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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75/142)

75화

걱정 섞인 조언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음을 알고 조쉬는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상관의 명령에 불복할 수는 없었다. 

특히 전시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수많은 전투를 제크론과 함께했던 조쉬는 알았다. 

슬슬 몸이 풀리고 있다는 제크론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그의 몸이 한계에 다다를수록 전투력은 상승했다. 

이미 여러 해 곁에서 두 눈으로 확인한 현상이지만 기이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며칠째 이어지는 전투로 잠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피곤에 푹 절수록 그의 오감이 더욱 예민하게 다듬어지고 다듬어져 마침내 육감을 발현시키는 것 같달까. 

‘마치 괴물처럼 변하시지.’

살육의 광기에 번득이는 눈동자가 갑자기 떠올라 등골이 오싹했다. 

제크론이 전쟁 영웅이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   *   *

“하아, 하아…!”

마지막 마물의 심장을 도려낸 제크론은 거친 숨을 내쉬며 그대로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그의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제크론은 벌써 3일째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연속으로 전투에 나선 상태였다. 

엘프윈과의 통신도 못 하고 있었다. 

체력이 현저히 떨어진 상태의 그는 오로지 동물적 감각에만 의지한 채 싸움을 이어 갔다. 

칼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찌르고, 베고, 자르다 보니 어느새 남은 마물이 보이지 않게 됐다. 

하늘이 점차 푸르스름 밝아지기 시작하며 아침 맞을 준비를 했다. 

제크론은 그대로 땅바닥에 누워 잠이나 자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건 안 되지.’

그는 이를 악물고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총사령관은 무슨 일이 있어도 두 발을 땅이 딛고 있어야 했다. 

지친 모습, 약한 모습은 절대로 보여선 안 됐다. 

조쉬가 아닌 다른 부사령관이 제크론 곁으로 다가왔다. 

제크론이 조쉬에게 야간 전투에 참여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부사령관이 제크론의 몸 전체를 눈으로 살피며 물었다. 

“각하,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래. 현 상황은?”

“상황 보고 올립니다. 마물 열세 마리 모두 쓰러졌습니다. 사체 처리는 지금 진행 중입니다. 우리 병사의 부상은 총 스무 명인데, 그중 두 명의 부상이 심해서 바로 막사로 이동시켰습니다.”

“다른 마물의 출몰은?”

“아직 감지된 바가 없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차드엘 산맥 전체로 영역을 넓혀 봐도 결과는 같았다고 합니다.”

“당분간은 잠잠하겠군. 좋아. 오늘 하루는 휴식을 취하면서 상황을 살피도록 하지. 면밀한 마력 감지를 지시해라.”

“알겠습니다, 각하.”

부사령관의 부축을 받고 말에 오른 제크론은 천천히 말을 달려 막사로 향했다. 

막사에 도착한 제크론을 제일 처음 맞은 것은 조쉬였다. 

“오셨습니까, 각하.”

“그래.”

정확히 한마디 대답을 건넨 제크론은 그대로 딱딱한 침대 위에 쓰러져 곯아 떨어졌다.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조쉬는 별로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한마디는 구시렁거렸다. 

“갑옷만이라도 벗고 누우시지.”

끄응,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쩔 수 없이 축 늘어진 제크론의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갑옷과 긴 가죽 장화를 벗기고, 더러워진 옷을 벗기는 것은 모두 조쉬의 몫이 됐다. 

정확히 열두 시간 후 잠에서 깬 제크론은 바로 작전 회의를 시작했다. 

“지난 열두 시간 동안, 차드엘 산맥 전체에서 그 어떤 마물의 움직임도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산맥 북쪽에 주둔해 있는 에스칼 부대에서도 같은 내용의 서신을 보내 왔습니다.”

“마물의 출몰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군.” 

제크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이번 토벌 작전을 슬슬 마무리할 때가 온 것 같다. 뎀프샤의 병사 3천 명 중 일단 1천 명은 내일 귀환하고, 다른 1천 명은 2주 뒤에, 마지막 1천 명은 4주 뒤에 귀환하기로 한다. 멀론 경을 비롯한 부사령관들이 구체적인 귀환 계획을 세워서 준비하도록 해라.”

“명 받들겠습니다, 각하.”

마지막 명령을 내뱉고 중앙 막사를 나서는 제크론의 등 뒤에 대고 회의에 참석한 모두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곧 귀환 소식이 군대 전체에 퍼졌고, 여기저기서 들뜬 목소리가 울렸다.

귀환을 준비하는 군사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다 밝았는데, 그중에서도 제크론의 표정이 가장 밝았다. 

‘드디어 엘프윈에게 돌아간다!’

처음 예상보다 많이 늦어진 귀환이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귀환을 코앞에 앞두고 있는 심정은 날아갈 듯 기뻤다. 

며칠 후면 엘프윈을 다시 만날 생각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곁에 섰던 조쉬가 대뜸 한마디 했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5년 동안 이어졌던 전쟁이 끝났을 때조차 조금도 웃지 않으셨던 분이 많이 변하셨습니다, 각하.”

“자네도 결혼을 하고, 아내와 함께 살다 보면 알게 될 거야.”

제크론이 조쉬의 어깨를 툭툭 가볍게 치면서 위로하듯 말했다. 

제크론보다 나이는 훨씬 많은 조쉬였지만 아직 미혼이었다. 

