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로저먼드는 내 기억이 다 돌아오기 전에는 절대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인사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응접실을 나섰다.
무척 화가 나 있었다.
‘치잇, 이쪽도 화가 난 건 마찬가지라고!’
괜히 심술이 났다.
왜냐하면 이제는 화가 어느 정도 풀렸기 때문이었다.
로저먼드의 서운한 마음이 조금 이해됐다.
꿈속에서 봤던 어린 엘프윈과 로저먼드의 모습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자 속 아르젠토 찻잎을 보자마자 화를 냈던 것을 사과할 마음은 없었다.
확실히 로저먼드의 행동은 잘못된 행동이었으니까.
“그래도 매튜의 조사를 도우려면 로저먼드가 필요한데…. 후우….”
답답한 마음에 혼잣말을 읊조렸다.
이를 어찌해야 하나.
호로록, 해열 작용을 돕는다는 허브 차는 심신 안정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따뜻한 차 덕분에 마음이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졸음이 몰려왔다.
하아아암…. 긴 하품이 뿜어져 나올 때였다.
통신석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졸음이 한순간이 달아났다.
재빨리 통신석을 들고, 벽난로 쪽으로 걸어갔다.
벽난로의 불빛이 은은한 조명을 만들어 얼굴을 더욱 예쁘게 보이는 효과가 탁월했다.
“제크론!”
내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평소와 달리 통신석에서 지지직 소음만 나고 제크론의 얼굴이 바로 보이지 않았다.
‘어? 갑자기 왜 이러지? 고장이라도 난 건가?’
불길했다.
딱 하나밖에 없는 통신석인데 지금 고장 나 버리면 한동안 그의 얼굴과 목소리를 만날 수 없게 된다.
매일매일 이 시간만을 기다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렇게 되는 건 싫었다.
“제크론!”
다시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간절한 염원을 담아.
지직, 지지직-
소음이 잠시 이어지더니 드디어 통신석이 환하게 빛났다.
-엘프윈! 이제 보이는군! 통신석이 좀 불안해.
“제크론! 괜찮아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죠?”
괜한 걱정이 고개를 들었다.
근심 섞인 물음에 제크론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곧 온화한 미소가 그의 얼굴 전체에 퍼졌다.
-응. 난 괜찮아. 하지만 이 녀석은 괜찮지 않은 것 같군.
“고장 난 걸까요?”
-고장까지는 아니고, 연결 상태가 불안정한 거야.
“갑자기 왜요?”
-어제, 오늘 출몰하는 마물의 수가 늘었어. 아무래도 마물이 뿜어내는 마력의 영향을 받아 이 녀석이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는 것 같아.
“마물의 수가 늘었다고요?”
나는 거의 외치다시피 물었다.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곧 그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깨부수는 소식.
제크론의 얼굴에 다시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걱정하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상냥한 미소였다.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나도, 뎀프샤의 군사들도 철저하게 준비돼 있으니까.
“알아요. 그렇지만….”
걷잡을 수 없이 솟아나는 걱정 때문에 말을 쉬이 이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열심히 힘내고 있는 제크론 앞에서 눈물을 보여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눈물을 눌러 담았다.
‘5분만 참자, 5분만!’
제크론의 눈동자를 마주 본 순간 눈물을 흘릴 것 같아, 일부러 시선을 비스듬히 하며 통신석의 귀퉁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목소리의 톤을 한껏 올려 신나게 말했다.
“초상화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요! 당신 얼굴이 나보다 더 예쁜 것 같아서 좀 질투하고 있지만요.”
-내가 당신보다 더 예쁠 리가 없잖아.
제크론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는 제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래서 내가 알려 줘야 했다.
“당신은 정말….”
하지만 나는 시작한 말을 다 끝낼 수 없었다.
제크론이 동시에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당신보다 더 예쁜 존재는 세상에 없어. 당신이 최고야, 엘프윈.
뭐, 뭐지?
이 남자 원래 이렇게 달달한 멘트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
아니, 아니었다!
지금 시기의 제크론은 무뚝뚝하고, 냉랭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불쑥 꿀처럼 달콤한 대사를 읊어 줘 버리면….
‘내 심장이 남아나질 않잖아요!’
나는 빨갛게 달궈진 볼을 감싼 채 원망 어린 눈빛으로 제크론을 봤다.
내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그저 생글생글 웃기만 할 뿐이었다.
