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42)
  • 80화

    “으으… 으으윽!”

    다시 시작된 진통에 엘프윈은 입에 문 부드러운 천을 짓씹으며 고통에 찬 신음을 토해냈다. 

    제크론이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어깨를 단단히 안았다. 

    “엘프윈, 잘하고 있어! 그래, 지금처럼만! 좀 더 힘을 주면 돼!”

    제크론이 곁에 있어 준 덕분에 안심은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엘프윈은 제크론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울부짖었다. 

    산파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자, 힘을 주셔야 합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세게 힘을 주세요! 힘껏!”

    엘프윈만큼이나 벌게진 얼굴의 케이트와 주디도 힘을 보탰다. 

    “마님, 조금만 더요! 더!”

    “잘하고 계세요! 마님! 그렇게 하시면 돼요!”

    그때였다. 

    산파가 외쳤다. 

    “좋아요, 좋아! 아기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어요! 자, 셋을 셀게요. 마지막으로 힘껏 힘을 주세요! 하나, 둘, 셋!”

    “으으…. 으아앗!”

    엘프윈은 이를 악물며 소리를 내질렀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모든 힘을 짜냈다.

    잠시 뒤,

    “으으애…애애앵!”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작았던 울음소리가 점차 커졌다.

    “애애…애애앵! 우아아아앙!”

    아기를 받아든 산파가 부드러운 천으로 아기의 몸을 감쌌다. 

    산파는 아기를 제크론에게 건네며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도련님이시네요! 축하드립니다, 공작님!”

    제크론은 조심히 아기를 받아들었다. 

    갓 태어난 아기는 너무나 작았다. 

    제 팔뚝만큼도 되지 않는 아기를 받아든 제크론은 바짝 긴장했다.

    그는 엘프윈에게 아기의 얼굴을 보이며 말했다. 

    “엘프윈, 보여? 이 작은 아이가 우리 아이래.”

    “아….”

    “당신이 낳은 아이야. 안아 볼 수 있겠어?”

    축 늘어진 엘프윈의 몸은 눈꺼풀을 들 힘조차 없었다. 

    엘프윈은 아이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아이를 품에 안고 싶었다. 

    ‘내 아이…. 제크론과 나의, 우리의… 아이.’

    하지만 감긴 눈꺼풀 사이로 새까만 어둠이 들어왔다. 

    그리고 바로 암전. 

    “엘프윈…!”

    *   *   *

    베로니카가 대신관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새하얀 집무실 안은 언제나처럼 완벽하게 정리정돈이 돼 있어 사람이 생활하는 곳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였다. 

    “어서 와요, 베로니카 신녀.”

    대신관이 손에 들고 있던 깃펜을 내려놓으며 다소 건조한 목소리로 그녀를 맞았다.

    “알현 요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신관님.”

    단정하게 인사한 베로니카는 대신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긴장했는지 그녀의 하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무슨 일로 알현을 요청한 거지요?” 

    “윌트슨 공작 부인 치료에 대해서 건의드리고 싶습니다.”

    “네, 말씀해 보세요.”

    대신관은 손깍지를 낀 채 가만히 베로니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두근두근, 베로니카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감히 대신관님께 건의하러 겁도 없이 이 자리까지 오다니.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간이 부었다. 

    하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준비한 말은 끝까지 해야만 했다. 

    윌트슨 공작 부인을 위해서. 

    그리고 저 스스로를 위해서도.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많은 제국민들이 윌트슨 공작 부인의 신성수 치료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네, 그렇지요.”

    “처음 위벨 메시나 증서로 신성수 치료를 약속했을 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

    “윌트슨 공작 부인의 출산이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될 것이라는 걸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요?”

    순간 대신관의 눈매가 가늘어지면서 날카로운 빛을 띠었다.

    달라진 대신관의 눈빛에 더욱 긴장한 베로니카는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달라진 상황에 따라 신성수 치료에도 약간의 조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흐음….”

    대신관이 턱을 쓸어내리며 미간을 좁혔다. 

    고심하는 눈치였다. 

    대신관의 얇은 입술이 매끄럽게 움직였다.

    “그래서 정확히 건의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죠?”

    “신성수 치료 횟수를 늘리는 게 어떨까 합니다. 윌트슨 공작이 위벨 메시나 증서까지 사용하면서 살리고자 하는 공작 부인입니다. 우리 위벨교 대신전도 위중한 공작 부인의 건강을 염려하고 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건의 사항입니다.”

    말을 하다 보니 긴장이 풀렸는지 베로니카는 떨지 않고 또박또박 준비했던 말을 다 마쳤다. 

