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화 (84/142)
  • 84화

    원래 제크론은 이른 아침부터 이런저런 일정을 소화해야 할 만큼 바쁜 사람이었다. 

    전생에서 읽었던 소설책에서도 그렇게 그려졌고, 출산 전 각방을 쓸 때의 경험에 비춰 봐도 그랬다. 

    국정 업무와 영지 관리 업무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았다. 

    “당신 안 바빠요?”

    “응. 나는 아니야. 조쉬나 그 밑에 부보좌관들은 바쁘겠지만.”

    빙그레 웃는 그의 얼굴에 어쩐지 좀 짓궂었다. 

    “보좌관실 인력을 늘렸다더니…. 당신 일을 다 떠넘기고 있는 건 아니죠?”

    “이유가 어쨌든, 고용 창출은 좋은 거 아닌가?”

    그가 읽고 있던 신문을 접어 협탁에 아무렇게나 올려놓고는 내 옆으로 누우며 내 허리를 안았다. 

    “보고 싶었어, 엘프윈.”

    “계속 여기 같이 있었으면서요?”

    “응. 보고 있어도 항상 더 보고 싶어.”

    그의 부드러운 키스가 시작됐다. 

    마치 새가 먹이를 쪼듯이 그의 보드라운 입술이 내 이마를, 볼을, 콧등을 쪼옥 쪽, 쪼기 시작했다. 

    “…간지러워요.”

    “나도 참았으니까, 당신도 조금만 좀 참아 줘.”

    아침부터 순도 백 퍼센트의 달콤함은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절대 뿌리칠 수 없는 달콤함이었다. 

    그 달콤함이 빠져 죽을지언정 말이다. 

    “으…. 으음….”

    제크론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자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제크론은 목덜미가 내 가장 약한 부분임을 잘 알았다. 

    그의 품 안에서 더워진 몸을 비틀고 있을 때였다. 

    똑,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님! 도련님께서 깨셨습니다.”

    “응, 들어와!”

    바로 문이 열렸고, 유모가 이동식 아기 침대를 천천히 끌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덕분에 제크론의 키스가 멈췄다. 

    그의 붉은 입술이 아쉬운 듯 떨어졌고, 크흐음, 입술을 질끈 씹으며 한숨을 삼켰다. 

    세르안이 방긋방긋 웃으며 팔 다리를 버둥거렸다. 

    제크론이 아이를 번쩍 안아 들자, 아이가 꺄르르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아들이 아침부터 기분이 좋구나! 아빠는 네가 방해해 준 덕분에 기분이 썩 좋지 못한데 말이야.”

    제크론이 눈매를 가늘게 뜨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의 의미를 알 리 없는 세르안은 연신 꺄르르거리기 바빴다. 

    제크론은 조심히 아이를 내게 넘겼다. 

    그러면서도 또 한마디를 덧붙였다. 

    “가끔 너한테 엄마를 뺏긴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이지.”

    “애한테 그런 말이 어딨어요?”

    세르안을 받아 안은 나는 제크론을 향해 부드럽게 눈을 흘겼다. 

    제크론은 입술을 삐죽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짐짓 심각한 목소리였다. 

    “장난 아니고, 진심이야. 아이를 기숙사 학교에 보내고 싶은 부모의 심정을 벌써부터 알 것 같다고나 할까?”

    “뭐라고요? 기숙사 학교요? 아직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애한테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드는 걸 어떡해?”

    내가 도끼눈을 뜨며 묻자, 제크론이 볼을 긁적이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흥, 나는 제크론에게서 고개를 돌려 세르안을 바라봤다. 

    제크론의 얼굴 대부분과 엘프윈의 눈을 가진 아이가 방긋방긋 웃었다. 

    유모는 이렇게 잘 울지 않는 순한 아기는 처음 본다면서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고는 했다. 

    “세르안, 우리 아가야! 아빠가 가끔 바보 같은 장난말을 해도 이해해 줘.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라서 잘 모르는 걸 테니까.”

    심술이 났는지 제크론이 세르안 앞으로 얼굴을 불쑥 내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세르안, 잘 들으렴. 이건 바보 같은 장난말이 아니라 아빠의 진심이란다. 엄마는 아빠 사람이니까, 여기서 더 욕심내지 말거라.”

    “당신 정말!”

    “너는 지금처럼 울지 말고, 속 썩이지 말고, 건강하게 어서 빨리 무럭무럭 자라려무나. 그리고 기숙사 학교에 가는 거다.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말이다.”

    “나는 절대로 우리 세르안 기숙사 학교에 안 보낼 테니까, 그렇게 알아요.”

    “당신… 갑자기 왜 이렇게 차가워진 거야?”

    “그건 당신이 먼저….”

    “아이를 더 낳고 싶다는 말 취소야. 아이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당신을 뺏기는 것 같은데, 아이를 더 낳으면 절대 안 되겠어.”

    제크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억울한 목소리를 냈다. 

    몸집은 산만 한 다 큰 어른이 생떼 쓰는 모습이 어이가 없어 나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최고 귀족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황궁으로 가는 마차 안. 

