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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86/142)

86화

 

“그러고 보니….”

제크론은 뭔가 생각난 듯 얼굴이 환해졌다. 

나는 꼴깍,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렇다면 엘프윈, 당신이 내 첫사랑이 되는 건가? 첫사랑이자, 동시에 마지막 사랑?”

“네?”

무척 달콤한 말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남자가 날 사랑한다고 하고 있었다. 

순간 몸 속 어딘가에서 시작된 열기가 금세 몸 전체를 달아오르게 했다. 

‘그런데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이해할 수 없어….’

제크론은 정말 베로니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분명 베로니카는 제크론을 기억하고 알아보는 눈치였는데? 왜 제크론은 베로니카를 기억 못 할까?’

신성력이 발현되면 머리카락 색이 자연스럽게 은색으로 변한다.

그래서 대신관을 비롯한 모든 신관과 신녀들은 모두 은발이었다.

원래 금발이었던 베로니카가 은발로 변한 모습을 못 알아보는 것은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첫사랑을 묻는데도 베로니카의 이름이 바로 떠오르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더 물어봤자 헛수고일 것 같으니, 이쯤에서 포기하자.’

그동안 제크론에게는 수많은 일이 있었다. 

셀 수도 없이 무수한 전투에서 여러 번 죽을 뻔하다 살아나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 베로니카와의 아름다운 추억은 기억 창고 깊숙한 곳에 묻어 둔 걸지도 몰라.’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랬다. 

나는 제크론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잊지 말아요. 난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첫사랑을 응원할 거예요.”

“…….”

갑작스러웠던 걸까. 

첫사랑 응원 발언에 제크론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   *   *

늦은 아침 식사를 끝내고 제크론은 집무실 책상에 앉았다. 

많은 일을 보좌관실에 넘겼지만 그래도 그가 직접 확인해야 할 일들이 여전히 많았다. 

물론 이것도 차츰 줄여 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변이 마물과 관련된 문제로 긴급히 확인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변이 마물에 대한 연구 보고서를 다시 한 번 더 살피는 것부터 시작해서 관련 서적을 훑어보며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야 했다.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데, 이상하게 제크론은 집중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후우….”

두 눈을 부릅뜨고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지만 정신은 자꾸 딴 곳으로 향했다. 

결국 그는 서류를 내려놨다. 

주먹을 쥐고 불룩 튀어나온 손가락 마디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엘프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당신 첫사랑은 어땠어요?”

“잊지 말아요. 난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첫사랑을 응원할 거예요.”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첫사랑이라고 부를 만한 인연이 없다고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엘프윈은 그럴 리 없다고 했다. 

마치 저도 모르는 첫사랑을 그녀가 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다면 대체 왜?’

제크론의 눈썹 사이에 진한 주름이 생겼다. 

한 가지 거북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마물 토벌로 자리를 비웠던 사이, 뎀프샤 영지 내에서 일어난 이런저런 일들을 보고 받을 때의 일이었다. 

로저먼드 월시의 이름을 두 번 들었을 때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먼저는 로저먼드가 공작성에 선물들을 잔뜩 들고 찾아왔다고 했다. 

하지만 얼마 머무르지 않고 씩씩 성을 내면서 나갔다고 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부보좌관이 모슈워에 로저먼드를 만나러 갔는데, 엘프윈이 함께 갔다고 했다. 

로저먼드를 만나서 해야 할 말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제크론의 앙다문 어금니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처음 그 보고를 들었을 때 잠깐 신경이 쓰였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엘프윈이 갑자기 첫사랑을 운운하자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것이 더 이상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지 않았다. 

제크론은 알고 있었다. 

엘프윈과 로저먼드가 어린 시절 한때 좋아했던 사이라는 것을 말이다. 

두 사람의 가문은 옛날부터 서로 왕래가 잦았다고 들었다. 

그래서 엘프윈과 로저먼드도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가깝게 지냈다고 했다. 

‘엘프윈의 첫사랑은… 로저먼드, 그 작자겠지. 당연히.’

로저먼드의 얼굴을 떠올리자마자 속에서 열불이 확 피어올랐다. 

도저히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는 상태가 됐다. 

그는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고 심호흡을 크게 내쉬었다. 

“으으…. 으윽!”

짜증 섞인 신음이 입술을 뚫고 튀어나왔다.

제크론은 연신 더운 숨을 크게 뱉어 내며 두 눈을 감고 평정심을 되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로저먼드 월시…!”

그 남자를 딱 한 번 본 적 있었다. 

바로 결혼식 피로연장에서였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로저먼드와의 기억이 손 쓸 틈도 없이 불쑥 밀려들었다. 

