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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74/142)

74화

모슈워 근처의 호텔 방. 

로저먼드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똑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보좌관이 들어왔다. 

“로저먼드 님, 메드록에서 또 연락이 왔습니다. 언제 돌아오시는지 일정은 묻는 내용이었습니다.”

보좌관의 목소리는 충분히 컸지만 로저먼드의 귀에는 닿지 못한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침대 가까이까지 다가온 보좌관이 목소리를 높여 다시 그를 불렀다. 

“로저먼드 님!”

“…응?”

그제야 로저먼드의 시선이 보좌관에게로 향했다. 

초점을 잃은 시선이었지만 그래도 보좌관은 감지덕지했다. 

보좌관은 로저먼드가 또 시선을 돌려 버리기 전에 재빨리 용건을 툭 뱉어 냈다. 

“메드록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언제 돌아오시는지 묻는 내용이었습니다!”

쩌렁쩌렁 울려 대는 목소리가 거슬렸는지 로저먼드가 인상을 팍 썼다. 

로저먼드의 입이 힘없이 벌어졌다. 

“아마도… 내일쯤? 아니면 모레?”

그 어떤 의지도 담고 있지 않은 대답이었다. 

내일이란 말인가, 아니면 모레란 말인가?

아니, 돌아갈 생각은 있는 것인가?

보좌관은 진땀을 흘렸다. 

로저먼드는 벌써 며칠 째 호텔 방 안에 틀어박힌 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보좌관은 그런 상관의 태도에 처음엔 불평했지만 이젠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현재 상태에서 보좌관이 할 수 있는 일은 로저먼드를 겨우 식사 테이블에 앉혀서 조금이라도 뭔가를 먹게 하는 것뿐이었다. 

로저먼드의 상태가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며칠 전 윌트슨 공작 부인을 만난 이후부터였다. 

그날 이후 이렇게 정신 줄을 놓은 채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보좌관은 일단 윌트슨 공작 부인 쪽을 공략해 보기로 했다. 

“메드록으로 돌아가는 길에 윌트슨 공작성에 들르는 게 어떻겠습니까?”

“윌트슨 공작성?”

이번에는 바로 반응이 왔다. 

역시 효과가 있었다. 

보좌관은 로저먼드의 눈치를 스윽 살피며 계속 말을 이었다. 

“네, 좁은 호텔 방에서 지내시는 것보다는 공작성에서 며칠 신세를 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그리고 윌트슨 공작 부인과 못다 한 이야기를 하실 수도 있을 테고 말입니다.”

“…엘프윈?”

내내 무표정이었던 로저먼드의 얼굴이 순간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곧 다시 아무것도 담지 않은 공허한 표정의 로저먼드가 힘없이 손을 팔랑거리며 아무렇게나 말했다. 

“알았으니, 그만 나가 봐.”

실패였다. 

보좌관의 꽉 다문 어금니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꾸벅 인사를 한 보좌관은 곧 방을 나섰다. 

정신을 사납게 하는 존재가 사라지자 로저먼드는 후우,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다시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엘프윈….”

오랜 친구의 이름을 불러 봤다. 

한때는 우정의 얼굴을 했고, 또 다른 한때는 사랑의 얼굴을 했으나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 친구의 이름을 말이다. 

“너… 대체 누구야?”

혼잣말을 읊조리는 로저먼드의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아르젠토 차를 찬양하던 그녀였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불안감이나 민감함과 싸워야 했던 그녀에게 당장의 안정감과 황홀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었다.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 리 없잖아. 이미 지나간 과거보다, 아직 오직 오지 않은 미래보다 지금이 중요해.” 

엘프윈이 늘 하던 말이었다.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그녀의 녹안이 찬란하게 반짝거렸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인생이야. 건강 챙기느라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도 못하면서 살다가 한순간의 마차 사고로 죽을 수 있는 게 인간이라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인생이 얼마나 억울하겠어? 그러니까 그냥 마시자.” 

그녀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단지 기억을 잃은 것뿐인데,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와 윌트슨 공작과의 혼인이 결정됐을 때 보다 더한 배신감을 느꼈다. 

결혼은 다른 사람과 하더라도 정신적으로 연결된 건 본인이라고 생각했던 로저먼드였다. 

그런데 기억을 잃은 정신은 전혀 모르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엘프윈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 같았다. 

억울했다. 

분통이 터졌다. 

그리고… 슬펐다. 

‘이젠 나 혼자인 건가?’

견딜 수 없었다. 

침대에서 스르르 몸을 일으킨 로저먼드는 테이블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상자를 집어 들었다. 

아르젠토 차를 마실 생각이었다. 

상자의 뚜껑을 열자 찻잎 냄새가 확 풍겼다. 

그리고 며칠 전 맞닥뜨린 엘프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넌 하나밖에 없는 내 오랜 친구니까, 너도 건강한 모습으로 내 곁에 남아 주면 좋겠어.” 

