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운동 후, 현관에 나와 부인들을 배웅할 때였다.
저 멀리 진입로를 가로질러 달려오는 마차를 보며 기다리고 있는데, 메릴 선생님이 갑자기 생각난 듯 외쳤다.
“참, 수업 하나가 더 생길 것 같아요!”
“어머, 좋은 소식이네요!”
“잘됐어요, 선생님!”
“축하드려요!”
부인들의 축하 인사가 이어졌다.
디아브 백작 부인이 봉긋 솟은 배 위에 손을 다소곳하게 얹은 채 입을 열었다.
“벌써 운동 수업이 세 개나 생기다니! 이러다가 윌트슨 공작성에 매일 운동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거 아닌가 몰라요!”
“그러면 안 되고, 그럴 리도 없겠지만…. 정말 기분 좋은 상상이네요!”
메릴 선생님이 얼굴을 붉히며 호호, 웃었다.
나는 메릴 선생님의 손을 꼭 쥐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 없다니요! 곧 그런 날이 올 거예요. 귀부인들 모두가 요소킨 운동 수업을 듣고 싶어 하는 날 말이에요.”
“정말 그러면 좋겠네요. 모든 게 다 윌트슨 공작 부인 덕분이에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을 때, 마차가 도착했다.
하지만 우리가 기다리고 있던 빈 마차가 아니었고, 도론 공녀 일행이 탄 마차였다.
“어머, 수업 시간이 되려면 한 시간이나 더 남았는데, 일찍 도착하셨네요!”
메릴 선생님이 어린 영애들을 반갑게 맞았다.
하지만 나는 별로 반갑지 않았다.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순간 얼굴 근육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색해서는 절대 안 되는 마음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공작성을 찾아 준 손님이었으니 말이다.
도론 공녀 일행이 내린 마차에 디아브 백작 부인 일행이 올라탔다.
친구들을 태운 마차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착잡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메릴 선생님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핸더슨 공녀가 안 보이네요?”
“오늘은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저런…. 어디 건강이 안 좋은 건 아니죠?”
메릴 선생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 뒤에 바로 들려오는 도론 공녀의 목소리는 바짝 날이 서 있었다.
귀에 거슬릴 정도로.
“저도 아직 만나 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어요. 건강이 안 좋은 건지, 아니면 기분이 안 좋은 건지 말이에요.”
도론 공녀의 은근한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시선의 의미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감히 너 따위가 티 파티 초대에 불응해서 기분이 상한 거잖아!’라고 외치는 시선이었다.
유치했다.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나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티 테이블을 바로 세팅하라고 하녀들에게 일러둘게요.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네, 공작 부인, 어서 들어가서 쉬세요.”
메릴 선생님은 활짝 웃으며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도론 공녀는 아직 날 놔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녀의 냉랭한 목소리가 귓등을 때렸다.
“공작 부인.”
나는 천천히 몸을 들려 도론 공녀를 봤다.
공녀의 두 친구들 역시 그녀 옆에 딱 붙어선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 영애의 입매는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그렇지 못했다.
가늘어진 눈에 바짝 날이 서 있었다.
‘뭐야, 한번 해보겠다는 거야, 뭐야?
순간 화가 솟구쳤지만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나는 입을 열었다.
우아한 목소리를 만들려고 노력하면서.
“무슨 일이시죠, 도론 공녀?”
“이렇게 운동은 하시면서, 건강상의 이유로 티 파티 참석은 어렵다고 하시니… 서운했어요.”
도론 공녀가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했다.
서운하다고는 했지만 그녀의 눈동자 안에 담긴 것은 서운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것은 경멸 비슷한 것처럼 보였다.
곁에 섰던 다른 두 영애들도 가세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핸더슨 공녀의 체면도 있는데.”
“그러지 마시고, 잠깐만이라도 들러 주시지 그러세요, 네?”
“…….”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대체 뭐 하자는 거지?
싸우자는 건가?
1 대 3으로?
처음부터 작정하고 다 같이 달려드는 꼴이 우스웠다.
이 와중에 도론 공녀는 서늘한 눈빛을 한 채 팔짱을 끼고 내 반응을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자 어린 영애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재잘재잘, 딱 듣기 싫은 정도의 목소리로.
“이렇게 윌트슨 공작성에서 새로운 운동도 하게 돼서, 그래서 기쁘고 감사한 마음에 초대한 것일 텐데 말이에요.”
“티 파티에 오시는 게 정 힘드시면 병문안은 어떠세요?”
에엥?
병문안이라고요?
그런 건 서로 가까운 사이에 가는 거 아닌가?
몇 번 만난 적도 없는 핸더슨 공녀의 병문안을 내가 왜 간단 말인가?
게다가 그녀는 아프지 않은 게 뻔했다.
“나는 별로….”
“제가 갈게요!”
그때였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메릴 선생님이 불쑥 외쳤다.
“저도 핸더슨 공녀가 무척 걱정되는데, 공작 부인 대신 제가 병문안을 가도 괜찮을까요?”
“아….”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어린 영애들의 뇌가 삐걱거리는 듯했다.
그녀들은 도론 공녀의 눈치만을 살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우스운 상황에 나는 웃음을 삼키며 도론 공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녀의 한쪽 입술 끝이 씰룩거리는 게 보였다.
