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마법사 스탠리의 불손한 태도는 미리 예상한 바였다.
마법사 중에서도 특히 동물과 관련된 주술을 잘 다루는 그는 황제 앞에서도 불손한 태도를 보여 구설수에 휘말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번 변이 마물 조사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기에 그의 능력을 얻기 위해서 그 나머지 것들은 흔쾌히 감수해야 했다.
제크론은 표정 변화 없이 다시 부드럽게 말했다.
“중대하고 급박한 사안이라 어쩔 수 없었소. 양해 부탁하오.”
“이해하겠소.”
바로 회의가 시작됐다.
제크론이 마물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마물과 싸워서 죽이는 방법 정도였다.
그러므로 변이 마물이라는 생소한 사안에 대해서는 마법사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마법사 스탠리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다.
변이 마물이라는 존재의 출현이 그의 구미를 당긴 게 분명했다.
“일단 변이 마물의 사체를 살펴봐야 하오. 그리고 살아 있는 마물도.”
“사체는 지금 바로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마물은 조금 더 시간을 주십시오.”
마법사 스탠리의 발언에 대답한 것은 황실 마법기사단장 소피아였다.
그렇게 몇 마디가 더 오간 후, 조사단의 첫 회의는 끝났다.
조사단원은 매일 밤 같은 시간에 이곳, 제크론의 집무실에서 모이기로 하고 흩어졌다.
마법을 다루는 이들답게 마법 포털 이용이 가능했기에 모임이 훨씬 수월했다.
“호오, 황실 조사단에 들어가니 이런 것도 받게 되고. 할 만하네, 이거.”
마법사 스탠리가 황실에서 제공한 마력석 팔찌를 흡족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마력석 중에서도 검정색의 마력석은 가장 최고급으로, 엄청난 양의 마나를 운용할 수 있게 돕는다.
인간에게 체력의 한계가 있는 것처럼, 마법사들에게도 마나의 한계가 있다.
하지만 강력한 마력석의 도움을 받는다면 같은 시간 동안 훨씬 강력한 마법을 훨씬 많이 시전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1년에 생산할 수 있는 최고급 마력석은 몇 개 되지 않았기에 가격이 하늘을 찔렀다.
보통의 마법사는 평생 만질 수도 없었다.
하지만 황실의 업무를 돕는 마법사들에게 황실에서 이 최고급 마력석을 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분명 스탠리도 검정 마력석을 받는다는 조건이 붙지 않았다면 조사단에 합류하지 않았을 터였다.
“후우….”
모두가 사라진 집무실에 혼자 남은 제크론은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물 토벌 작전이 끝난 후, 이제 좀 여유를 부리며 엘프윈과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싶었는데, 계획이 다 어그러졌다.
하지만 제국에 닥친 위험은 곧 개인에 닥친 위험이었다.
하루 속히 위험의 가지를 쳐내고, 줄기를 베야 했다.
그리고 그 뿌리까지 완전히 뽑아 제국을, 제국민을,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을 지켜야 했다.
* * *
자정에 가까울 정도로 늦은 시간이었지만 오후에 낮잠을 잔 덕분에 아직 졸리지 않았다.
침대 헤드에 기대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문이 조용히 열렸다.
제크론이었다.
깨어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놀랐는지 그의 두 눈이 잠시 동그랗게 커졌다.
“당신, 아직 깨어 있었군.”
“낮잠을 자서 그런지 잠이 안 와서요.”
곁으로 다가오는 제크론을 보며 나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방금 목욕을 마쳤는지 그의 머리카락이 조금 젖어 있었다.
침대 안으로 스윽 들어와 옆에 앉은 그가 내 책에 관심을 보였다.
“무슨 책을 읽고 있었지?”
“로맨스 소설이요.”
나는 책을 덮어 표지에 적힌 제목을 그에게 보였다.
“『그 남자의 첫사랑』? 재밌어?”
“남자 주인공이 멋있어요.”
후후, 나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소설 속 남주보다 내 눈앞의 남주가 더 멋있다는 말은 마음속으로만 했다.
제크론의 잘생긴 눈썹이 조금 일그러진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그가 입을 열었다.
“그 남자 주인공… 어떤 사람인데?”
“네?”
예상치 못한 맥락의 질문에 순간 멍해졌다.
제크론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마치 학생을 가르치는 학교 선생님 같은 말투였다.
“당신, 소설책은 허구라는 거 알고 있지? 그 남자는 소설 속에만 존재해. 진짜 세상에는 없는 사람이라고. 그거 다 알면서 책 읽고 있는 거 맞지?”
“당신, 뭐라는 거예요? 내가 소설과 현실을 분간 못하는 열 살 소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허, 순간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숨이 뱉어졌다.
