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8/142)
  • 68화

    나는 한층 들뜬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듯 말했다. 

    “다행이네요, 정말. 안 그런 척하려고 했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어요. 하지만 이젠 걱정하지 않을게요, 그럼.”

    “…….”

    “그런데 공녀… 내일은 요소킨 운동 수업에 나올 수 있는 건가요?”

    “그건….”

    핸더슨 공녀는 대답을 빨리 내놓지 못했다. 

    이제까지 내내 잠자코 있던 도론 공녀가 대뜸 입을 열어 대신 대답했다. 

    “그건 내일의 제나가 잘 알아서 하겠죠. 오늘의 우리는 재밌는 얘기나 해요. 투치 씨, 지난달에 저 멀리 남부에 있는 빌부슈 백작가에서 작업했다면서요. 그 집 영애와 영식들의 인물이 그렇게 훤하다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역시 라하브 사교계의 중심인물답게 도론 공녀는 유명 화가 브렌트의 과거 작업 이력까지 꿰고 있는 모양이었다. 

    “훤하다고? 아니… 아, 물론이죠.”

    도론 공녀의 화제 전환 작전은 꽤 성공적이었다. 

    사람들은 못난이 가문으로 유명한 지방 귀족을 비웃는 농담에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처음엔 어리둥절해하던 브렌트도 바로 분위기를 파악하고는 신나게 빌부슈 백작가에서 보고 들은 일들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음성 효과나 과장을 보태서 하는 브렌트의 이야기에 모두들 빠져들었다. 

    ‘이래서 많은 귀족들이 브렌트를 찾는구나.’

    몰랐던 브렌트의 인기 비결을 알게 됐는데,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브렌트가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엘프윈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을 것을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했다. 

    이번 초상화 작업이 끝난 후, 다른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서 어떤 소리를 하고 다닐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

    처음 보는 귀족들 틈에서 하하 호호 웃는 브렌트를 보며 나는 마른침을 꼴딱 삼켰다. 

    그리고 다짐했다. 

    브렌트 앞에서는 더욱 더 언행에 신경을 써야겠다고. 

    좀 더 친절하고, 좀 더 말수를 줄여야겠다고.

    호로록, 천천히 삼킨 차의 맛이 유독 썼다. 

    *   *   *

    “아으…. 시원해라!”

    케이트가 따뜻한 돌멩이가 든 찜질 주머니로 내 허리를 압박하자 입에서 절로 기분 좋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온도는 괜찮은가요? 너무 뜨겁지 않으세요?” 

    “응, 너무 좋아. 딱 좋아.”

    으으…. 연신 흘러나오는 신음 소리가 웃긴지 케이트가 호호, 웃었다. 

    “많이 힘드셨죠? 일정에도 없던 병문안까지 다녀오시고 말이에요.”

    “응,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시간이었어.”

    따뜻한 찜질 덕분인지, 아니면 좋았던 기억 덕분인지 눈꼬리와 입꼬리가 스르르 풀리면서 헤벌쭉 웃는 얼굴이 됐다. 

    나는 케이트를 등진 채 누워 있어 그녀의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핸더슨 공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는 줄 알았어요.”

    “맞아. 케이트가 잘 봤어. 나는 핸더슨 공녀도, 도론 공녀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런데 괜찮은 시간이었다고요?”

    “그야… 함께 간 사람들 덕분이지.”

    헤헤, 그들을 생각하자 다시 얼굴 근육이 흐물흐물 풀어졌다. 

    도론 공녀와 그 친구들이 내게 병문안을 가 보는 게 어떻겠냐고 협박 아닌 협박을 늘어놓을 때, 메릴 선생님이 불쑥 나섰다.

    공식적인 이유는 ‘수업을 수강하는 학생이 아팠으니 걱정이 된다, 그러니 내가 병문안을 가겠다.’였다. 

    하지만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메릴 선생님이 갑자기 나선 데에는 다른 이유가 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궁지에 몰린 것 같은 나를 도와주고 싶었다든지… 하는 그런 이유 말이야.’

    아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몽글몽글해졌다. 

    게다가 디아브 백작 부인네는 또 어떤가! 

    내가 난처한 일에 휘말리는 건 아닌지 걱정되는 마음에 다시 마차를 돌렸다니! 

    영웅이야?

    구원자야?

    아니지,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친구지!’

    그랬다. 

    어느새 내게 친구들이 생겼다. 

    후훗, 온몸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발이 절로 동동거렸고, 주먹은 베개를 팡팡 내려쳤다. 

    식어 버린 찜질 주머니 대신 따뜻한 새로운 찜질 주머니를 허리에 대고 지그시 누르고 있던 케이트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정말 좋으셨나 봐요, 마님.”

    “응, 정말 좋았어. 진짜로.”

    행복하다고 느꼈을 만큼. 

    이 세계에 와서 내 목표는 오로지 한 가지였다. 

    건강한 육체와 건강한 정신을 확보하는 것. 

    그래서 출산이라는 죽음의 난관에서 살아남는 것.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일단 사람이 살고 봐야 하는 것이니까. 

