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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70/142)
  • 70화

    “벌써?”

    너무 놀란 나머지 목소리 톤이 한 옥타브 정도 높아졌다. 

    그도 그럴 게, 그는 분명 도착하기 전에 한 번 더 편지를 준다고 했었다. 

    그래서 그의 편지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로저먼드 월시, 본인이 아니라. 

    “네, 지금 1층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았어요. 잠시만 기다리라고 전해 주세요. 곧 내려갈 테니.”

    “알겠습니다, 마님.”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한 집사장은 단정한 걸음으로 나갔다. 

    으…. 긴장감 때문일까, 온몸에 소름에 오소소 돋아났다. 

    기억에도 없는 옛 친구를 상대하는 일이 무척 곤욕스러울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마님, 이만 손님을 맞으러 가시지요. 오늘 초상화 작업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고마워요, 브렌트.”

    나는 브렌트에게 인사를 하고 걸어 나갔다. 

    뒤에서 나를 따르던 주디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마님, 괜찮으실 거예요. 그러니 너무 걱정 마세요.”

    “…응.”

    나는 주디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누구보다 내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주디였기에 다른 설명은 굳이 필요치 않았다. 

    주디는 다 이해한다는 듯 살포시 내 손을 그러쥐었다. 

    나는 그녀의 손등을 토닥토닥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 괜찮겠지. 무슨 별일이야 있겠니?”

    *   *   *

    별일이 일어났다. 

    1층 응접실로 들어선 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대체 이게 다….”

    힘없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혼잣말이 제멋대로 나왔다. 

    그도 그럴 게 응접실 한쪽 벽면에는 각양각색의 선물 꾸러미들이 작은 탑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말하면 선물 꾸러미가 만든 탑이 거의 천장에 닿을 것 같았다. 

    이게 다 선물이라고?

    본인이 산타 할아버지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서 있는데, 다리를 꼰 채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남자의 단정한 얼굴에 미소가 가득 떠올라 있었다. 

    ‘저 사람이… 로저먼드 월시! 나는 엘프윈! 우리 둘은 친한 친구! 그러니까 스스럼없이, 편하게, 막 대해도 됨! 일단 반말부터! …맞겠지?’

    시험 준비를 위해 암기하듯이 상황을 차근차근 머릿속에 새겨 넣어 봤다. 

    지난 황후 폐하의 탄신 연회에서 잠깐 스치듯 보고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었다. 

    새하얀 재킷에 빛이 반사돼서 그런지 그의 하얀 얼굴이, 금색 머리카락이 더욱 환하게 빛났다. 

    “오랜만이야, 엘프윈!”

    “으, 응.”

    로저먼드가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자, 내 손이 저절로 스르르 위로 올라갔다. 

    곧 몸을 낮춘 그는 내 손을 끌어다가 제 입술에 갖다 댔다. 

    이런 식의 인사법이 익숙한 몸은 아무렇지 않게 저절로 반응하고 움직였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귀 뒤쪽으로 은은한 열기가 몰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역시 기억은 아직인가 보구나.”

    “응, 뭐. 그러니까 빨리 익숙해져야 할 거야.”

    “그래도 말투는 여전하네. 기억이 없어도 그런 건 사라지지 않나 봐?”

    로저먼드가 피식, 웃었다. 

    사실 말투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하던 터라 여전하다는 그의 말에 다소 안심했다. 

    몸이 무거워 오래 서 있는 게 쉽지 않았던 나는 소파에 천천히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기보다는 네 힌트 덕분에 기억나는 것들이 조금 있었거든.”

    “그때 그… 열여덟?”

    “응.”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저먼드도 황후 폐하의 생신 연회에서 만났던 에피소드를 잊지 않고 있었나 보다.

    그의 입매가 옆으로 주욱 길게 늘어졌다. 

    “우리의 열여덟 번째 생일 파티! 그날의 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는데! 아무래도 넌 기억 못하겠지만 말이야. 그건 아쉽다.”

    “이렇게 돼 버렸어.”

    “기억이 통째로 사라지다니…. 그럼 그날 연회에서 우연히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내가 힌트를 주지 않았더라면, 그럼 나는 완전한 타인이었겠네?”

    “그랬…겠지?”

    괜히 머쓱해진 나는 미소를 지어 보려 했다.

    하지만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데, 조금이나마 미안한 척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어색한 미소만 만들어질 뿐이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정말 씁쓸하다. 내 어린 시절은 엘프윈, 네 덕분에 예쁘고 기분 좋은 추억이 많은데, 이젠 나만 기억하는 추억이라니.”

    로저먼드가 아쉬운 마음을 계속 토로하는 덕분에 나는 어색한 미소를 계속 짓고 있어야 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쉬운 시간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다행히 하녀들이 디저트가 가득 담긴 트롤리를 끌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디저트 테이블을 세팅하는 하녀들의 바쁜 손을 보면서 나는 느긋하게 손바닥을 팔랑거리며 말했다. 

