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7/142)
  • 67화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도론 공녀였다. 

    앙다문 어금니에 잔뜩 힘이 들어갔는지 발음이 조금씩 뭉개졌다. 

    “응접실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윌트슨 공작 부인.”

    “네, 기다리고 있었는데 집사장이 여기로 안내해 줬어요.”

    이 일로 집사장은 비난을 받게 될까? 

    미안하지만 남 걱정은 잠시 넣어 두기로 했다. 

    핸더슨 공녀가 도론 공녀의 손을 잡아끌며 제지했다. 

    ‘이제 됐고, 내가 상대할게.’와 비슷한 신호를 보내면서. 

    핸더슨 공녀의 입매 끝이 스르륵 올라갔다. 

    그녀는 우리 일행의 면면을 한 명씩 차례로 보면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윌트슨 공작 부인, 메릴 선생님, 디아브 백작 부인, 프렛 백작 부인, 데이비스 자작 부인, 그리고 주치의 선생님. 그런데 이 분은 성함이…?”

    “안녕하십니까, 핸더슨 공녀님. 저는 브렌트 투치입니다. 현재 윌트슨 공작성에서 머무르면서 초상화 작업 중입니다.”

    티 테이블 주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브렌트의 이름을 듣고 흡, 헛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최근 1년 사이 인기가 급부상한 화가를 직접 보게 돼서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랬다. 

    원래는 나와 메릴 선생님만의 병문안 일정이었는데, 상황이 급변해 버렸다. 

    먼저는 디아브 백작 부인 일행이 공작성으로 되돌아온 것부터 시작이었다. 

    도론 공녀가 일정보다 한 시간 일찍 온 것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돼서 돌아왔다고 했다. 

    역시 사교계에서 잔뼈가 굵은 부인들다웠다. 

    “우리도 함께 갈게요. 이럴 땐 일단 쪽수부터 채워야 해요!” 

    디아브 백작 부인이 두 눈에 불을 켜며 외쳤다. 

    그래서 응접실에 앉아 도론 공녀 일행의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십니까, 부인들. 브렌트 투치입니다.” 

    브렌트가 상큼한 인사와 함께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좀 전 요소킨 운동 참관에서 느꼈던 점을 얘기하면서 부인들의 대화에 위화감 없이 스며들었다. 

    “가만 있자, 투치 씨도 우리와 함께 핸더슨 공녀의 병문안을 가는 게 어때요?” 

    “맞아요. 공녀도 여자 손님들만 와글와글 맞이하는 것 보다야 이렇게 젊고 유능한 화가 친구를 보면 더 좋아할 거예요.” 

    “그래도 될까요? 이거 정말 영광입니다. 제가 작품 경력이 그리 길지는 않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신하거든요.” 

    “그게 뭔가요?” 

    “귀족 저택에 방문할 수 있는 기회는 무조건 잡아야 한다!”

    “어머나, 정말 명언이네요!” 

    동행을 원하는 부인들의 청에 특별히 바쁜 일이 없었던 브렌트는 흔쾌히 승낙했다. 

    초상화 작업을 위해 공작성에 머물고 있는 그가 ‘특별히 바쁜 일이 없다’는 말이 살짝 걸렸지만 부드럽게 넘어가기로 했다. 

    게다가 나의 외부 일정에는 무조건 동행하라고 했던 제크론의 명령 때문에 주치의 매튜도 함께 왔다. 

    이런 이유로 핸더슨 공녀의 병문안 일정에 총 일곱 명이 우르르 몰려가게 됐던 것이다. 

    아니, 디아브 백작 부인과 내 배 속의 아이까지 합치면 아홉이었다. 

    저쪽보다 훨씬 우세한 숫자였다. 

    ‘디아브 백작 부인의 말이 맞았어.’

    일단 쪽수에서 밀리지 않으니 마음이 놓였다. 

    승리자의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지그시 깨물어야 했다. 

    그래도 명색이 병문안을 온 것이니 정중하고 단정한 표정 관리가 필수였다. 

    우리들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메릴 선생님이었다. 

    “핸더슨 공녀,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서 수업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많이 걱정했어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핸더슨 공녀는 난처한 기색을 애써 숨기며 방긋 웃으며 답했다. 

    “네, 보시다시피 친구들이 병문안 와 준 덕분에 기분 전환도 되고 많이 괜찮아졌답니다.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핸더슨 공녀는 ‘병문안’이라고 말할 때 목소리 크기를 교묘히 줄였다. 

    디아브 백작 부인이 핸더슨 공녀의 손을 살포시 잡으며 말했다. 

    “핸더슨 공녀는 병문안 와 주는 친구들도 많아서 좋겠어요. 이러니 아플 맛이 나겠네요. 아, 그렇다고 해서 계속 아프라는 소리는 아니랍니다. 아프지 마세요, 공녀.”

    핸더슨 공녀와는 반대로 디아브 백작 부인은 ‘병문안’이라고 말할 때 목소리 크기를 교묘히 높였다. 

    저 뒤에 앉아 있는 손님들도 다 들릴 정도로 크게. 

    디아브 백작 부인의 의도는 제대로 먹혀들었다. 

    멀뚱히 앉아 있던 손님들이 ‘뭐야, 제나가 아팠어? 언제?’, ‘나는 그런 줄도 몰랐네.’, ‘아픈 줄 알았으면 술을 권하지 않는 거였는데.’, ‘그런데 진짜 아픈 거 맞아?’, ‘완전 멀쩡해 보이는데.’, ‘그러게, 평소보다 더 기운 차 보이는데.’ 등등 저들끼리 소곤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다 들렸다. 

