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엘프윈의 삶이 건강한 삶과 거리가 멀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오랜 소꿉친구로부터 사실을 확인받으니 속이 썼다.
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고 말했다.
“예전엔 자꾸 불안하고, 모든 일에 예민해지는 내 자신이 싫었어. 그래서 아르젠토 차에 기대서 도피했어.”
“…….”
“하지만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나, 살고 싶어! 그냥 말고, 건강하게 살고 싶어. 혼자가 아니라, 이 아이와 내 남편과 함께 살고 싶다고! 행복하게!”
나는 봉긋 솟은 배에 손을 얹으며 외치다시피 말했다.
격앙된 목소리가 천막 가득 울렸다.
“그러니까 난 건강해질 의무가 있어! 그리고….”
“…….”
“넌 하나밖에 없는 내 오랜 친구니까, 너도 건강한 모습으로 내 곁에 남아 주면 좋겠어.”
나는 로저먼드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제크론의 손보다 가늘고 매끄러운 손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순간 자신감 같은 게 생겼다.
곧 그를 매튜의 치료실로 인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내 착각이었다.
로저먼드는 슬며시 손을 뺐다.
그리고 차가운 그의 음성이 내 귓가에 닿았다.
“이제 그만 가 줘.”
“로저먼드….”
허탈한 마음에 입이 힘없이 벌어졌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는 걸까?
눈가에 열이 몰리면서 눈물이 맺히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손을 내밀어 보고 싶었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만들었다.
“너… 정말 이러기야?”
촉촉하게 젖은 내 눈을 보고 그가 잠시 동요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다였다.
로저먼드는 결국 몸을 돌렸다.
후우,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오늘은 일단 후퇴하고 봐야 할 것 같았다.
“알았어. 이만 돌아갈게. 다음에… 또 보자.”
속삭이듯 그에게 작별 인사를 고한 나는 터덜터덜 천막을 나섰다.
매튜는 상당히 아쉬워했다.
아르젠토 찻잎의 유통에 대해서 작은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사실 어디에서 어떻게 구했는지는 물어보지도 못했어요.”
“네?”
“그 전에 우선 로저먼드가 중독 치료를 받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아… 그러셨군요. 이해합니다. 중독의 위험성에 대해서 스스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도움이 되는 제보도 주지 않았을 테니 잘하셨습니다, 마님.”
마침내 매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누군가에게 이해를 받는 것은 무척 소중하고 행복한 경험이다.
나도 매튜를 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리고 바랐다.
로저먼드도 내 마음을, 내 의도를 이해해 주기를.
* * *
다음 날, 오후.
“와아….”
완성된 초상화 앞에 선 나는 쉬이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매일 밤, 통신석으로 제크론의 얼굴을 보고 있지만 자그마한 통신석으로 보는 제크론과 커다란 캔버스 위에 섬세한 붓 터치로 완벽하게 재현해 낸 초상화 속 제크론을 보는 것은 천지 차였다.
“…훌륭해요, 브렌트!”
겨우 한마디를 만들어 냈다.
그리움이 몰려왔던 걸까, 어느덧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브렌트는 자신감 넘치는 젊은 예술가답게 활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과찬이십니다, 공작 부인.”
“과찬이라뇨,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정말이지… 아주 마음에 들어요!”
나는 초상화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노래하듯 외쳤다.
크흠, 브렌트가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로 가다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공작 부인.”
“네?”
나는 잠시 초상화에서 눈을 떼고 그를 올려다봤다.
뜸을 들이던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 보이고는 마침내 목소리를 냈다.
“혹시 절 윌트슨 공작성의 전속 화가로 계약할 생각이 있으신가요?”
“아…?”
공작성의 전속 화가?
낯선 개념의 단어에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처음 초상화 의뢰를 받았을 때, 많이 망설였습니다. 1년 전에 진행했던 초상화 작업이 썩 좋은 추억이 아니었거든요.”
“…….”
“한 달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공작성에서 지내면서, 이곳의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공작성이라는 것은 건물 자체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브렌트의 눈빛이 사뭇 진지했다.