로저먼드는 들고 있던 상자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뚜껑이 열리면서 안에 들어 있던 찻잎이 바닥에 어지러이 흩어졌다. 

“제길!”

그는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다시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숨을 쉬고 있는 한 엘프윈에 대한 생각이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를 것을 생각하니, 숨을 그만 쉬면 어떨까, 하는 위험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는 눈을 딱 감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잠이 상냥하게 원하는 대로 와 줄 리 만무했다. 

로저먼드의 입을 뚫고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가 점점 진해졌다. 

*   *   *

대신전에서의 하루 일과는 새벽 기도회부터 시작한다.

하루 중 가장 맑은 시간, 새벽 6시에 중앙 신전에 모인 신관과 신녀들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각자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아 신께 기도를 드린다. 

진심을 다해 기도하는 신관과 신녀들의 몸에서 신성의 빛 구슬들이 몽글몽글 흘러 나와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는 모습은 신비스러웠고, 아름다웠다. 

베로니카도 눈을 감고 진심을 담아 기도를 드렸다. 

이 나라를 위해,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위해서도 기도했다. 

신에게 바쳐지는 모든 애정과 시간 그리고 기운에 한 점의 티끌도 없기를 빌고 또 빌었다. 

마지막으로 윌트슨 공작 부인에 대해서도 빌었다. 

‘그녀를 좀 더 알고 싶어요. 그녀를 지키고 싶어요. 제가 그녀를 위해 할 일을 알려 주세요. 그녀에게로 향하는 내 손길이 너무 늦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기도 중 감정이 격해졌던 것일까. 

베로니카의 볼에는 눈물 줄기가 소리 없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기도회는 대신관이 큰 소리로 마무리 기도를 하는 것으로 끝난다. 

단상으로 올라간 대신관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큰 목소리로 기도를 읊었다. 

“전능하신 위메나시여! 우리를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제국의 젊은 병사들이 마물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들의 헌신과 노고를 눈여겨봐 주시고 승리의 길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베로니카를 비롯한 모든 신관과 신녀들이 대신관의 기도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했다. 

대신관과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함께 기도하며 신성의 힘을 모으는 것이 신관과 신녀들의 의무였다. 

대신관의 기도는 계속 이어졌다. 

“이 세상의 모든 선과 악을 주관하시는 위대하신 위메나시여! 선과 악이 오로지 당신을 통해서만 흐르게 하시옵소서. 스스로 선을 행하려는 자의 위선을 벌하여 주시고, 스스로 악을 행하려는 자의 오만 또한 벌하여 주시옵소서.”

베로니카의 미간이 좁아지며 작은 주름이 생겼다. 

베로니카가 성서 공부에서 가장 이해가 힘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스스로 선을 행하는 것이 뭐가 나쁘다고 위선이라고 하는 것일까?’

계속 이런 의문이 베로니카의 머릿속을 따라다녔다. 

그럴 때마다 제 믿음이 부족한 것이라며 스스로를 탓하며 더욱 열심히 성서를 읽고, 더욱 마음을 다해 기도를 올렸다. 

대신관의 엄숙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중앙 신전을 가득 메웠지만 베로니카의 한번 흐트러진 집중력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   *   *

“캬아아악!”

마지막으로 끔찍한 비명을 남긴 마물은 땅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다. 

제크론은 마물의 몸에서 분리된 심장에 다시 검을 꽂아 넣으며 얼굴에 튄 초록색의 피를 닦아 냈다. 

거친 숨을 토해 내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조쉬가 헐레벌떡 가까이 달려왔다. 

보좌관인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피범벅인 제크론의 몸을 살피는 것이다. 

“각하,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난 괜찮아. 보고해.”

“총 열다섯 마리 모두 쓰러졌습니다. 부상을 입은 병사가 모두 스물세 명으로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합니다.”

“다행이군. 다음 출몰 예상지는 나왔나?”

“예에? 바로 또 출전하시려고요? 다음 전투는 그냥 군단장들에게 맡기심이 어떨는지요? 좀 쉬셔야죠.”

“군단장들이 한두 놈 쓰러트릴 때, 내가 네다섯씩 쓰러트리는 게 이 토벌을 빨리 끝내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안 드나?”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아직 부상도 완전히 다 낫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거의 나았어. 이제 슬슬 몸이 풀려서 오히려 처음보다 지금 몸이 더 가벼운 느낌이다. 그러니 걱정 말고, 눈물 닦아.”

“눈물이라니요! 저 울지 않습니다!”

조쉬가 억울했는지 목소리가 버럭 커졌다. 

괜히 눈가를 슥슥 문질러 보는 조쉬를 보며 빙긋 짧게 웃은 제크론은 검을 거두어 검집에 넣었다. 

“어서 가서 다음 출몰 예상지나 알아보고 와.”

“알겠습니다, 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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