    그들을 등지고 서 있던 핸더슨 공녀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그녀의 가느다란 눈썹이 화를 이기지 못하고 씰룩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훗날 제국의 외교에 거대한 한 축으로 성장할 인재였다. 

    이 정도의 난관쯤은 어렵지 않게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나는 빠른 속도로 달아올랐다가 다시 빠른 속도로 가라앉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마침내 입꼬리를 잔뜩 끌어올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자, 이대로 서 있지만 말고 자리에 앉으세요. 어서요.”

    목소리 톤이 한껏 높아져 있어 언뜻 명랑하게 들렸으나, 그 끝이 조금 떨렸다. 

    역시 빈번하게 다양한 손님들을 맞이하는 핸더슨 공작가답게 하인들과 하녀들이 집사장의 지시에 따라 새로운 손님들을 위한 티 테이블을 세팅하고 있었다. 

    하인들은 새로운 테이블과 의자들을 가지고 왔고, 하녀들은 디저트와 찻주전자가 가득 든 트롤리를 끌고 왔다. 

    마련된 티 테이블에 모두 자리 잡고 앉자 모임의 규모가 단번에 커졌다. 

    핸더슨 공녀의 맞은편에 앉은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아프다고는 했지만… 제가 티 파티에 참석할 수 없다는 편지를 보내서, 그래서 기분이 상한 줄 알고 걱정했어요. 그래서 요소킨 운동 수업에도 안 나왔나 걱정했어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다시 저쪽 무리에서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무슨 말이야.’, ‘초대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초대하지 않았다더니.’, ‘초대했나 봐, 그런데 윌트슨 공작 부인이 거절했고.’, ‘말이 다 앞뒤가 맞지 않잖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젊은 귀족들은 단번에 어리둥절한 얼굴이 됐다. 

    처음엔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는데, 이젠 듣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잊었는지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모르긴 몰라도, 여기 손님으로 참석한 젊은 귀족들은 평소 핸더슨 공녀에게 환심을 사고 싶었으리라.

    핸더슨 공작가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하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공녀가 약점을 보이자마자 바로 등을 돌리는 꼴이 우스웠다.

    적어도 오늘 이 자리에 먼저 있던 손님들은 핸더슨 공녀의 진정한 편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그래서 내겐 참 다행인 일이었지만 말이다. 

    핸더슨 공녀는 저들쪽으로는 아예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끝내 못 들은 척할 심산인 모양이었다. 

    그녀가 다시 입꼬리를 바짝 끌어올렸다.

    하지만 얼굴 근육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지 한쪽 입가가 연신 움찔거리며 떨렸다. 

    핸더슨 공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자, 의도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모였으니 짧게나마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씩씩하고 쾌활한 어조였다. 

    역시 크고 작은 사교 모임의 호스트 역할을 많이 맡았던 그녀였기에 난감한 상황에서의 임기응변이 무척 능했다. 

    청산유수 같은 그녀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아침부터 기분이 가라앉고, 몸 상태가 무척 저조했어요. 그런데 잊지 않고 날 찾아와 준 친구들 덕분에 그리고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와 준 요소킨 운동 식구들 덕분에 이제는 완전히 회복된 것 같아요.”

    어쩜 거짓말을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막힘없이 잘 할까.

    나는 피식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겨우 눌러 담으며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이번 기회에 서로 많은 이야기 주고받으면서 새로운 인연을 쌓으시길 바랍니다.”

    말을 마친 핸더슨 공녀는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환했지만 미묘하게 어색한 미소였다. 

    사교계 최상위층의 삶을 살아내는 그녀가 대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때였다. 

    우리의 순수한 메릴 선생님은 여전히 핸더슨 공녀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메릴 선생님이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며 말했다. 

    “공녀, 정말 괜찮은 거 맞나요? 아픈데 괜히 우리가 우르르 몰려와서 공녀를 쉬지 못하게 만든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전 이제 정말 괜찮다고요.”

    핸더슨 공녀의 인내심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금니를 워낙 세게 물어서 발음이 뭉개졌다. 

    그때였다. 

    처음 보는 영애들이 내게 말을 붙여왔다. 

    “윌트슨 공작 부인,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영광이에요. 소문으로는 많이 들었지만 공작 부인을 직접 뵌 적이 없어서 늘 궁금했었거든요.”

    “몸도 무거우신데 뎀프샤에서 수도까지 병문안을 와 주시다니 대단하세요.”

    내게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핸더슨 공녀를 약 올리기 위함 같았다. 

    적당히 장단을 맞춰 줄 작정이었던 나는 배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무거운 몸이라 괜히 파티에 참석해서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까 봐 참석 못 하겠다고 했는데… 걱정되더라고요. 혹시 핸더슨 공녀가 곡해할까 봐요.”

    “어머, 그럴 리가 있나요. 공작 부인께서 아직 핸더슨 공녀를 잘 몰라서 그러신 것 같은데, 공녀는 그렇게 속 좁은 사람이 아니랍니다. 저는 그렇게 믿어요. 그렇죠, 핸더슨 공녀?”

    “…물론이죠.”

    한 영애의 물음에 핸더슨 공녀는 싱긋, 웃으며 짧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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