그의 눈빛에 담긴 열정이 내 심장을 두근두근 뛰게 만들었다.
“공작성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과 공작성에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공작성을 변화시키는 공작 부인의 활기차고 맑은 기운에 매료되었습니다.”
소나기처럼 쏟아붓는 칭찬 세례에 나는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 됐다.
물론 칭찬은 항상 옳지만 이렇게 대책 없이 많은 양의 칭찬이 한 번에 쏟아지면 감당하는 게 역시 힘들었다.
“…좋게 봐줘서 고마워요.”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움직여 감사의 말을 전했다.
달아오른 얼굴에서 홧홧한 열기가 느껴졌다.
“윌트슨 공작성은 제게 많은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좀 더 머무르면서 공작성의 다양한 모습을 작품으로 기록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
“그러니 저를 윌트슨 공작성의 전속 화가로 계약하는 것을 고려해 주십시오.”
이제야 ‘공작성의 전속 화가’라는 개념이 완전히 이해됐다.
실내악단도 고용해서 매일 음악을 듣고 있는데, 화가를 고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원래 돈 많은 귀족이 예술가의 창작 활동을 후원하는 경우는 무척 흔했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방금 생각해 낸 심사용 질문을 던졌다.
“만약 계약이 성사된다면, 가장 먼저 어떤 모습을 화폭에 담고 싶은가요?”
질문을 들은 브렌트의 얼굴이 더 없이 밝아졌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즐거운 걸까?
그를 만난 이후 가장 밝은 표정에 나는 살짝 감동 받았다.
“사실 너무 많아서… 그중 하나를 고르는 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골라야 한다면….”
그는 이마를 톡톡 가볍게 치면서 고민하더니, 곧 마음을 정했다는 듯 단호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일단은 실내악단의 연주 모습과 주말마다 열리는 운동 수업 모습을 담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제 갔던 건설 공사 현장도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꼭 모두 화폭에 담고 싶은 풍경들입니다.”
브렌트는 입꼬리를 양옆으로 쭈욱 늘리며 헤실헤실 웃었다.
그의 눈동자에 담긴 정열을 느낀 사람이라면 그에게 거절의 말을 건넬 수 없으리라.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 윌트슨 공작성에도 분명 좋은 계약이긴 하지. 공작성에 호감을 가진 화가의 눈으로 기록되는 모습이라면 보나마나 훌륭할 테니까!’
내 표정 변화를 읽었던 것일까.
브렌트가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유쾌하게 말했다.
“저는 찬성해요.”
“오,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
“하지만!”
그가 김칫국을 마시기 전에 확실히 해야 했다.
나는 다급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이가 돌아오면 함께 상의해서 결정해야죠.”
“아…. 그렇죠.”
순간 브렌트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실망감이 떠올랐다.
그가 더 깊은 실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기 전에 나는 얼른 덧붙였다.
“그때까지 공작성에서 기다리면서 그림 하나를 더 그려 주시면 어떨까요?”
“네?”
“초상화와 같은 가격을 지불할게요. 어때요?”
갑작스러운 제안이 한 번에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그는 잠시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공작 부인! 하죠, 합니다! 그림 하나 더 그리겠습니다! 가격은 초상화 가격의 절반이면 충분합니다. 초상화 가격이 워낙 높았거든요!”
“정말요? 다시 잘 생각하고 말해요. 나중에 말 바꾸기 없기예요.”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브렌트를 봤다.
흡, 그가 어깨를 바짝 움츠리며 헛숨을 삼켰다.
순간의 감동적인 기분이 휩싸여 이성적인 판단을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눈치였다.
헤에, 그가 머쓱하게 웃으며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그, 그럼… 마지막 말은 취소하겠습니다. 공작 부인께서 처음에 제안해 주신 대로 초상화와 같은 가격으로 작업하겠습니다.”
크흠, 브렌트는 민망한지 괜히 헛기침을 내뱉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이 웃겨 나는 쿡쿡, 웃을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공작 부인.”
그가 내 손을 덥석 잡고 위아래로 경쾌하게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