하지만 제크론은 경직된 얼굴을 감추려 애써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 보이며 말했다. 

“월시 소공작이 방문했다고 하는군. 나도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딱딱한 표정에 딱딱한 음성.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제크론은 로저먼드의 방문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음을.

*   *   *

“어서 와, 로저먼드.”

“오랜만입니다, 월시 소공작.”

내 침실에 딸린 개인 응접실로 안내된 로저먼드를 향해 우리 부부는 인사말을 건넸다. 

인사 도중 제크론의 팔이 자연스럽게 내 허리를 두르는 감각에 살짝 놀랐지만 표정이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다. 

로저먼드의 시선이 잠시 내 허리에 닿았다고 느낀 순간, 그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안녕하십니까, 윌트슨 공작님. 오랜만입니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메마른 어투였다. 

로저먼드의 시선이 짧게 제크론을 향했다가 바로 내 눈에 닿았다. 

“미리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 엘프윈. 아니지…. 이 자리에선 공작 부인이라고 불러야 하나?”

로저먼드가 조금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제크론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눈치를 살핀다고는 했지만 제크론의 대답이 어떻든 로저먼드는 결국 자기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를 것 같았다.

단지 예의상 묻는 것뿐이었다. 

제크론과 시선을 교환한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괜찮아. 너 편할 대로 불러.”

“그래, 엘프윈. 그냥 지나는 길에 생각나서 들렀어. 출산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대로 지나쳐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와 줘서 고마워.”

발 빠른 하녀들의 솜씨로 곧 디저트 테이블이 완벽하게 세팅됐다. 

향긋한 차를 입 안으로 호로록 넘기고 있는데 로저먼드가 말했다. 

“차드엘 산맥 마물 토벌에 성공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역시 ‘전투의 신’다우십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대화의 내용은 훈훈했지만 그 내용을 전달하는 목소리나 표정은 전혀 훈훈하지 않았다. 

대화의 내용물과 포장지의 온도차가 현격해 분위기가 삽시간에 어색해졌다. 

‘뭐지, 이 자연스럽지 못한 공기는?’

하긴 서로 전혀 친분이 없는 사이이니 그럴 만도 했다. 

제크론은 사교성이 좋은 타입이 아니었다. 

그것은 로저먼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나는 제크론과 로저먼드의 눈치를 살피며 호로록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인사만 한다던 제크론은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커다란 손으로 찻잔을 들고 차를 마시는 모습이 너무 멋져서 나는 곁눈질로 힐끔거리며 황홀한 장면을 즐겼다. 

매일 보는 얼굴이었지만 매일 다른 매력으로 내 눈을 호강시키는 제크론에게 감사했다. 

제크론의 선명한 입매가 잠시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모슈워의 건설 현장에 석재를 납품하는 일에 소공작께서 직접 왕래하는 줄은 몰랐습니다.”

“네, 이제 아버지께서 슬슬 은퇴를 준비 중이라서요. 작년부터 후계자 수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처음엔 뭐든 발로 뛰어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방침입니다.”

“그렇군요. 월시 소공작께서 공작 작위를 받게 되는 날이 멀지 않았군요.”

“네. 이곳, 뎀프샤만큼은 아니지만 메드록 역시 다른 영지들에 비하면 워낙 방대한 지역이라 이것저것 배워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바쁘시겠습니다.”

대화 내내 제크론과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치던 로저먼드가 이번에는 나를 보며 입꼬리를 길게 늘렸다. 

오후의 햇살을 받은 로저먼드의 금안이 밝게 빛났다. 

“바쁘지만 옛 친구를 위한 시간은 충분히 낼 수 있으니, 엘프윈, 언제 꼭 한 번 남부에 잠시 들러 주면 좋겠어.”

“아? 그…래. 고마워.”

갑작스러운 제안에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남부에는 엘프윈의 친정인 하이그린 백작가의 영지와 로저먼드 공작가의 영지가 있었다. 

물론 내 기억에는 없는 곳이었다. 

긍정의 대답에 기분이 좋았는지 로저먼드가 방긋 웃으며 다시 말했다. 

“엘프윈, 사실 네 건강을 생각하면 북쪽의 냉랭한 기후 보다는 남쪽의 온난한 기후가 더 좋을 거야. 그러니 빠른 회복을 위해서라도 남부에 한번 들러. 내 극진히 대접할 테니 말이야.”

그때였다. 

후후, 제크론이 작은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아내의 건강에는 여름이 긴 남부보다는 사계절이 뚜렷한 뎀프샤가 더 나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오랜만에 친정을 방문하는 것도 좋은 생각이겠군.”

제크론은 특히 ‘아내’와 ‘친정’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리고 눈매를 반으로 접으며 나를 마주 보며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크론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좀 어색하기도 했다. 

‘역시 로저먼드가 싫은가 보구나.’

나는 제크론을 불편한 자리에서 구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마음이 불편한 것은 싫었으니까. 

게다가 나는 로저먼드에게 긴밀히 들어야 할 이야기도 있었고 말이다. 

“그런데 당신, 여기 계속 있어도 돼요? 바쁜 거 아니었어요?”

“…….”

“당신은 그만 가서 일 보세요. 괜히 당신 시간 뺏고 싶지 않아요.”

내 말에 제크론이 적잖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입을 잠시 쭈뼛거리던 제크론이 뭔가 말하려는데 로저먼드가 먼저 선수를 쳤다. 

“아 참, 공작님께선 바쁘셨군요! 하긴 제국에서 가장 유능한 젊은 인재시니까요. 바쁘신데도 불구하고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저먼드는 아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제크론에게 작별의 악수를 청했다. 

잘생긴 이마가 잠시 일그러졌다고 생각한 순간, 제크론도 자리에서 일어나 로저먼드의 손을 맞잡았다. 

힘을 세게 줬는지 손등에 굵은 힘줄이 툭 불거져 나왔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럼 대화 나누십시오.”

로저먼드에게 인사를 마친 제크론은 내게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크론은 내 손을 가볍게 그러쥐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보드라운 입술이 잠시 닿았다 떨어졌다. 

“즐거운 시간 보내.”

“네. 고마워요.”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갈 줄 알았던 제크론은 불쑥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마에 닿았던 제크론의 입술은 볼을 거쳐 마침내 내 입술 위에도 잠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입맞춤은 가벼웠지만 제크론의 숨결이나 손길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그의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내 얼굴에 진득하게 닿아 오는 매혹적인 눈빛에 심장이 작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며칠 떨어질 사람처럼 왜 이러실까? 

꼴깍, 마른침은 삼킨 나는 얕은 호흡을 내쉬며 흥분한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물론 쉽진 않았지만. 

“이따 밤에 봐.”

“…네.”

마침내 제크론이 사라졌고, 응접실엔 나와 로저먼드만 남았다. 

그는 미간을 잔뜩 좁히는 것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로저먼드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남편과 사이가 꽤 좋구나.”

“응, 뭐…. 남편이니까.”

“잘해 줘?”

“응.”

민망한 물음에 짧게 대답한 나는 찻잔을 들어 호로록 차를 마셨다. 

다소 날이 선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이젠 후계자를 낳아 줬으니, 네 역할은 끝난 거 아닌가? 이젠 좀 편안히 자유롭게 살아도 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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