    “천천히 해도 괜찮아. 서두르다가 꼭 실수하지.”

    제발 천천히, 천천히 움직여서 오래오래 내 곁에 있어 줘, 날 혼자만 두고 가지 마, 간절한 눈빛을 하녀들에게 보내 봤지만 헛수고였다. 

    베테랑 하녀들은 군더더기 하나 없는 빠릿빠릿한 손놀림으로 금세 디저트 테이블 세팅을 완료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고마워, 다들.”

    우르르 들어왔던 하녀들이 다시 우르르 나가자 로저먼드와 나, 둘만 남은 응접실이 고요해졌다. 

    그 덕분에 로비에서 연주하는 실내악단의 음악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로저먼드가 한 모금 마신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신문에서 읽었어. 실내악단을 고용했다고.”

    “응, 그렇게 됐어. 태교에 좋다고 해서.”

    음악은 언제나 옳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대화거리를 던져 주니까 말이다. 

    “아, 태교.”

    로저먼드의 시선이 봉긋하게 솟은 내 배에 닿았다.

    나는 배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이다음에 네 아내가 임신하게 되면 그땐 실내악단 고용하는 거 고려해 봐. 심신 안정에 음악 감상만 한 게 없잖아.”

    “…….”

    그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무런 대꾸가 없자 괜히 머쓱해지려 하는데, 마침내 그의 입술이 열렸다. 

    “우리가 같은 날에 태어났던 것처럼, 우리 아이들도 같은 날에 태어났으면 좋을 텐데. 아쉽다.”

    “아직 아쉬워하기엔 이르지.”

    내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자 로저먼드가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아이를 더 낳겠다고? 아이라면 질색하던 네가?”

    아, 엘프윈은 아이를 질색했구나. 

    그걸 로저먼드는 확실히 알고 있고. 

    새롭게 얻은 정보에 진땀이 났다. 

    “응, 뭐. 어렸을 땐 그랬을 수도 있겠는데, 물론 기억엔 없지만.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기대하고 있어. 아이 키우는 삶을.”

    “너… 정말 낯설다, 엘프윈.”

    “응. 그러니까 빨리 익숙해져야 할 거야.”

    새로운 나한테.

    다시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찾아왔다. 

    대화가 뚝, 뚝, 끊기니 어쩔 수 없었다. 

    말없이 디저트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아, 잊을 뻔했군!”

    로저먼드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게 갑자기 떠오른 듯 외쳤다. 

    그러고는 재킷 안으로 손을 넣어 뭔가를 꺼냈다. 

    납작한 상자였다. 

    상자를 나에게로 건네는 그의 입술 끝이 한쪽으로 말려 올라갔다. 

    금색의 눈동자에는 장난기가 가득 차올라 있었다. 

    “오래 기다렸지? 하지만 많이 가져오지는 않았어.”

    나는 아무 말 없이 그가 건네는 상자를 받았다. 

    짙은 갈색의 나무 상자 뚜껑에는 테이블에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두 사람의 모습이 엷은 부조로 새겨져 있었다. 

    로저먼드가 계속 말을 이었다. 

    “임산부들은 많이 복용하면 안 좋다고 해서 말이야. 하지만 약간씩은 괜찮을 거야. 널 위해서 그런 거니까 서운해 하지 말고.”

    “이게 뭔데 그래?”

    납작한 상자를 받아 든 나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그는 대답 없이 어깨만 으쓱거릴 뿐이었다. 

    나는 얼른 상자를 열어 봤다. 

    내용물을 확인한 나는 경악했다. 

    순간 화가 솟구쳤다. 

    “너였어?”

    “나, 뭐?”

    “엘프윈이 이 말도 안 되는 차에 중독됐던 이유.”

    너무 화가 나는 바람에 1인칭 ‘내가’ 대신 3인칭 ‘엘프윈이’를 써 버렸다는 것은 말을 끝낸 다음에야 깨달았다. 

    하지만 로저먼드는 깨닫지 못한 눈치였다. 

    그 보다는 내가 갑자기 화를 내서 당황한 모양이었다. 

    “나라에서도 사용을 제한하는 약초라며? 그런데 이런 걸 내게 왜 주는 거야?”

    “…….”

    “임산부에게 안 좋으니까 조금만 넣었다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몸에 안 좋으니까 애초에 주면 안 되는 거잖아!”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눈가에 열이 몰리면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화를 이기지 못한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로저먼드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거 왜 이래, 엘프윈? 제발 좀 구해 달라고 부탁했던 건 너였어. 나는 네가 하도 사정하길래 어쩔 수 없이 원하는 대로 들어줬던 것뿐이잖아.”

    “…….”

    “하긴… 기억을 잃었으니 아무리 설명해 봐도 모르겠군. 기억을 잃다니… 그거 너무 편리한 장치로군. 너 진짜 기억을 잃은 건 맞아? 그러는 척하는 건 아니고?”

    로저먼드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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