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여, 여긴!’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익숙하고도 낯선 곳에 와 있었다.
지난 생의 내 방이었다.
‘다시 돌아온 걸까?’
어리둥절한 상태로 몸을 일으켰다.
밖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엄마와 언니의 목소리였다.
방문을 열어 거실로 나가니 그리운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눈물이 차올랐다.
달려가 와락 껴안고 싶었다.
오랜만이라고, 보고 싶었다고 소리 내어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와 언니는 내 쪽을 힐끔 보기만 할 뿐 대화에 열중했다.
언니가 말했다.
“나 임신했어. 그래서 말인데, 매달 학비 갚는다는 명목으로 생활비 보냈던 거 앞으로 당분간은 좀 힘들 것 같아.”
“그….”
갑작스런 소식에 엄마는 잠시 말을 잃었다.
하지만 곧 얼굴 전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났다.
“임신 축하한다, 우리 딸. 생활비는 어쩔 수 없지, 뭐. 엄마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언니가 이번엔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나를 보며 말했다.
익숙한 장면이었다.
이미 한 번 겪었던.
“미안하게 됐어. 네가 내 학비 도와줬던 것처럼, 이번엔 나도 네 학비 도와줄 생각이었는데…. 덜컥 임신이 되는 바람에.”
나와 언니 눈치를 번갈아 살피던 엄마가 손사래를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휴, 가족끼리 그런 걸로 미안할 게 뭐 있어. 너도 결혼했으니, 이제 네 가족을 먼저 챙기는 게 맞지. 그리고 임신이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둘째 학비는 걱정 마. 엄마가 알아서 할 테니.”
언니는 분명 나한테 미안하다고 한 것 같은데, 엄마가 나 대신 괜찮다고 말했다.
과거의 나는 눈물까지 뚝뚝 흘리며 버럭 화를 냈었다.
“언니가 나한테 사과했는데 왜 엄마가 괜찮다고 하는 건데! 임신이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 정신 차리고 피임 제대로 했으면 되는 거잖아! 분명 대충 했겠지. 제대로 안 했겠지!”
백 퍼센트 확실한 피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말을 지껄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는 바람에 이성이 제 기능을 못했다.
해서는 안 될 말을 해 버렸다.
“깐깐하고 똑 부러진 언니가? 덜컥 임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몇 년 지난 기억이었지만 붉으락푸르락 변했던 언니의 얼굴이, 난처해서 일그러지던 엄마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흐느끼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 냈다.
“내 학비는 엄마가 어떻게 알아서 할 건데? 막내 학비 먼저 챙기고 나면 내 학비는 어떻게 할 건데? 아빠 병원비며, 생활비는 어떻게 할 건데?”
과거의 나는 그렇게 외치고는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정처 없이 걷는 내내 눈물을 흘리며 세상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덜컥 임신 따위를 한 언니를 원망했고, 언니 편을 들면서 속도 없이 축하한다고 말하는 엄마를 원망했다.
형부를 원망했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조카도 원망했다.
‘그리고… 나 자신을 가장 많이 원망했지. 아니, 혐오했지.’
그때를 떠올리는 지금도 가슴이 찌릿찌릿 너무 아팠다.
몽둥이처럼 커다란 바늘로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
엄마와 언니의 시선이 여전히 내게로 향하고 있었다.
이대로 입을 열면 과거와 같은 실수를 해 버릴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다.
“어? 눈이네?”
눈앞에 날리는 눈송이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손을 허공에 들어 눈송이를 받았다.
손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은 눈송이가 금세 사르르 녹았다.
‘언니가 임신 소식을 알렸을 때는 늦봄이었던 것 같은데… 눈이라니?’
지금 이 상황이 꿈이라는 증거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만히 서서 눈을 맞고 있을 때였다.
어느새 두꺼운 검정 패딩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한 손에는 케이크 상자가 들려 있었다.
상자 안을 들여다보니 초코 케이크였다.
초코 케이크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나는 우유 생크림 케이크나 치즈 케이크를 좋아한다.
‘이 케이크는… 우리 올케 취향이었지. 그리고….’
눈 내리는 겨울날, 초코 케이크를 들고 있다는 것은 오늘이 내가 죽은 날이라는 의미였다.
그랬다.
언니가 낳은 조카의 돌이 다가오는 시점이었고, 대학교 1학년생이던 남동생이 혼전 임신 속도위반 결혼을 한 지 한 달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한 집에 살던 올케는 입덧이 심했는데, 그날따라 초코 케이크가 너무 먹고 싶다고 했다.
마침 남동생은 집에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내가 케이크를 사러 빵집으로 향했다.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날씨는 추웠고, 밤은 깊었고, 나는 피곤했으니까.
