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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83/142)
  • 83화

    “오늘도 친히 공작성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작을 틀어 버린 장본인이 원작 여주를 만나는 것은 영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침실 안으로 들어서는 신녀들을 보며 활짝 웃어 보였지만 나는 알았다. 

    분명 내 미소는 어딘가 어색해 보였으리라는 것을. 

    “안녕하세요, 공작 부인.”

    “많이 쾌차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부인.”

    새하얀 신녀복의 아미트와 베로니카가 사뿐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매번 침대에 누운 채 그들을 맞았는데 두 발로 서서 그들을 맞이하는 내 모습에 놀란 모양이었다. 

    주로 무표정으로 일관했던 신녀들의 얼굴에 작지만 확실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모두 신녀님들의 치료 덕분입니다. 너무 감사해요.”

    “저희는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공작 부인의 치료를 도울 수 있어 저희도 기쁩니다.”

    인사를 하는 사이, 하인들이 신성수가 담긴 커다란 물통을 끌고 왔다. 

    하인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욕실에 있던 욕조를 침실 안으로 옮겨 왔고, 욕조 안에 신성수를 채워 넣었다. 

    치료 준비가 얼추 되어 가고 있을 때였다. 

    제크론이 들어왔다. 

    나를 향해 활짝 웃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제크론과 베로니카가… 만났어!’

    남주와 여주가 내 시야에 함께 걸리다니.

    결국 이런 날이 오고야 말다니.

    눈앞에 펼쳐진 장면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릿하게 흘러갔다. 

    두 사람은 제크론이 18세 때 전쟁에 참전하면서 헤어졌으니, 7년 만에 재회한 셈이었다. 

    원작에서의 재회 시점보다 훨씬 앞선 만남이었다. 

    쿵쾅쿵쾅,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뛰었다. 

    힘이 풀린 다리가 덜덜 떨렸다.

    제크론은 신녀들에게 다가가 꾸벅 인사했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오늘이 마지막 치료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제크론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아미트였다. 

    베로니카는 가만히 선 채 제크론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진 것을 보면 그녀는 제크론을 한 번에 알아본 것 같았다.

    하지만 제크론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의 표정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단지 아내의 치료를 걱정하는 남편의 표정만 보일 뿐이었다. 

    “그럼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위메나 님께서 도우실 것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공작님.”

    “위메나 님께 영광을.”

    제크론이 두 손을 모으며 공손히 말했다. 

    마주선 신녀들도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위메나 님께 영광을.”

    잠시 제크론과 베로니카의 시선이 스쳤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제크론은 여전히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고, 베로니카도 그를 알은체하지 않았다. 

    신녀님들과 인사를 마친 제크론이 내게 다가왔다. 

    더없이 다정한 표정이었던 그의 얼굴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당신, 어디가 안 좋아? 얼굴이 창백한데?”

    “아….”

    표정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대답도 선뜻 나오지도 않았다. 

    그가 내 이마에 손을 얹으며 열이 있는지 확인했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매튜를 부를까?”

    “아니에요. 이제 곧 신녀님들께 치료를 받게 될 텐데요. 괜찮아질 거예요.”

    애써 목소리를 짜내 대답했지만 내 대답이 그의 걱정을 덜어 주지는 못했던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생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정말이에요. 난 괜찮아요.”

    “그래, 그럼. 치료 잘 받고, 잠시 후에 봐.”

    제크론이 내 이마에 쪼옥, 입을 맞췄다. 

    말캉한 감촉이 잠시 닿았다가 떨어지는데 이쪽을 보고 있던 베로니카와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베로니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하얀 얼굴에 금세 옅은 홍조가 올라왔다. 

    ‘아…!’

    기분이 이상했다. 

    제크론의 입맞춤을 훔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크론을 훔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슴에 무거운 돌이 얹어졌다. 

    *   *   *

    그날 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제크론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모로 누워 비어 있는 옆자리를 봤다. 

    괜히 그의 베개를 슬며시 쓸어 보았다. 

    “설마 기다리는 거야?”

    스스로를 비웃듯 피식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젠 각방을 쓰던 시절이 아득해질 정도로 둘이서 한 침대를 쓰는 게 많이 익숙해졌다.

    다시 바로 눕고 천장을 쳐다봤다. 

    조용히 타고 있는 벽난로의 불빛 덕에 천장에 비친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멍하니 움직이는 그림자를 보고 있는데, 불현듯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제크론과 베로니카가 만났던 장면 말이다. 

    그러자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내가 사랑했던 소설 속 두 주인공의 만남이었다. 

