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142)
  • 78화

    “으으…. 으윽!”

    진통은 끝이 없었다. 

    나는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가 됐다. 

    이젠 눈을 뜰 힘도, 소리를 지를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겨우 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문이 벌컥 열렸고, 새하얀 신녀복을 입은 신녀들이 들어왔다. 

    그들을 먼저 맞이한 것은 매튜였다. 

    “와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당연히 와야죠.”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신녀들이 침대 가까이로 와 내 상태를 살폈다. 

    낯익은 얼굴에 걱정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공작 부인, 좀 어떠세요? 저희를 알아보시겠어요?”

    “으… 안녕하세요, 아미트 신녀님 그리고… 베로니카 신녀님. 와 주셔서 감사…. 아흐…윽!”

    계속되는 진통으로 인사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베로니카가 내 손을 붙잡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쉬이….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이제 곧 신성수 치료를 할게요. 통증이 줄어들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네에, 으음….”

    그녀의 손이 무척 따뜻했다. 

    신녀들의 요청에 의해 욕실에 있던 욕조가 침실로 옮겨졌다. 

    그리고 손수레에서 커다란 물통을 내려 신성수를 욕조 안에 부었다. 

    케이트와 주디의 부축을 받아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욕조 안에 몸을 담갔다. 

    따뜻한 신성수가 내 몸을 포근하게 감쌌다. 

    아미트 신녀가 방 안에 있는 모두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지금 바로 신성수 치료를 시작합니다. 잠시만 침실을 비워 주시겠습니까?”

    신녀의 요청에 매튜를 비롯한 하녀와 하인이 모두 종종걸음으로 침실을 빠져 나갔다. 

    이제 방 안에는 나와 두 명의 신녀만 남았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욕조를 붙잡았다. 

    아미트 신녀가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욕조를 채운 신성수가 허리께에서 찰랑거렸다. 

    마주앉은 아미트 신녀가 내 손을 붙잡았다. 

    베로니카 신녀는 뒤로 와서 내 등에 손을 얹었다. 

    “공작 부인, 두 눈을 감으시고, 편안한 마음 상태를 유지하세요.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시면 고통이 곧 줄어들 겁니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아미트 신녀의 지시에 따라 나는 두 눈을 감고 행복했던 때를 떠올렸다.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제크론의 얼굴이었다. 

    다른 때도 아니고, 그와 처음으로 디저트 가게에 가서 케이크를 먹었던 때의 기억이었다. 

    단 것이 싫다는 그에게 케이크를 찍어서 내밀었을 때 당황하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붉어지던 그의 귓불이 눈에 선했다. 

    곧 신녀들의 기도가 시작됐다. 

    따스한 온기가 몸 안으로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몸 전체가 편안해졌고, 배도 마찬가지였다. 

    통증이 눈 녹듯 사라졌다. 

    ‘아… 따뜻해! 이제… 살 것 같아!’

    몇 시간 동안 고통에 일그러졌던 얼굴 근육이 서서히 풀어졌다. 

    얼굴뿐만 아니라 몸 전체 근육이 천천히 이완됐다. 

    숨을 쉬는 것도 더 이상 힘들지 않았다. 

    지난 두 번의 치료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나는 스르르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   *   *

    신성수 치료가 끝난 후, 아미트와 베로니카는 대신전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라탔다. 

    베로니카의 표정이 어두웠다. 

    치료 후, 편안한 표정으로 잠든 엘프윈을 확인하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걱정이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베로니카. 신성수 치료는 잘 이뤄졌어요. 산모가 진통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랍니다. 일정한 진통이 있은 후에야 생명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답니다.”

    “…네.”

    “윌트슨 공작 부인의 경우, 예정일보다 이른 시기에 찾아온 진통이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을 테니, 얼굴 좀 풀어요.”

    “네, 신녀님.”

    베로니카는 아미트를 바라보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걱정되는 마음이 커서 미소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아직 어리고, 경험이 많지 않아서 힘들겠지만 노력해야 해요. 환자 치료에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키는 건 좋지 않아요. 배워서 잘 알잖아요?”

    “…….”

    “이제까지 잘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유독 윌트슨 공작 부인 치료에는 신경을 더 많이 쓰고 있는 것 같네요, 베로니카.”

    “죄송해요, 신녀님. 조심하겠습니다. 그런데….”

    베로니카는 잠시 뜸을 들였다. 

    이런 말을 아미트에게 해도 될지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런데, 뭐요? 뭐든 말해 보세요, 베로니카. 여기서 나눈 얘기는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할 테니까요.”

    “그게… 윌트슨 공작 부인이 자꾸 신경이 쓰여요. 치료 전에는 전혀 친분도 없고 만나 본 적도 없는데 이상해요.”