    베로니카의 말이 끝났지만 대신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예 두 눈을 감은 채 깊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뒤,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저, 정말요?”

    너무 기쁜 나머지 베로니카는 하마터면 소리까지 지를 뻔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꾸벅 접었다. 

    “감사합니다, 대신관님!”

    “제가 감사하죠. 우리 위벨교의 위엄과 신망을 위하는 베로니카 신녀의 마음에 탄복했습니다.”

    그 후로도 베로니카는 몇 번 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나서야 집무실을 나갔다. 

    혼자 남은 대신관의 얼굴에 매섭게 변했다. 

    “베로니카 신녀가… 대체 왜?”

    베로니카가 완전히 변했다. 

    조용하고 말 수가 적은 베로니카는 이제까지 내내 순종적이고 착실한 신녀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런데 최근 유독 윌트슨 공작 부인의 치료에 대해서만 적극적인 의견을 내비치고 있었다. 

    “갑자기 성격이 바뀐다라?”

    예감이 좋지 않았다.

    대신관의 미간이 잔뜩 일그러졌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아미트와 베로니카가 신성수를 들고 공작성을 찾아왔다. 

    엘프윈의 출산 소식을 듣고 추가 신성수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전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매튜는 몇 번이고 허리를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아미트가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별말씀을요. 위벨 메시나 증서의 환자이신걸요. 위벨교 신전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대신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공작 부인의 상태는 좀 어떤가요?”

    베로니카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매튜가 안경을 추어올리며 차분하게 답했다. 

    “난산이었습니다. 출산 전후로 하혈이 많았습니다. 아직까지 의식이 없으신 상태입니다.”

    “…그렇군요.”

    어느새 베로니카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아미트는 베로니카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그리고 매튜와 베로니카를 번갈아 쳐다보며 부드럽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신성수 치료를 하면 공작 부인을 살릴 수 있어요. 자, 서두릅시다.”

    “네, 신녀님.”

    “부탁드립니다.”

    아미트와 베로니카는 매튜의 안내에 따라 엘프윈의 침실로 향했다. 

    베로니카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하늘에 계신 위메나 신께 기도를 드렸다. 

    제발 신성수 치료가 엘프윈을 구할 수 있기를. 

    제발 엘프윈이 건강을 되찾을 수 있기를. 

    *   *   *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침실 앞에 다다른 매튜가 아미트와 베로니카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누운 엘프윈은 죽은 듯 잠들어 있었고, 그 옆은 붉게 충혈된 눈의 제크론이 앉아 있었다. 

    제크론에게 다가간 매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각하, 신녀님들께서 신성수 치료를 위해 오셨습니다.”

    제크론은 푹 숙였던 고개를 들어 매튜를 쳐다봤다. 

    언제나 강인한 모습만을 보였던 공작의 초췌한 모습에는 영 적응이 힘들었다. 

    “…신성수 치료?”

    목소리가 상당히 잠겨 있었다. 

    매튜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층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마님의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소식을 듣고 감사하게도 추가 치료를 자처하셨습니다.”

    “아, 그것 참 감사한 일이군.”

    순간 제크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제크론의 눈치를 슬쩍 살핀 매튜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신성수 치료는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립니다. 그 동안 따뜻한 물에 목욕도 하시고 식사도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각하?”

    매튜의 제안에 제크론은 대답 없이 누워있는 엘프윈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그녀를 놔두고 혼자 편히 쉬는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각하께서 강건한 모습으로 곁을 지키고 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좋아.”

    제크론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엘프윈의 창백한 손등에 입술을 갖다 대며 속삭였다. 

    “엘프윈, 위메나의 신성이 당신을 도울 거야.”

    제크론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겼다.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신녀들과 마주치자 제크론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했다. 

    “먼 길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그의 입 밖으로 뱉어지는 단어 하나, 하나에 절절한 감정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 

    아내를 걱정하는 마음,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제크론을 담은 베로니카의 눈동자가 작게 떨렸다. 

    하지만 베로니카와는 달리 제크론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워낙 오래된 인연이었으니까. 

    게다가 과거의 베로니카는 금발에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지금의 베로니카는 은발에 새하얀 신녀복을 입고 있었으니까. 

    못 알아보는 게 당연했다. 

    한편 베로니카는 인사의 말을 건네고 싶어 입술을 움직여 봤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베로니카 대신 아미트가 목소리를 냈다. 

    침착하고 공손한 목소리였다. 

    “윌트슨 공작 부인을 도울 수 있어 저희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작 부인의 치료에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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