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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71/142)
  • 71화

    로저먼드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봤다. 

    원망이 섞인 눈빛이었다. 

    내가 화를 내는 만큼 그도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어쨌든 나는 그에게 따져 물어야 할 게 많았다. 

    “그래. 기억에는 없지만 애초에 내가 부탁했다고 쳐. 내가 사정했다고 쳐. 그런데….”

    “…….”

    “너, 내 친구라며? 같은 날에 태어나서 우리 사이가 좋았다며? 그런데… 몸도, 마음도 약한 친구한테 이따위 것이나 구해다 주는 게, 그게 친구야? 진정한 의미의 친구라고 할 수 있는 거야?”

    어느새 굵은 눈물 줄기가 볼을 타고 소리 없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 눈물에 로저먼드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쉬지 않고 차오르는 눈물 탓에 시야가 일렁거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눈가도 촉촉이 젖어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로저먼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너 정말… 구제불능이구나. 따지려거든 그 망할 기억이나 찾고 따져! 네가 울면서 매달리면, 난 거절할 수 없었어! 처음부터 그랬어. 내가 무슨 수로 널 막을 수 있겠어!”

    “…….”

    “기억이 없는 상태로는 다시 보지 말자.”

    마지막 말을 차갑게 뱉은 그는 저벅저벅 걸어 밖으로 나갔다. 

    작별 인사 같은 것도 없이 그대로 끝이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얇은 상자를 노려봤다. 

    그 안에 가득 담겨 있는 아르젠토 찻잎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일었다. 

    그리고 몇 개월 전, 금단 증세로 쓰러졌던 일, 매튜의 도움으로 중독 치료를 했던 일이 떠올랐다. 

    순간 가슴이 답답해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하아, 하아…. 하아….”

    온몸에 열이 오르면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치 금단 증세처럼. 

    내가 혼자 응접실에 남은 것을 알고 케이트가 들어왔다. 

    “마님, 손님께서 일찍 돌아… 어머나, 마님, 왜 그러세요? 어디가 안 좋으세요?”

    소파 팔걸이를 단단히 잡은 채 헉헉거리며 숨을 거칠게 내쉬는 내 모습에 놀란 케이트가 후다닥 곁으로 다가왔다. 

    케이트를 담은 내 시야가 어질어질 흔들렸다.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하아… 하아…. 얼른 가서… 하아… 매튜를 불러와 줘.”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내 명령이 끝나기 무섭게 케이트는 잽싸게 몸을 일으켜 달려 나갔다. 

    나는 결국 거의 쓰러지다시피 소파 팔걸이에 매달린 채 이마를 짚고 호흡에만 집중했다.

    ‘숨을 쉬는 게… 이렇게나 힘들 일이야?’

    이 정도 일에, 너무도 쉽게 무너지는 몸이라니.

    그동안 해 왔던 노력들이 모두 무색하게 느껴졌다. 

    비참했다. 

    이 상태라면 출산의 고통을 감당해 내는 것은 그른 것 같았다. 

    자신감이 바닥으로 푹 꺼졌다. 

    점점 눈앞이 까맣게 변하면서 의식이 희미해졌다.

    그리고 툭, 의식이 끊겼다. 

    *   *   *

    까만 어둠 속을 걷고 있었다. 

    ‘…꿈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내 몸을 내려다봤다. 

    까만 어둠에 감춰졌는지 내 몸조차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다리로 보이지 않는 길을 걷고 또 걷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하얀 빛을 뿜어내는 물체가 보였다. 

    두려움 반, 기대 반을 가지고 가까이 다가갔다. 

    빛을 뿜어내던 그것은 물체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작은 소녀였다. 

    웅크린 채 앉아 있는. 

    ‘나…인가?’

    익숙한 소녀의 모습에 순간 나라고 착각했다. 

    그리고 바로 잠시 뒤에 깨달았다. 

    ‘아니지. 내가 아니라, 엘프윈이지!’

    이젠 점점 엘프윈과 나를 분리하는 게 쉽지 않았다. 

    나는 어린 엘프윈에게로 다가갔다. 

    소녀는 떨고 있었다. 

    뭐가 저렇게 두려운 걸까? 

    대체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 걸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쭈뼛거리기만 하며 소녀를 봤다. 

    그때였다. 

    소녀와 마찬가지로 새하얀 빛을 뿜어내는 사람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로저먼드?’

    아직 어린 모습의 로저먼드인 것 같았다. 

    소년이 소녀에게 찻잔을 건넸다. 

    그리고 세상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 먹을 시간이야. 마시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

    “고마워.”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다. 우리 주치의가 의심하기 시작했어.”

    “응.”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엘프윈이 찻잔을 받아 들고 입으로 가져갔다. 

    호로록, 차를 몇 모금 마신 엘프윈은 다시 찻잔을 로저먼드에게 넘겼다. 