    멋지고 용맹하지만 세상만사에 다소 냉소적인 남주, 제크론을 좋아했다. 

    아름답고 순하지만 위기의 순간에 강단을 보이는 여주, 베로니카를 동경했다. 

    갖가지 장애물을 뛰어넘고 결국 운명적 사랑을 이룩하고야 마는 둘을 응원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어.’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원작이 뒤틀리고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내가 바라던 바였다. 

    하지만 바라던 바를 이룬 지금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기고 말았다. 

    ‘이제 베로니카는 어떻게 되는 걸까? 제크론은?’ 

    모를 일이다. 

    원작의 흐름은 이미 틀어져 버렸다. 

    아무리 원작을 읽은 나라고 해도 틀어져 버린 줄거리를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후우….”

    짙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쓸데없는 걱정 따위는 다 잊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지고 싶었다. 

    두 눈을 꼭 감았다. 

    끼익, 방문이 천천히 열렸고, 발걸음 소리가 났다. 

    제크론이리라. 

    아직 깨어 있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잠결에 뒤척이는 것처럼 움직여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그가 스르륵 침대 안으로 들어왔다. 

    향긋한 비누 향이 풍겼다. 

    “당신, 벌써 자?”

    나긋한 중저음이 귓가에 감겼지만 물음에 대답하지는 않았다. 

    오늘 밤은 그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떤 표정으로

    제크론은 내 이마에 살짝 손을 대 열이 있는지 확인했다. 

    요즘 매일 만날 때마다 하는 다정한 루틴이었다.

    “열은 없네. 착하게도.”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심술이 났다. 

    ‘열이 있으면 착하지 않은 건가?’

    입술을 움찔거리며 속으로 구시렁거릴 때였다. 

    등 뒤에서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제크론은 거의 대부분 누우면 바로 잠드는 날이 많았다.

    ‘암튼… 속 편한 사람이라니까.’

    나는 벌써 한 시간째 못 자고 있는데, 누운 지 5분 만에 잠이 든 제크론이 얄미워져 또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잠이 안 든 상태에서 한 자세를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았다. 

    다시 몸을 뒤척이는 척하며 바로 누웠다. 

    슬쩍 고개를 돌려 제크론을 보니 가슴이 일정한 속도로 오르락내리락했다. 

    일렁이는 벽난로 불빛에 맞춰 그의 옆얼굴에 진 음영도 함께 일렁였다. 

    그 모습이 또 너무 황홀할 정도로 멋져서 나도 모르게 넋 놓고 바라봤다. 

    뒤척이던 그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려 눕더니 내 허리에 팔을 감는 게 아닌가. 

    우리 사이에 베개가 가로막고 있었지만, 별로 소용없었다. 

    갑자기 쑤욱 가까이 다가온 그의 숨결에 놀란 나는 흠칫 몸을 떨어야 했다. 

    근육으로 뒤덮인 굵고 단단한 팔에 힘이 들어갔고, 내 이마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두근두근, 심장이 철없이 촐랑거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제크론의 입술이 움직였다. 

    “…잠이 안 와?”

    움직이는 입술이,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숨결이 내 이마를 간질였다. 

    자고 있지 않았던 건가?

    아니면 나 때문에 깬 건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잠꼬대인 건가?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는 또 묻지 않았다. 

    ‘그냥 잠꼬대 비슷한 거였구나. 후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그가 나를 더 꼬옥 안는 게 아닌가. 

    이젠 그의 가슴팍에 내 볼과 코가 닿을 지경이 돼 버렸다. 

    쿵쿵, 쿵쿵, 제크론의 심장도 내 심장만큼이나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야단스러운 꿈이라도 꾸는 걸까?

    그래서 잠을 설치는 걸까?

    ‘제크론…. 꿈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잘 자요.’

    전하지 못할 말을 속으로 삼키면서 나는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따뜻하고 단단한 품 안으로. 

    어느새 졸음이 몰려오고 있었다. 

    ‘나는 이 품을… 포기할 수 있을까?’

    이 생각을 마지막으로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   *   *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떴을 때 이미 창밖은 환했다. 

    옆자리를 보니 제크론이 신문을 읽고 있었다. 

    요즘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먼저 일어나도 아침 식사를 먼저 하거나, 일정을 시작하는 일이 없었다. 

    그저 침대에 앉아 신문을 읽으며 내가 깨나기를 기다렸다. 

    내가 스스로 깨기 전에 먼저 깨우는 일도 전혀 없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생긋 웃어 보였다. 

    “깼어?”

    제크론의 미소는 찬란한 아침 햇살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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