하지만 어린 소녀 취급이 기분 나쁜 건 아니었다.
그만큼 순수하다는 뜻일 수도 있으니까.
입매에는 절로 빙그레 미소가 걸렸지만 눈매는 애써 가늘게 떠 제크론을 흘겨봤다.
“그런데 당신 그거 알아요?”
“뭐?”
“어떤 소설은 현실이 되기도 한다는 거요. 책 속에만 있는 줄 알았던 남자 주인공이 어느 날 내 앞에 불쑥 나타날 수도 있다는 거요.”
이렇게 당신이 내 옆에 있는 것처럼요. 나는 눈썹을 씰룩거리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쏘아 보냈다.
피식, 제크론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군.”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두고 봐요.”
치잇, 나는 뾰로통해져 입술을 내밀었다.
그리고 불쑥 내 앞으로 고개를 숙인 그가 내 입술에 쪼옥, 입을 맞췄다.
“뭐예요, 갑자기!”
“너무 귀여워서 그랬어. 열 살 소녀 같아서.”
“당신 정말….”
뭐라고 한소리 더 하고 싶었지만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그의 뜨거운 입술이 다시 겹쳐 왔기 때문에.
‘뭐야…. 열 살 소녀 같다면서…. 열 살 소녀한테 이렇게 키스한다고요?’
머릿속에 짓궂은 생각이 두둥실 떠올랐다.
내 생각을 읽었던 것일까.
제크론이 입술을 떼고는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반짝이는 푸른색 눈동자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붉어진 얼굴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그의 커다란 손이 내 볼을 살며시 잡고 있어서 나는 운신의 자유를 잃었다.
“당신, 집중 안 하지?”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이번에도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제크론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덕분이었다.
가장 약한 부분을 너무도 잘 아는 제크론을 상대하는 것이 점점 버거워지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옆자리를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 돼 버렸다.
제크론은 오늘도 침대 위에 앉아서 뭔가를 읽고 있었다.
주로 신문을 읽는데 오늘은 책이었다.
부스럭거리며 움직이는 소리에 제크론이 내 쪽을 봤다.
“깼어? 잘 잤어?”
“네. 당신도 잘 잤어요?”
“응. 당신 향기는 꼭 수면제 같아.”
“설마요. 그런데 뭘 읽는 거예요?”
내 물음에 제크론이 책 표지를 보여 주며 방긋 웃었다.
그의 손에는 내가 어제 읽던 소설책이 들려 있었다.
“『그 남자의 첫사랑』.”
“당신이 그걸 왜 읽고 있어요?”
“그걸 몰라서 물어?”
“몰라서 물어요.”
“당신이 멋지다고 말하는 남자 주인공이 어떤지 내가 알아야 할 거 아니야.”
“뭐라고요? 진심이에요, 당신?”
푸흡, 하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귀여운 남자를 어찌하면 좋을지 당최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아예 침대 위에 엎드린 채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제크론을 올려다봤다.
초롱초롱 두 눈을 신나게 빛내면서.
제크론은 내가 그러든가 말든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책에만 시선을 집중했다.
“진심이야. 그러니까 방해하지 말아 줘. 지금 거의 다 읽어 가는 중이니까.”
쌜쭉거리며 말하는 것도 무척 귀여웠다.
입꼬리를 귀에 건 채 히죽거리며 제크론이 독서 삼매경에 빠진 모습을 보고 있는데 순간 어떤 용기 같은 것이 가슴 속에서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나는 그 동안 내내 제크론에게 묻고 싶었던 것을 감히 입에 담았다.
“당신 첫사랑은 어땠어요?”
“첫사랑? 그런 거 없는데?”
제크론은 여전히 책을 읽으면서 내 질문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뭐야, 이 사람?
지금 거짓말을 하는 건가?
그의 첫사랑이 누군지 빤히 알고 있는 내 앞에서?
거기서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다시 물었다.
“첫사랑이 없는 사람도 있어요? 에이, 그러지 말고 말해 줘요.”
“정말이야. 열여덟 살에 군대에 들어가는 바람에 시간도, 기회도 없었는걸.”
“열여덟 살 전에는요? 원래 딱 그 때 쯤이 첫사랑하기 가장 좋을 때잖아요.”
제크론은 결국 책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봤다.
하지만 진짜 생각나는 사람이 없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으…. 속 답답해.
타들어가는 가슴을 팡팡 두드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렇지만 정말 없는걸.”
“없긴요? 베….”
아차, 싶었다.
내 입으로 베로니카의 이름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선 안 됐다.
“그러고 보니….”
제크론은 뭔가 생각난 듯 얼굴이 환해졌다.
나는 꼴깍,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