    “네 약이니까 너도 마셔야지.”

    몸 전체가 새하얗게 빛나서 표정이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생긋 미소 짓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찻잔을 받아 든 로저먼드는 차를 한 입에 다 털어 넣었다. 

    엘프윈은 더 이상 웅크려 있지도, 떨고 있지도 않았다. 

    소녀는 다리를 앞으로 쭉 뻗은 채 편안해 보이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로저먼드도 엘프윈 옆에 비슷한 자세로 앉았다. 

    둘의 발이 닿았다. 

    툭툭, 서로의 발을 치면서 장난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소년소녀다웠다. 

    키득키득, 서로 장난말을 주고받으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엘프윈이 내게 보여 주는 과거의 한 장면인 걸까?

    아니면 아까 로저먼드의 말을 듣고 내 무의식이 꾸며 낸 이야기인 걸까?

    ‘아무렴 어때. 어쨌든… 둘의 모습이 무척 다정해서 보기 좋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들 보다 예민하고 약한 몸을 갖고 태어난 엘프윈에게 세상은 다정한 곳이 아니었으리라. 

    물론 엘프윈도 세상을 다정하게 대하지 않았을 테고. 

    그래서 많이 외로웠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로저먼드만은 친구가 되어 줬구나. 다행이네.’

    어느새 내 입가에도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   *   *

    “마님, 정신이 드세요?”

    눈을 떠 보니 침실이었고, 케이트와 주디가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스르르 몸을 일으켜 앉는 나를 보는 하녀들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두 하녀의 눈 밑이 퀭한 것으로 보아 꽤 오랜 시간 동안 병간호를 한 모양이었다. 

    “전 어서 가서 주치의 선생님을 모셔 올게요.”

    주디가 후다닥, 달려 나갔다. 

    케이트는 투명한 유리컵에 물을 따라 내게 건넸다. 

    어찌된 영문으로 내가 지금 여기 누워 있는지 기억이 완전히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숨 쉬는 게 힘들었는데, 결국 응접실에서 그대로 쓰러졌구나.’

    매튜가 침실 안으로 허겁지겁 들어왔다. 

    내 체온과 맥박을 확인한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열이 좀 남아 있습니다. 해열에 좋은 차를 준비하라 이를 테니 드시고 한숨 더 주무십시오.”

    “고마워요, 매튜.”

    “어제 손님이 나가자마자 쓰러지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그에게 자조지종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리고 침대 옆 협탁 위에 고이 놓여 있는 작은 상자를 가리켰다. 

    하녀들이 잘 챙겨 둔 모양이었다. 

    “저거예요. 안에 아르젠토 찻잎이 들어 있어요.”

    매튜는 바로 상자 안을 확인했다. 

    그의 눈동자가 잠시 커졌고, 얼굴에는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생각이 많아지는 눈치였다. 

    “…그랬던 것이군요.”

    매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그는 잠시 망설이는 것 같았는데,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사실 몹시 궁금했습니다. 마님께서 아르젠토 찻잎을 어떻게 구하셨는지요. 그래서 제 나름대로의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랬군요.”

    “그런데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문제가 꽤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문제요? 어떤…?”

    “매해 아르젠토 차에 중독되는 젊은 귀족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국가에서 아르젠토 차의 사용을 극히 제한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

    “가짜 처방전을 받는 것도, 가짜 처방전을 가지고 아르젠토 차를 구입하는 것도 무척 쉽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엘프윈과 로저먼드와 같은 젊은 귀족들이 너무도 쉽게 아르젠토 차에 중독이 됐나 보다. 

    안타까웠다. 

    매튜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로저먼드 월시 소공작님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시겠습니까?”

    “뭘 하려고요?”

    “그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아르젠토 찻잎을 구하게 된 경로를 묻고 싶습니다.”

    “…….”

    “제가 그동안 만났던 중독 피해자들은 모두 친한 친구 이름을 대면서 친구에게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마님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그 친구에게 물어보면 또 다른 친구의 이름을 댑니다.”

    “그런….”

    “일부 귀족들 사이에서 개인적인 거래로 돌고 돌게 되는 것 같습니다. 불법 유통의 근원을 찾아야 해결 방안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로저먼드도 친한 친구에게서 얻은 것일 확률이 높겠네요?”

    “네, 물론입니다. 하지만 물어봐서 나쁠 건 없겠죠.”

    “알았어요. 로저먼드에게 연락해 볼게요.”

    “감사합니다, 마님.”

    할 일을 마친 매튜와 하녀들이 나간 침실에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하녀들이 내온 해열에 좋다는 허브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로저먼드에게 연락을… 할 수 있을까?’

    매튜에게는 해 보겠다고 말했으나, 사실 자신이 없었다. 

    후우, 한숨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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