    그랬는데 어느새 내 주위에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뜻밖의 수확이었고, 값진 인연이었다. 

    원한 것은 아니지만 우연히 얻게 된 행운이었다. 

    ‘나, 이 세계가 좋아.’ 

    고단하기만 했던 전생이었다. 

    일에 치이고, 가족에 치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죽음의 그림자가 지척에서 도사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행복감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행복감에 절어 있는 지금은,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 죽는지와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 행복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그래, 그거면 된 거다. 

    하으으…. 허리가 지져지는 감각에 또다시 나른한 신음이 조용히 터져 나왔다. 

    오늘 밤은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   *   *

    “그래도 찜질하고 났더니 이제 한결 괜찮아졌어요.”

    -그 공녀들 때문에 괜히 당신이 무리했군. 이번엔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앞으로는 내키지 않는 자리에 억지로 가지 마.

    “알았어요. 고마워요.”

    -고맙긴, 뭐가.

    “내 편 들어 줘서.”

    호호, 웃음이 나오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나른한 몸으로 침대에 누운 채 통신석에 비친 제크론의 얼굴을 보는 것도, 그가 두 팔 걷어붙이고 내 편을 들어 주는 것도 모두모두 도가 지나친 행복이었다. 

    얼굴 근육이, 뇌 근육이 흐물흐물 녹아 내렸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동안 꾹 참았던 말을 해 버리고 말았다. 

    내내 자중하려고 애썼는데, 뇌가 물렁물렁해진 탓에 한순간에 툭 속마음이 나와 버렸다. 

    “빨리 돌아와요. 보고 싶단 말이에요.”

    -응, 그럴게. 조금만 기다려 줘.

    조명이 어두워서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제크론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 같았다. 

    잠시 후, 제크론이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당신이 보고 싶어. 무척.

    여전히 조명이 어두웠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확실히 보였다. 

    홍당무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잘생긴 얼굴이.

    두근두근, 심장이 제 존재를 드러내며 작게 뛰었다. 

    *   *   *

    제나 핸더슨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꾸만 짜증이 치밀어 올라 이불을 팡팡 찼다.

    대체 왜 윌트슨 공작 부인과 관련된 일이라면 이렇게 이성을 잃고 화가 나게 되는 걸까.

    스스로도 이해가 쉽지 않았다. 

    언제나 이성을 잃는 쪽은 메리엔이었고, 저는 침착한 쪽이었다. 

    그런데 오늘도 메리엔에게 잔뜩 성질을 부렸다. 

    ‘물론 메리엔이 멍청한 실수를 저지른 건 맞지만 그 애가 실수를 저지르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그 애가 멍청한 걸 몰랐던 것도 아니고. 대체 왜….’

    화를 이기지 못한 그녀는 결국 이불을 물어뜯기까지 했다. 

    찌직, 실크로 만든 고급 천이 날카로운 이빨이 찢겨 나갔다. 

    이제까지 언제 어디서든 모든 상황을 제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들여다보며 통제할 수 있었다. 

    영리한 두뇌, 매력적인 외모, 화려한 언변, 다양한 경험 덕분에 이룬 성과였다. 

    “분위기를 주도하는 능력,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은 대단한 재능이란다, 제나. 그러니 훗날 제국을 위해 크게 쓰일 날이 있을 게다.” 

    아버지께서 늘 하셨던 말씀이었다. 

    제국을 위해 쓰인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처럼 가벼운 모임에서의 분위기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 

    조무래기 외톨이인 줄 알았던 윌트슨 공작 부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니, 제대로 하지 못한 게 아니라, 아예 조금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윌트슨 공작 부인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갔다. 

    등장부터가 그랬다. 

    ‘이렇게 바로 올 줄이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 받았다. 

    으윽…. 고통의 침음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존재감이 희미했던 여자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저런 일을 꾸미더니 그녀 주위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의 그 여자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진 그저 짐작만 했지만 오늘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야 말았다. 

    ‘그 따위 여자가 남편 이름만 믿고 까부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어. 사람에게는 각자 어울리는 자리가 있고 맞는 옷이 있는 거야.’

    남의 자리를 탐하고, 남의 옷을 욕심내면 안 된다. 

    그러면 세상의 질서가 무너지고 혼돈이 찾아올 것이다. 

    제나의 붉은 입술이 뒤틀렸다. 

    “당신은 당신에게 어울리는 자리에서, 당신에게 맞는 옷이나 입고 찌그러져 있어!”

    천장 어딘가를 노려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매섭게 희번덕거렸다.

    서두르면 안 된다. 

    천천히 기초부터 쌓아 올려야 한다. 

    시간은 많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느릿느릿 꾸물거려서는 안 된다. 

    “먼저… 약점부터 찾아야 해. 분명 있을 거야, 감출 수 없는 약점이.”

    제나는 혼잣말을 읊조리며 미소를 지었다. 

    흐린 달빛을 받은 미소는 무척 섬뜩했다. 

    *   *   *

    다음 날, 나는 곤경에 빠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테이블 위에 놓인 편지 봉투를 노려봤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봉투 위에 적힌 발신인의 이름을 노려봤다. 

    로저먼드 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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