* * *
지난밤 제크론과의 달달한 통신석 대화 덕분인지 나는 상쾌한 몸과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냥 기분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어제 대화 말미에 제크론이 한 말 때문이었다.
“출몰하는 마물의 수가 많아서 지금까지처럼 매일 통신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아. 전투가 밤낮으로 이어질 것 같거든. 그러니까 너무 기다리지는 마. 마물 출몰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 그때 내가 연락할 테니까. 알았지?”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제크론을 비롯한 수천의 군사들은 매일매일 위험한 전투를 치루는 중이었으니까.
어리광을 부릴 수 없었다.
후우,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똑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부보좌관이 나를 찾아 왔다.
멀론 경이 제크론과 함께 토벌 작전에 투입되어 떠난 뒤로 부보좌관과 조수들이 이 영지 관리 업무를 나눠서 책임지고 있었다.
“마님, 오후에 모슈워에 출장을 다녀오는 일정이 있습니다.”
모슈워는 뎀프샤의 남서부에 위치한 마을로, 지금 한창 왕립 아카데미 분교 건설이 진행 중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아니요. 문제는 없습니다. 단지 작업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서 건설 자재의 추가 구입 일정을 앞당겨야 합니다. 때마침 석재 생산지인 메드록의 월시 소공작이 건설 현장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들어서 급하게 회의 일정을 잡았습니다.”
“그렇군요. 네? 방금 누구라고 했죠?”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내가 갑자기 목소리를 키우자 부보좌관은 살짝 당황한 듯 두 눈을 키웠다.
“메드록의 월시 소공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월시 소공작이라면, 로저먼드 월시가 맞죠?”
“네, 그렇습니다.”
뎀프샤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더니, 그 볼일이란 게 건설 현장과 관련된 일이었구나.
생각지도 못한 기회에 들뜬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그 회의에 저도 함께 가야겠어요.”
“네?”
“월시 소공작과 할 얘기가 있어서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부보좌관은 갑작스러운 내 제안에 당황한 눈치였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꾸벅 인사하고는 자리를 떴다.
‘무거운 몸으로 먼 길까지 찾아가는데, 설마 안 만나 주진 않겠지?’
바로 어제 더운 콧김을 씩씩 뿜으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서던 로저먼드의 모습을 떠올리자 걱정이 앞섰다.
헛걸음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도 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니까!’
반신반의 하는 마음을 다독이면서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 * *
‘꽉 찼네.’
가만히 앉아 출발을 기다리며 마차 안에 함께 앉은 면면들을 살폈다.
요즘 들어 부쩍 내 외출에 대동되는 사람의 수가 많았다.
일단 내 옆에는 케이트가 자리했다.
이제는 몸이 많이 무거워져서 금방 피곤해지고 거동이 힘들어지는 순간들이 있어 외출 시 내 팔을 붙들어 줄 하녀의 대동은 필수였다.
주치의 매튜도 의료 도구가 든 가방을 무릎 위에 단정히 올려놓은 상태로 앉아 있었다.
사실 매번 매튜를 대동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지만 제크론이 매튜에게 단단히 당부하고 간 모양이었다.
화가 브렌트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초상화는 거의 막바지 작업 중이라는 그는 마침 휴식 시간이라며 동행해도 되는지 물었다.
공작성이 훌륭하기는 하지만 계속 한 곳에 박혀 있는 게 답답하다며 부탁하는 브렌트에게 차마 고개를 저을 수 없었다.
부보좌관과 조수까지 해서 총 여섯 명을 태운 마차는 꽉 찼다.
알타라스에서 개조한 6인승 마차가 아니었다면, 마차 두 대가 필요할 뻔했다.
이동 시간을 30분의 1로 줄여 주는 알타라스 덕분에 정확히 15분 후 우리는 모슈워의 건설 현장에 도착했다.
일단 부보좌관과 조수가 먼저 로저먼드와 회의를 진행하고, 나는 회의 후에 로저먼드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들의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건설 현장 주위를 천천히 걷기로 했다.
부보좌관이 붙여 준 현장 관리자가 안내를 맡았다.
“저쪽에 보이는 것이 제1본관 건물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보이는 것은 제1별관이고요.”
햇볕에 그을려 가무잡잡한 얼굴의 관리자가 괄괄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는 관리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며 천천히 걸었다.