케이크를 사고 집으로 털레털레 걷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눈이라도 함께해 줘서 쓸쓸하지는 않구나.’라는 무척 감상적인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순간 강한 충격을 받은 몸은 하늘 위로 튕겨져 올라갔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꿈이 왜 이래?’
함박눈이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어이가 없어 피식 실소가 흘러 나왔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어떤 깨달음 같은 것이 내 머리를 세게 내려쳤다.
‘그러고 보니 나… 죽는 순간, 언니나 올케 탓을 많이 했던 것 같아.’
워낙 찰나의 순간이었기에 뚜렷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슴 속에 꽤 묵직한 응어리가 짓누르는 느낌이 있었는데, 대부분 가족에 대한 원망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흐흐흑…. 원망해서 미안해, 언니. 미안해…. 올케…. 조카들아…. 흐흑!”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땅바닥에 엎드려 엉엉 목 놓아 울었다.
그제야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새로운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 곧 죽을 임산부의 몸으로 빙의된 채 깨어난 이유를 말이다.
가족을 원망했던 새까만 마음 때문에,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어린 조카를 원망했던 불온한 마음 때문에….
“…벌을 받은 거야…. 흐흐흑!”
그것을 이제야 알다니.
나도 참 바보 같구나.
흐흐흑…. 흐느낌이 계속 이어졌다.
눈물이 마르지도 않고 계속 흘러내렸다.
꿈속에서는 홀쭉해진 배를 붙잡고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아리야…. 엄마가 미안해. 흐흐흑…. 못난 엄마라서… 정말 미안해…. 흐흑!”
벌을 받은 몸이라 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동안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했다고 해도, 밥을 잘 챙겨 먹었다고 해도, 신성수 치료를 받았다고 해도… 난 살 수 없을 것이다.
이건 벌이니까.
아리는 엄마를 잃을 것이다.
제크론은 아내를 잃을 것이다.
“아…. 제크론…. 흐흐흑…!”
그가 떠오르자마자 눈물이 더욱 거세졌다.
그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은 날 참담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헤어질 줄 알았으면 좀 더 좋아할 걸 그랬다.
좋아한다고 몇 번이고 말해 줄 걸 그랬다.
* * *
엘프윈의 의식이 점멸하려던 그때였다.
“엘프윈!”
저택의 침실 문이 거칠게 열렸고, 제크론이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그 뒤로 조쉬와 집사장도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주인님! 도착하셨군요!”
제크론을 맞은 것은 놀란 매튜와 하녀들이었다.
제크론의 등장에 걱정과 근심만이 가득했던 그들의 얼굴에 잠깐이지만 환희의 빛이 스쳤다.
제크론이 곁을 지켜 준다면 엘프윈도 안정을 찾고 좀 더 힘을 낼 수 있으리라.
바로 침대로 달려가 엘프윈의 상태를 확인한 제크론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엘프윈은 의식을 잃은 채 끙끙 앓고 있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온통 땀범벅이었다.
희미한 신음소리가 연거푸 쏟아졌다.
“으으… 제크…론! 으윽…!”
“그래! 엘프윈, 나야! 제크론이야! 내가 왔어! 당신 옆에 내가 있어!”
제크론은 엘프윈의 가느다란 손을 꼭 붙잡으며 외쳤다.
의식 저편에서 헤매고 있을 엘프윈에게 제 목소리가 닿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그때였다.
엘프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눈꺼풀이 열렸다.
“엘프윈! 엘프윈!”
제크론은 그녀의 이름을 몇 번이고 외쳤다.
눈을 몇 번 깜빡인 엘프윈의 시선이 마침내 제크론에게 닿았다.
“제…크론?”
“그래, 나야! 엘프윈, 당신 남편 제크론이야!”
“…당신이 여긴 어떻게…?”
“당신 곁을 지키려고 달려왔지. 늦어서 미안해.”
“그런데… 왜 울어요, 당신?”
“울어? 내가?”
그제야 제크론은 눈물 줄기가 제 볼을 타고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눈가를 벅벅 문지르며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엘프윈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갖다 댔다.
엘프윈이 견디고 있는 뜨거운 열이 그대로 전해졌다.
“기뻐서 우는 거야. 늦었지만 결국 이렇게 당신 곁에 왔으니까.”
“그래도… 울지 마요…..”
엘프윈이 가느다란 숨을 내쉬며 말했다.
떨리는 손가락이 제크론의 볼에 닿았다.
그의 눈물을 닦아주려는 것 같았지만, 손가락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 큰 성과는 없었다.
“나 때문에 울지 말아요…. 나 같은… 으으윽! 윽!”
엘프윈이 오만상을 찡그리며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엘프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