오늘만큼 기혼인 제크론과 미혼인 저의 차이가 극명하게 대비된 적이 없었던 것을 떠올리며 조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만 뭐… 마님은 나도 빨리 뵙고 싶군. 그 화가 양반은 초상화를 제대로 완성했으려나?’

제크론 앞에서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말을 가슴 속에 꾹꾹 눌러 담으며 조쉬는 빙그레 웃었다. 

*   *   *

브렌트 투치의 다음 작품의 모델은 실내악단이었다. 

요소킨 운동실의 풍경과 실내악단의 연주 풍경 중에 고민하더니 결국 실내악단으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한창 연주 중인 실내악단의 모습을 새하얀 화폭에 빠르게 담아내는 브렌트의 손길이 흥겨워 보였다. 

“작업 잘 되고 있나요?”

“물론입니다. 오늘은 가볍게 손을 푸는 정도로 작업할 생각이지만요. 몸도 마음도 상태 최고입니다!”

“다행이네요.”

더 이상 그의 작업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로비를 지나 정원으로 향했다. 

오늘은 요소킨 수업이 있는 날인데, 디아브 백작 부인이 출산 전 참여하는 마지막 수업이었다. 

그래서 그녀를 위해서 꽃바구니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꽃꽂이를 해 본 적은 없었지만 직접 만들고 싶다는 욕심에 어제 두 시간 정도 정원사에게 강습을 받기도 했다. 

“초보자들은 처음부터 지나치게 멋을 부릴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일단 두려움을 잠시 내려놓고 바구니의 빈 공간을 과감하게 채워 가는 것이 중요한 첫걸음입니다.” 

어제 수업 시간, 수북하게 쌓인 꽃 앞에서 쩔쩔매는 나를 향해 정원사는 허허허, 너털웃음을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마님께서는 색깔의 조합을 제대로 찾으실 수 있는 감각이 있습니다. 그러니 본인의 감각을 좀 더 신뢰하세요.” 

마침내 완성된 어설픈 꽃바구니를 본 정원사는 칭찬의 말도 잊지 않았다. 

감사하게도 말이다. 

주디가 건네주는 장갑을 단단하게 끼며 나는 의지를 다졌다. 

‘멋 낼 생각 말고! 과감하게! 내 감각을 믿고!’

주디는 바구니를, 케이트는 양산을 담당했는데, 그녀들도 오늘의 꽃바구니가 무척 기대되는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마님, 혹시 생각하신 기본 주제 같은 게 있을까요?”

“주제? 당연히 있지!”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을 먼저 물어봐 주니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사랑스러운 하녀들을 보며 나는 생글생글 웃었다. 

“뭔데요?”

“디아브 백작 부인은 외모도, 성격도 태양을 닮은 것 같아서, 오늘 꽃바구니의 주제는 ‘태양’이야.”

“디아브 백작 부인과 무척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마님!”

“그렇지? 노란색 꽃이 주를 이루고, 하얀색 꽃과 붉은색 꽃, 그리고 분홍색 꽃도 조금씩 섞을 생각이야.”

기분 좋게 외친 나는 서두르기 시작했다. 

요소킨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꽃바구니를 보기 좋게 완성하려면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어제 정원사에게 배운 대로 가위를 꽃줄기에 비스듬히 대고 싹둑싹둑 잘라 나갔다. 

꽃바구니를 받고 기뻐할 디아브 백작 부인을 떠올리니 입술 끝이 점점 위로 올라갔다.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따라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모든 것이 완벽한 순간이었다. 

그대로 완벽하게 흘러갈 줄 알았다. 

일정에 맞춰 요소킨 수업을 진행하고, 잠시 동안 못 만나게 될 디아브 백작 부인과 작별 인사를 하고, 밤에는 통신석으로 제크론을 만나고….

하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날, 나는 디아브 백작 부인과 작별 인사를 할 수 없었고, 통신석으로 제크론과 만나지도 못했다. 

*   *   *

운동 후, 간단한 다과 시간을 가졌다. 

짧은 이별이었지만 그래도 이별은 이별이었기에 아쉬운 마음을 달랠 시간이 필요했다. 

“어머나, 예뻐라!”

꽃바구니를 받아 든 디아브 백작 부인은 입을 크게 벌리며 환하게 웃었다. 

“직접 만드셨다니! 공작 부인께서 이런 취미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네요! 훌륭해요!”

“맞아요! 제목과도 딱 맞아 떨어지는 예쁜 꽃바구니예요!”

“저도 이다음에 아기 낳을 땐 선물해 주실 거죠, 공작 부인?”

“아휴, 예쁘기도 해라!”

어제 배우자마자 오늘 직접 만들었고, 꽃바구니의 제목이 ‘태양’이라는 부연 설명에 모였던 귀부인들이 두 손을 모으며 감탄했다. 

조잘거리는 모습이 귀여운 아기 새 같아 푸흡, 웃음이 났다. 

친절한 과장이 첨가된 칭찬임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칭찬은 언제나 옳았으므로 나는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메릴 선생님께서 다음 수업 준비도 하셔야 하니, 우리는 이제 그만 일어설까요?”

“네, 그래요.”

디아브 백작 부인이 곁에 섰던 데이비스 자작 부인의 부축을 받으며 끙차,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였다. 

“아윽!”

디아브 백작 부인이 갑자기 배를 움켜잡으며 신음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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