    조쉬는 제크론에게 이런저런 보고를 하느라 바빴다. 

    요즘 제크론이 집무실에 거의 잘 붙어 있지 않는 탓에 이런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최대한 많은 보고를 해 놓아야 했다. 

    “좋아, 그렇게 진행하도록 해.”

    가만히 조쉬의 보고를 다 들은 제크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쉬는 해당 서류에 확인 표시를 하고, 바로 다음 장으로 넘겼다. 

    다음 장의 내용을 확인한 조쉬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이번 건은 본인이 말로 보고를 하기 보다는 해당 서류를 제크론에게 넘기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이건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각하.”

    서류를 건네받은 제크론은 빠르게 내용을 훑었다. 

    미간에 잡힌 주름이 점점 진해졌다. 

    이번 차드엘 산맥에서 대적한 변이 마물에 대한 조사 결과였다. 

    “이게 뭐야…. 인위적 마력 실험의 흔적이 발견됐다고?”

    제크론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서류를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읽었다. 

    다시 읽어도 내용에는 변함이 없었다. 

    “심각한 문제군.”

    서류에서 시선을 거둔 제크론은 앞에 앉은 조쉬를 바라봤다. 

    사태의 심각성이 중대했기에 조쉬 역시 아무 말도 못한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제크론의 머릿속이 바빠졌다. 

    ‘대체 누가, 어떤 의도로 이런 일을 꾸민 것이란 말인가!’

    마물의 수가 엄청났다. 

    그렇게 많은 마물의 변이를 성공시켰다는 것은 훨씬 오래전부터 이 일을 준비해 왔거나 그들의 기술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했다. 

    ‘누군가의 악의에서 비롯한 실험이라면 앞으로 짧은 시간 안에 더 강한 변이종이 발생할 가능성도 무척 높겠지.’

    당장 내일일 수도 있고, 다음 주, 혹은 다음 달일 수도 있었다. 

    이번엔 인적이 드문 차드엘 산맥 지역이 주 무대였지만 다음엔 사람이 사는 마을이 공격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수도나 황궁도 안전하다 할 수 없었다. 

    “흐음….”

    무겁고 짙은 한숨이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뿜어져 나왔다.

    *   *   *

    “그런….”

    제크론의 보고를 받은 황제와 황태자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무거운 긴장감이 알현실의 공기를 짓눌렀다. 

    황제의 알현실에는 지금 세 사람뿐이었다. 

    최고 귀족 회의 시작 전, 제크론이 먼저 황제와 황태자에게 알현을 신청해서 이 자리가 마련된 참이었다. 

    보고를 들었지만 황제와 황태자에게도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끔찍하고 중대한 사안이었지만 처음 맞닥뜨리는 종류였기에 모두 어안이 벙벙한 상태가 됐다. 

    제크론이 입을 열었다. 

    “일단 면밀한 조사가 필요합니다. 믿을 수 있는 자들로만 구성된 소수 정예의 조사단을 만들어야 합니다.”

    “좋아. 윌트슨 공작, 자네가 단장을 맡아 조사단을 꾸리게.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는 데에는 이게 필요할 걸세.”

    황제가 끼고 있던 인장 반지를 빼 제크론에게 건넸다. 

    마법사들 중에는 함께 일을 도모하기 까다로운 인물들이 많았다. 

    특히 능력이 출중할수록 그런 성향이 짙었다. 

    그러므로 황제의 인장 반지가 있다면 훨씬 더 수월하게 유능한 마법사들을 포섭할 수 있으리라.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폐하. 조사 내용은 바로 황태자 전하께 보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돌아가기 전에 내 궁에 들러서 통신구를 챙겨 가게.”

    “알겠습니다, 전하.”

    심각한 표정의 제크론은 허리를 꾸벅 숙여 절하고는 알현실을 나섰다. 

    인위적으로 조작된 마물로 인해 수백의 군사가 죽거나 다쳤다. 

    더욱 강력해진 변이 마물이 또 출몰한다면 사상자의 수가 수백에서 수천, 혹은 수만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리라. 

    제국의 운명을 흔들 만큼의 중차대한 사건이었다. 

    제크론의 어깨가 무거웠다. 

    *   *   *

    그날 밤, 제크론의 집무실은 오랜만에 늦게까지 불이 밝혀져 있었다. 

    속전속결로 꾸린 조사단이 원탁 주위에 둘러앉았다. 

    제크론은 조사단원의 면면을 찬찬히 살폈다. 

    보좌관 조쉬, 주치의 매튜, 황실 마법 기사단장 소피아 루커, 부단장 글렌 손더스, 동물 마법의 일인자 스탠리 랜더와 그의 조수 헬렌 베리, 총 일곱 명이 모였다. 

    속전속결로 꾸렸다고는 하나 한 명 한 명이 지닌 능력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출중했다. 

    모두의 시선이 제크론에게 향하자 마침내 제크론이 입을 열었다. 

    “바쁜 와중에도 부름에 응해 주셔서 감사하오.”

    “황제 폐하의 인장으로 부탁하니 따르지 않을 수 없지 않겠소.”

    마법사 스탠리가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뚱한 목소리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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