    “…….”

    “특별히 공작 부인을 지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대체 왜 이런지는 모르겠어요.”

    “흐음….”

    아미트는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음을 흘리며 마주앉은 베로니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그 현상 때문인가요?”

    여기서 말하는 ‘그 현상’이란 신성을 담은 빛 구슬들이 엘프윈의 몸에서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머무는 현상을 뜻했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이유는 없어요. 단지 마음이, 머리가… 제 몸 전체가 그녀에게 반응해요.”

    “어쩌면….”

    “네?”

    불현듯 어떤 생각이 아미트의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내도 되는지 주저하게 되는 생각이었다. 

    잠시 입을 다물고 고민하던 아미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모처럼 베로니카가 속마음을 털어놓고 있으니, 저도 이 대화에 진심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윌트슨 공작과 관련된 감정이 아닐까요?”

    “네?”

    “베로니카가 신녀로 간택되기 전에 윌트슨 공작과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어요.”

    “아….”

    순간 베로니카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당황한 모양이었다. 

    아미트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저런,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원래 담당하는 수습 신녀에 대해서 잘 알아 두는 것도 우리의 역할이잖아요.”

    “네.”

    베로니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베로니카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기는 했다. 

    자기와 같은 어린 수습 신녀의 사수 역할을 맡고 있는 고참 신녀는 수습 신녀의 내면을 이해하고 어루만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수습 신녀의 과거에 대해서 꿰뚫고 있는 것도 그 노력 중 하나이리라. 

    고개를 푹 숙인 베로니카가 말했다. 

    “갑자기 들어서 당황하긴 했지만 다 이해해요. 원래 신녀님의 역할이 그렇다는 걸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

    “그래서 말인데, 혹시 윌트슨 공작에 대한 옛 감정 때문에 윌트슨 공작 부인에 대해서도 좀 더 애틋하게 느끼게 되는 게 아닐까요?”

    “잘 모르겠지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긴 해요.”

    베로니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겨우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이 없는 목소리였다. 

    목소리는 그랬지만 사실 베로니카는 자신이 없지 않았다. 

    지난 몇 년 동안 매일 몸의 감각을 예민하게 다듬으며 몸 안의 신성을 다루는 생활을 이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윌트슨 공작 부인을 처음 만났을 때 제 몸 속에서 진동하던 신성을 잘못 느꼈을 리 없었다. 

    자꾸만 그녀에게로 기우는 마음이 단순히 제크론과의 인연 때문만은 아니라고 베로니카는 확신했다. 

    인간의 생은 확신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특히 성품이 유약한 베로니카는 인생의 많은 것에 확신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내가 맞아. 틀리지 않았어.’

    *   *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침대 위였다. 

    한숨 길게 잤다가 일어난 것처럼 몸이 개운했다. 

    어느덧 창밖에는 푸르스름한 새벽이 와 있었다. 

    몸을 일으키자 매튜가 다가왔다. 

    “마님, 깨셨습니까? 몸은 좀 어떠십니까?”

    “많이 괜찮아졌어요. 통증은 없어요.”

    “역시 신성수 치료의 효과는 대단하군요. 다행입니다. 정말로!”

    매튜는 눈가를 찍어 누르며 눈물을 훔쳤다. 

    기운이 어느 정도 돌아온 덕분에 나는 빙그레 웃어 보일 수 있었다.

    내 미소를 본 매튜의 얼굴에도 희미하지만 미소가 생겼다. 

    좀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간단히 뭐 좀 드시겠습니까? 다시 본격적인 진통이 시작되면 힘을 제대로 줘야 하는데 그러려면 지금 배를 좀 채워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 야채수프면 좋을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매튜가 나갔고, 침실에는 나 혼자 남았다. 

    천천히 배를 쓰다듬었다. 

    “아리야, 신녀님들 덕분에 우리 아리도 편안해졌나 보구나. 그래, 편안하게 엄마 배 속에 조금만 더 있다가 곧 보자!”

    조용히 속삭이고 있을 때였다. 

    으윽…. 배에서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또다시 진통이 시작되고 있었다.

    입에서 거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으으…. 아아앗!”

    그다음부터는 기억이 듬성듬성 이어졌다. 

    배를 움켜쥐고 소리를 지르고 있을 때,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고통에 찬 신음을 내질러야 했다. 

    옆에서 ‘힘을 주세요, 마님!’, ‘좀 더요!’와 같은 외침이 끊임없이 반복됐다.

    죽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다했다. 

    혼절했다가 깨나고, 다시 혼절했다가 깨나기를 반복했다. 

    얼굴이 타오를 듯 붉어졌고, 온 몸이 땀으로 젖었다. 

    “으으…. 으으윽!”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