*   *   *

2년 전, 제크론과 엘프윈의 결혼식. 

두 사람의 결혼식은 특별히 황궁에서 열렸다.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제크론의 업적을 치하하기 위한 황실의 특별한 예우였다. 

하지만 전쟁이 막 끝난 시점이었기에 많은 것이 부족했던 때였다. 

아무리 황궁에서 열리는 전쟁 영웅의 결혼식이라 할지라도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제국 어느 곳이나 비슷한 상황이었다. 

피로연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을 때였다. 

제크론과 엘프윈은 팔짱을 낀 채 회장 안을 돌아다니며 손님 한 명, 한 명과 감사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마침내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는 로저먼드에게 다가갔다. 

“로저먼드, 와 줘서 고마워.”

엘프윈이 명랑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때와는 현저히 다른 높은 톤의 목소리에 제크론은 살짝 놀랐다. 

놀란 표정을 재빨리 갈무리한 제크론도 로저먼드를 향해 정중히 말했다. 

“결혼식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술기운 때문인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의 로저먼드가 제크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전쟁 영웅의 파티는 뭔가 다를 거라 예상했는데… 기대와는 아주 딴판이라서 놀랍군요.”

로저먼드가 피로연을 비꼬았다. 

그의 무례한 반응에 당황하며 먼저 반응한 것은 엘프윈이었다. 

그녀는 얼른 주위를 살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작은 목소리로, 하지만 또박또박 말했다. 

“로저먼드, 취했어? 작작 좀 마시지 그랬어! 벌써 많이 취한 것 같으니까 그만 돌아가. 괜히 실수나 하지 말고.”

엘프윈은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고, 단지 남동생을 타이르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로저먼드는 그녀의 타박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절대 취하지 않았다며 생글생글 웃었다. 

그렇게 웃다가도 또 이내 제크론을 향해서는 두 눈을 가늘게 뜨는 로저먼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엘프윈은 쉽게 만족시킬 수 있는 여자가 아니야. 그녀에게 걸맞은 대접을 해 줘야 할 거야. 그런데 이런 식이면… 곤란해! 곤란하다고! 전부 다…. 이게 뭐야! 다 싸구려들!”

로저먼드는 연회장 전체를 삿대질하며 거침없이 비웃었다. 

제크론도 슬슬 화가 올라왔지만 술주정뱅이를 상대할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가지가지 한다, 너! 안 되겠다. 그만 돌아가.”

엘프윈은 손짓으로 하인을 불렀다. 

로저먼드는 하인들에게 붙들린 채 그대로 연회장 밖으로 나가야 했다. 

저렇게 막말을 할 정도로 술에 취했는데도 불구하고 엘프윈의 말에는 반항 없이 잘 따르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엘프윈이 제크론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미안해요. 저 친구가 많이 취했나 봐요.”

“괜찮아.”

당시 제크론은 무례한 술주정뱅이의 말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잊은 것은 아니었다. 

엘프윈과 로저먼드 사이의 스스럼없는 분위기도, 저를 무슨 도둑놈 보듯 하던 로저먼드의 눈빛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았다.

*   *   *

‘엘프윈이 내 첫사랑을 응원하겠다는 말은… 나도 그녀의 첫사랑을 응원해 줬으면 한다는 말인가?’

만약 이 추론이 맞는다면 끔찍했다. 

제크론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쿵쾅쿵쾅, 심장이 어지럽게 뛰었다. 

그때였다. 

집사장의 외침이 들렸다. 

“주인님! 주인님!”

“깜짝이야! 왜 소리를…?”

“죄송합니다. 그게 몇 번 불렀는데도 못 들으시는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엘프윈의 첫사랑 생각에 워낙 몰두해 있느라 집사장의 온 것도 몰랐다. 

머쓱해진 제크론이 얼른 용건을 물었다. 

“무슨 일이지?”

“월시 소공작님께서 공작성을 방문하셨습니다.”

“로저먼드 월시?”

제크론의 잘생긴 두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그자가 여긴 왜 또 나타난 거지?

“네, 맞습니다. 공작 부인을 만나 뵙겠다며 오셨습니다.”

“미리 연락도 없었는데?”

“네. 지나는 길에 잠깐 들렀다고 합니다.”

“뭐? 지나는 길에? 하!”

어이가 없었다. 

말이 되는 소리가 아니었다. 

감히 귀족의 성에 미리 알리지도 않고 이렇게 불쑥 나타난다니. 

예의가 아니었다. 

제크론은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나도 인사 정도는 해야겠지.”

매서운 표정에 어울리는 건조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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