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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77/142)
  • 77화

    늦은 밤이었지만 윌트슨 공작성은 낮처럼 환했다. 

    긴급 사태였다. 

    고용인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

    “그러게나 말이야! 아직 예정일이 한 달도 넘게 남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아휴…. 우리 마님과 아기씨께서 괜찮으셔야 할 텐데! 아휴.”

    고용인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움직이는 발걸음과 손끝은 야무졌지만 얼굴에는 다들 수심이 한가득했다. 

    매튜가 집사장에게 편지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매튜의 말소리가 무척 빨랐다. 

    “지금 바로 대신전에 가서 이 편지를 전하세요.”

    “알겠습니다.”

    “원래는 다음 주로 예정되어 있는 신성수 치료를 앞당겨 와 달라는 내용입니다. 마님의 상태가 안 좋으시니까요.”

    “그렇군요.”

    편지 봉투를 두 손으로 받아 든 집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장의 얼굴을 가득 메운 주름이 더욱 진해졌다. 

    매튜가 빠르게 덧붙였다. 

    “편지를 전달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치유 신녀님들을 태우고 돌아오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늦은 시간에 편지를 전달하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신전 문은 열어 주더라도 신녀님을 만나 뵙는 건 힘들지 않겠습니까?”

    매튜도 비슷한 걱정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는 표시를 보였다. 

    “네, 맞습니다. 어쩌면 지금 당장 신녀님들을 만나 뵙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일단 요청은 해 봐야죠.”

    “…….”

    “그리고 대신전에서도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밤늦게 찾아온 요청을 쉽게 거절하지는 못할 겁니다. 위벨 메시나 증서로 얻은 권리니까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집사장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멀어져가는 마차를 보며 매튜는 난생처음 기도란 것을 했다.

    제발 대신전이 공작 부인의 위급한 사정을 가엾게 여겨 한달음에 달려와 주기를 빌고 또 빌었다. 

    *   *   *

    기운이 없어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마님, 정신이 드세요?”

    곁에 있던 케이트가 벌떡 일어서서 나를 살폈고, 주디는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 나갔다. 

    매튜를 불러오려는 것 같았다. 

    케이트가 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 묻어났다. 

    “정신을 잃으셨어요. 지금은 좀 어떠세요? 괜찮으세요?”

    나는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헉!’ 

    순간 끔찍한 걱정이 뇌리를 스쳤다. 

    있는 힘을 다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으윽, 힘을 잃은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리에 앉아 배를 내려다 봤다. 

    봉긋 솟은 배는 그대로였다. 

    ‘다행이다!’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배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흐느꼈다. 

    “…아리야, 엄마 몸이 약해서 미안해….”

    옆에서 케이트가 울음을 참으며 아휴, 한숨을 겨우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매튜가 안으로 들어왔다. 

    “마님, 깨셨습니까?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힘이 하나도 없어요. 아이는 괜찮은가요?”

    긴장되는 마음에 목소리가 떨렸다. 

    내 물음에 매튜는 잠시 뜸을 들였다. 

    “…괜찮지 않습니다. 하혈이 있었습니다.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아….”

    입이 힘없이 벌어졌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 것일까. 

    나는 살아남지 못하는 것일까. 

    눈가에 고였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있고, 옆방에는 산파도 대기 중입니다. 그리고 지금 막 대신전으로 사람도 보냈습니다.”

    매튜가 날 안심시키기 위해 이런저런 얘기를 했지만 두근두근 심란하게 뛰고 있는 내 심장은 안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매튜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난 몇 달 동안 마님께서는 건강해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습니다. 그 노력의 결과가 헛되지 않았다고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제 말을 믿으세요, 마님. 저 유능하다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 머지않아 건강한 아이를 건강한 모습으로 안게 되실 것입니다.”

    매튜가 내 손을 잡았다.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그러니 긍정적인 생각을 놓지 않으셔야 합니다, 마님. 저희가 함께할 테니 걱정 마세요.”

    “고마워요, 매튜.”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통이 시작됐다. 

    “으으…. 으으윽!”

    신음을 참으려 이를 앙다물었지만 헛수고였다. 

    배를 가르는 것 같은 끔찍한 고통이 이어졌다. 

    “신음을 참지 마시고 시원하게 내뱉으십시오. 호흡을 크게 하셔야 합니다. 힘을 놓지 마세요, 마님!”

    매튜가 큰 소리로 말했다. 

    케이트와 주디가 양옆으로 와서 내 두 손을 힘껏 잡았다. 

    “으으…. 윽!”

    그 뒤로 난생처음 겪어 보는 참혹한 고통이 오랜 시간 동안 이어졌다. 

    희망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난 할 수 있어. 결국 이겨 낼 거야. 살아남을 거야!’

    같은 생각을 몇 번이고 되뇌며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눈앞 풍경이 죄다 노랗게 변했지만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았다. 