당황한 모양인 것 같았다.
“잘됐네요. 메릴 선생님과 윌트슨 공작 부인, 두 분이서 함께 와 주시면 너무 감사할 것 같아요. 제나도 무척 좋아할 거예요.”
메릴 선생님은 분명히 내 대신 방문하겠다고 했는데 굳이 나를 꼭 넣으려는 도론 공녀의 의지가 매우 돋보였다.
도론 공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곁에 섰던 영애들이 ‘맞아요, 맞아.’라고 말하며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
이 여자들은 날 끝까지 놔주지 않을 것 같았다.
슬슬 어처구니없는 기 싸움에 질려 갔다.
내 소중한 시간과 소중한 에너지를 이런 곳에 쓰고 싶지 않았다.
“좋아요. 메릴 선생님과 함께 병문안 갈게요.”
“괜찮으시겠어요, 공작 부인?”
저 혼자 가려고 했던 건데, 메릴 선생님이 걱정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나를 봤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불순한 의도가 뻔히 보이는 초대에 메릴 선생님만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메릴 선생님과 둘이서 함께 간다면 분명 괜찮으리라.
도론 공녀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기분 나쁜 미소였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그럼 조만간 뵐게요.”
“아뇨. 괜찮으시다면 오늘 바로 찾아뵙고 싶어요.”
내가 재빨리 말하자, 도론 공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오늘이요?”
“네, 병문안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거 아니겠어요? 저도 하루가 다르게 배가 불러오고 있으니 오늘이 가장 몸을 움직이기 편한 날이기도 하고요.”
하기 싫은 일은 단번에 해치우는 게 나았다.
뒤로 미루면 미룬 만큼 괴로워지리라.
나는 메릴 선생님을 보며 물었다.
“메릴 선생님은 어떠세요? 혹시 이후에 다른 일정이라도 있으세요?”
“아니요. 저도 오늘 수업 후 바로 가면 좋을 것 같아요. 정말 좋은 생각이세요, 공작 부인. 역시!”
“뭘요. 이 정도 가지고.”
나는 메릴 선생님과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대화를 나누며 도론 공녀 쪽을 힐끔 쳐다봤다.
그녀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져 있었다.
‘세상은 네 뜻대로만 되는 곳이 아니란다, 아가야.’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발걸음을 옮겼다.
기억에 남는 병문안을 가기 위해서 준비하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시간을 빠르게 만들어 주는 마법 아닌 마법 같은 일정이 되리라.
* * *
세 시간 뒤, 핸더슨 공작저의 후원.
제나는 메리엔을 향해 두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목소리는 높일 수 없었는데, 다른 보는 눈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나는 어금니에 지그시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메리엔,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오늘 바로 데려오면 어떡해!”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오늘밖에 안 된다고 했단 말이야. 내일은 몸이 더 무거워진다나 뭐라나!”
제나의 반응은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메리엔의 얼굴에는 난색이 떠올랐다.
엘프윈 일행은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병문안 일정은 이쪽에서 정해서 전달할 생각이었다.
저쪽에서 먼저 이렇게 급하게 방문하겠다고 할 줄은 꿈에도 예상 못했다.
‘윌트슨 공작 부인! 저 여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 마음에 안 들 생각인가 봐!’
제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메리엔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전면전이지.”
“손님들은 어쩌고?”
“손님들?”
메리엔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본 제나는 그제야 제가 친구들과 티타임 중이었음을 깨달았다.
윽, 아프다고 했는데 손님까지 초대해서 티타임 중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거짓말했던 게 들키고 만다.
먼저 이 친구들을 치워야 했다.
제나는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친구들을 향해 고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만 시간이 늦었는데, 오늘 티타임은 여기서 그만….”
제나는 시작한 말을 미처 끝맺지 못했다.
집사장의 안내를 받으며 후원 안으로 걸어오는 엘프윈 일행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뭔 사람이 저렇게 많아?’
제나는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메리엔을 노려봤다.
상황 설명을 원하는 시선이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됐어.”
* * *
10분 전.
핸더슨가의 저택에 들어오기 무섭게 도론 공녀는 기다리라는 말만을 남기고 쌩하니 달려갔다.
핸더슨 공녀에게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어린 하녀의 안내를 받고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집사장이 곁으로 다가와 공손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엘프윈 윌트슨입니다. 핸더슨 공녀를 만나러 왔습니다.”
“윌트슨 공작 부인이시군요. 공녀님께서는 지금 후원에 계십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집사장의 안내에 따라 우르르 몰려갔다.
아프다고 했던 핸더슨 공녀는 후원에 있는 모양이었다.
후원에 나와 있을 정도면 크게 아픈 것은 아니리라.
‘아니면 아예 아픈 게 아니거나.’
예상은 했지만 사실로 판명되고 나니 다시 짜증이 올라왔다.
저 멀리 분수대 옆에 비치된 널따란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는 각양각색의 디저트들로 채워져 있었고, 그 주위에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젊은 귀족들이 앉아 있었다.
남녀 다 합쳐 대여섯 명 정도였다.
그리고 다가오는 우리에게로 향한 놀란 눈의 핸더슨 공녀가 있었다.
옆에 선 도론 공녀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