브렌트의 입에서 ‘오!’, ‘아!’와 같은 탄성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그는 갑작스러운 현장 답사를 꽤나 즐기는 눈치였다.
“제2본관과 제2별관까지 해서 총 네 개의 건물이 세워질 예정입니다. 처음엔 2년 후 완공을 목표로 계획을 세웠는데, 일정을 좀 더 당겼으면 하는 공작님의 바람대로 작업 속도를 올리고 있는 중입니다.”
“작업 속도를 올리면… 인부들의 건강 상태나 작업 환경이 열악해지지 않나요?”
진심에서 우러나온 걱정이었다.
전생에서 이른 출근과 잦은 야근으로 감내해야 했던 고통의 시간이 떠올랐다.
노동자의 뼈와 살을 갈아야 돌아가는 노동 현장은 이 땅에서 없어져야 한다.
내 물음에 관리자는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공작님께서도 그 부분을 가장 먼저 신경 쓰라 하셨습니다. 해가 떠 있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3교대로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관리자는 무척 자부심이 넘치는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 갔다.
나는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잊지 않으며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2교대로 작업했을 때와 비교하면, 급료는 그대로 고정하고, 작업 시간이 줄어드니 생산성이 향상됐습니다. 게다가 고용도 늘어나서 지역 경제에도 이바지하는 바가 크고요.”
“그렇군요.”
“앞으로 줄줄이 건설 사업이 진행될 테니 작업 환경에 불만이 없도록 신경을 써서 인부들의 환심을 사야 한다고 공작님께서 강조하셨습니다.”
“앞으로 어떤 건설 사업이 더 진행됩니까?”
내내 탄성을 내뱉으며 듣고만 있던 브렌트가 불쑥 물었다.
관리자에게로 향하는 그의 눈빛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제가 듣기로는… 왕립 마법 아카데미의 분교도 곧 착공한다고 하셨고, 고아원과 병원도 계획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호오…! 놀랍군요! 뎀프샤는 지금도 훌륭하지만 앞으로 10년 후가 더욱 기대되는 곳이군요!”
브렌트가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그가 발산하는 흥분된 열기 덕분일까.
나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뎀프샤는 제국 내에서 손꼽히는 풍요로운 영지였다.
하지만 수도 라하브처럼 화려하고 번화한 느낌의 도시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계획하고 있는 이런저런 사업들이 제대로 진행된다면 수도만큼 훌륭한 도시를 만들 수 있으리라.
즐거운 상상이 머릿속에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부보좌관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꾸벅 인사한 부보좌관이 거친 숨을 고르고는 입을 열었다.
“마님, 회의가 끝났습니다. 석재의 가격과 조달 일정이 원만하게 조율됐습니다. 월시 소공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아요. 지금 가죠.”
우리는 정문 근처에 세워진 야영용 천막으로 향했다.
* * *
마주 앉은 나와 로저먼드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로를 바라봤다.
그는 아직 화가 덜 풀려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요청한 만남이었으니 내가 먼저 입을 열어야겠지?
진득한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누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니야. 그래도 만나서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어.”
“…….”
“먼저 사과부터 할게. 아르젠토 찻잎을 보고 너무 몰아세웠던 건 미안해.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모두 네 탓으로 돌렸던 것은 잘못했어. 정말 미안해.”
내 사과에 놀랐던 것일까.
로저먼드의 금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는 여전히 입은 꾹 다문 채였지만 표정만은 처음보다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다행이었다.
이야기가 좀 통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싶어.”
“바로 잡는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로저먼드, 혹시 너도 어렸을 때부터 신경 치료제로 아르젠토 차를 처방받았던 거야?”
나는 어젯밤 꿈에서 봤던 장면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마시고 있어?”
“그런데, 왜?”
날선 대답이 나왔다.
후우, 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재빨리 말했다.
“이번 기회에 치료받자.”
로저먼드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경악에 찬 힐난의 시선이 내게로 날아왔다.
“난데없이 이런 말 하는 내가 어이없고, 또 밉겠지만 그래도… 치료받자. 나도 했으니, 너도 해낼 거야. 어렵지 않아.”
“…….”
“내가 도울게. 우리 공작성의 주치의는 유능해. 공작성에 머물면서 치료받으면….”
“너 진짜 낯설다. 언제부터 그렇게 건강을 챙겼다고.”
쳇, 그는 내 말을 끊고 코웃음을 쳤다.
내 말이 어처구니가 없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