    *   *   *

    한편, 대신전에 도착한 집사장은 불안하고 긴장되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편지를 전달한 지 이미 30분이 지났지만 대신전에서는 이렇다 할 답변을 주고 있지 않았다. 

    ‘제발, 함께 가 주셔야 할 텐데.’

    집사장은 땀이 흐르는 손바닥을 바지에 슥슥 문지르며 대기실 안을 서성거렸다. 

    상급 신관과 신녀들 사이에서는 설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대신관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원칙을 따르자면 늦은 시간에 대신관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위벨 메시나 증서와 관련된 환자였기 때문에 보통의 원칙을 그대로 따르는 데 의문을 품는 신관과 신녀들이 있었다. 

    결국 짧은 의논과 다수결 끝에 대신관에게 보고하기로 뜻을 모았다. 

    잠시 뒤, 대신관의 명에 따라 회의실에 다들 모였다. 

    상급 신관과 신녀들이 모였고, 엘프윈의 치료를 담당했던 아미트와 베로니카도 함께였다. 

    상황 설명을 다 전해들은 대신관은 잠시 고심하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새벽에 날이 밝으면 떠나는 것으로 하죠. 아미트 신녀와 베로니카 신녀가 수고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대신관님.”

    “저, 하지만….”

    대신관의 명령에 아미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베로니카는 주저하면서도 입을 열었다. 

    순간 회의실에 모인 모두의 시선이 베로니카에게로 향했다. 

    평소 워낙 조용한 성정의 베로니카였다. 

    사람이 다섯 명 이상 넘어가는 자리에서 목소리를 크게 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대신관님을 비롯해서 상급 신관과 신녀 십수 명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목소리를 내다니. 

    베로니카에게로 향하는 시선에서 놀라움이 묻어났다. 

    “베로니카 신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습니까?”

    대신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제게로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들에 베로니카는 숨이 턱 막혔고 다리에 힘이 풀려 덜덜 떨렸다. 

    그래도 해야 할 말은 해야 했다. 

    베로니카는 얼마 남지 않은 용기를 싹싹 끌어다가 입을 열었다. 

    “네, 대신관님. 무척 위급한 상황이니 만큼 새벽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신관은 말없이 가만히 서서 베로니카를 바라봤다.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지만 대신관의 눈을 바로 마주 보는 눈빛은 야무지고 단단했다. 

    “윌트슨 공작이 부인을 살리기 위해서 위벨 메시나 증서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제국민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베로니카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사라졌다. 

    또박또박 단정한 말소리가 회의실 전체에 울렸다. 

    “그런데 만에 하나 공작 부인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리고 대신전은 공작 부인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몇 시간 후에야 치료를 위해 출발했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사람들의 원성이 대신전으로 향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흐음….”

    대신관의 입에서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음이 흘러 나왔다. 

    뒤에 섰던 신관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신성수 치료에도 규칙이란 것이 있습니다. 윌트슨 공작 부인의 치료를 위해 한밤중에 움직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다른 환자의 치료도 한밤중에 해 달라는 요청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형평성의 문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흐음….”

    고심하는 대신관의 미간에 짙은 주름이 생겼다. 

    그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베로니카 신녀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위벨 메시나 증서를 사용한 환자이기에 적극적으로 도울 필요가 있겠지요. 형평성의 문제는 제기될 수 없을 겁니다.”

    주위가 잠시 소란스러워졌다. 

    누군가는 흡, 헛숨을 삼켰고, 누군가는 ‘그렇다는 말씀은….’ 하고 대신관의 다음 말을 예상했다. 

    대신관은 소란이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늦었지만 지금 출발하기로 하죠. 아미트 신녀와 베로니카 신녀는 서둘러 주세요. 수고가 많겠습니다.”

    “명 받들겠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대신관님.”

    “감사합니다, 대신관님.”

    할 말을 마친 대신관은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아미트와 베로니카를 지나쳐 회의실을 나섰다. 

    상급 신관과 신녀들도 대신관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베로니카를 지나칠 때 그녀 쪽을 한번 힐끗 쳐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도 잘 알았다. 

    평소와는 달리 목소리를 냈던 저를 이상하게 여기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윌트슨 공작 부인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안 돼. 그녀를 반드시 지켜 주고 싶어.’

    지키고 싶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이 정도의 시선쯤은 견딜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베로니카가 입술을 짓씹으며 걸음을 옮길 때였다. 

    아미트가 베로니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잘했어요, 베로니카.”

    “감사합니다.”

    “자, 서두릅시다. 윌트슨 공작 부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참, 먼저 1층 대기실에 가서 윌트슨 공작성의 집사장에게 소식을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치료에 쓰일 신성수는 제가 챙겨서 내려갈게요. 30분 후에 중앙 현관에서 만나요.”

    회의실을 나서는 두 신녀의 발걸음이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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