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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65/142)
  • 65화

    다음 날 늦은 오전.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브렌트는 까치집 머리를 한 채 늦은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윌트슨 공작성에서의 브렌트의 위치는 고용인 반, 손님 반이라서 해야 할 일을 성실히 하고 있으면 그 외의 것들은 공작성에서 친절히 제공해 주었다. 

    식사와 후식이 제공되는 것은 물론이었고, 청소와 빨래 그리고 널따란 성과 정원을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까지 주어졌다. 

    벌써 보름이 넘도록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전혀 질리지가 않았다. 

    될 수 있으면 좀 더 오랫동안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소고기 버섯 샐러드를 우걱우걱 씹고 있을 때였다. 

    식당에 난 커다란 창문을 통해 마차가 현관 앞에 서는 게 보였다. 

    네 명의 귀부인들이 마차에서 내렸다. 

    ‘아, 오늘이 운동하는 날이었구나. 이름이 뭐였더라. 요… 뭐였는데.’

    브렌트는 한 번 들은 것으로 완전히 외울 수 없었던 생소한 운동의 명칭을 떠올리려 애쓰며 무심히 창문 밖을 바라봤다. 

    마차에서 내린 귀부인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다 밝았다. 

    역시 일정하게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라 그런가 그들의 몸에서 즐겁고 건강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중 단연 으뜸인 사람은 손님들을 맞이하는 윌트슨 공작 부인이었다. 

    저 멀리 건물 밖에서 이어지는 대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리 없었지만 산새처럼 재잘거리는 공작 부인의 들뜬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친구 분들과 있을 땐 저런 표정을 지으시는군.’

    창문 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브렌트의 입이 자연스레 벌어졌다. 

    그때였다. 

    손님을 위한 차를 내가던 주디가 브렌트에게로 다가와 말을 붙였다. 

    공작성에서 일하는 고용인들 중 많은 사람이 이 젊은 화가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브렌트는 절반은 손님의 신분이었기에 스스럼없이 다가가 말을 걸 용기를 지닌 고용인은 많지 않았다. 

    주디는 용기가 있는 편이었다. 

    “다들 보기 좋으시죠?”

    “네? 아, 그렇습니다. 부인들이 모두 활기차십니다.”

    “맞아요.”

    주디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브렌트는 내내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공작성 전체가 1년 전에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새 많이 바뀌었더라고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어머, 무슨 일이라니요?”

    브렌트의 질문이 웃긴지 주디는 조신하게 입을 가리며 호호 웃었다. 

    그리고 바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특별한 일이라면… 아무래도 마님께서 임신하시고 출산 준비를 하게 되신 일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러면서 차츰 밝아지셨거든요.”

    “역시 그렇군요.”

    안주인의 분위기는 집안 전체 분위기와도 직결된다. 

    공작 부인의 분위기가 밝아지니 공작성 전체 분위기도 밝아진 것이리라. 

    “게다가 주인님도 달라지셨어요. 말수도, 웃음도 더 많아지시고요. 주인님과 마님, 두 분 사이도 무척 다정해지셨죠.”

    주디의 대답에 브렌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주디의 얼굴 전체에 싱글벙글 미소가 들어차 있었다. 

    브렌트가 주디 옆에 세워져 있는 트롤리를 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할 일이 있는 거 아닙니까?”

    “아, 이거요.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부인들께서 인사 나누시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으시고, 자리에 앉기까지 시간이 꽤 걸리거든요.”

    주디가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대답했다. 

    불현듯 브렌트는 귀부인들이 운동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실례일까, 괜찮을까, 잠깐 고민되기는 했지만 일단 질러 보기로 했다. 

    “저기… 부인들의 운동 수업을 참관해도 될까요?”

    “네? 참관이요? 운동 수업을요?”

    너무도 뜻밖의 질문이라 주디는 답할 말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간절한 눈빛의 브렌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주 잠시면 됩니다. 5분 정도요. 어떤 운동인지 직접 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아…. 마님께 여쭤보고 올게요.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감사합니다.”

    주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트롤리를 끌고 식당을 나섰다.

    브렌트는 상당히 들뜬 기분이 됐다. 

    그게 무엇이든 난생 처음 하거나 구경하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브렌트는 주디가 긍정의 답신을 들고 돌아오길 기다리면서 다시 소고기 버섯 샐러드에 집중했다. 

    그리고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정원에서 공작 부인의 미술 수업을 진행했다. 

    거창하게 말해 수업이지, 사실 놀이 반, 강습 반 정도의 시간이었다. 

    두 시간 동안 이어진 수업에서 공작 부인은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황금빛 햇살이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닿아 찬란히 부서졌다. 

    붓을 오랜만에 잡아 본다는 그녀의 눈빛은 무척 진지했고, 손놀림 하나하나 허투루 하는 게 없었다. 

    그날 공작 부인이 그린 것은 정원 구석에 놓여 있던 작은 분수대와 그 주위 배경이었다. 

    물론 부족한 실력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두 시간을 온전히 즐겼다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슬픔도 없고, 가슴 졸이는 기다림도 없는 시간. 

    웃음이 가득했고, 온 신경을 다해 집중하는 시간. 

    브렌트는 자신이 그 시간을 즐겼던 것만큼, 공작 부인도 충분히 즐겼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두 시간 후 그림이 완성됐을 때, 공작 부인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고마워요, 브렌트. 덕분에 좋은 취미 활동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아요. 앞으로 가끔 제 미술 선생님이 돼 주세요.” 

    “공작 부인의 미술 선생님이라니…. 영광입니다.”)

    “정말 시간이 빨리 흘렀어요! 역시 다 선생님 덕분이에요!”

    공작 부인의 들뜬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확실히 변했다. 

    1년 전에 만났던 공작 부인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당시 브렌트는 고위 귀족의 주문을 받은 적이 처음이라서 상당히 긴장했고 조금 흥분하기도 했다. 

    완전히 기대했었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곧 산산조각 났다. 

    처음으로 직접 대면해 본 고위 귀족가의 마님은 유난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몹시. 

    유난스러운 것뿐만 아니라 매사에 부정적이고 염세적이었다. 

    ‘이것은 이래서 싫다, 저것은 저래서 싫다, 매번 싫다, 싫다 소리를 연발했었지.’

    같은 공간에 앉아 그녀의 짜증을 듣는 일은 몹시 곤욕스러웠다. 

    으…. 과거를 떠올리는 지금도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넌더리가 났다. 

    물론 윌트슨 공작 부부의 초상화 작업 이후로 다양한 귀족가에서 작업을 의뢰해 준 덕분에 지난 1년 생활이 많이 폈다. 

    애초에 무명 화가였던 제게 흔쾌히 작업 의뢰를 맡긴 윌트슨 공작 부인 덕택이었다. 

    그래서 브렌트는 지난 1년간 괴로웠다. 

    윌트슨 공작 부인이 무척 고마웠지만 또 한편으로는 전혀 고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공작 부인과의 초상화 작업은 즐거웠다. 

    덤으로 공작성에서 지내는 것도 좋았다. 

    공작 부인과 오며 가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지극히 평온했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변하게 한 거지?’

    공작성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은 공작 부인이 임신하고, 출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성격이 많이 부드러워졌다고 했다. 

    하지만 정말 그게 다일까?

    젊은 화가의 호기심이 마구 요동쳤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정신을 차려 보니 테이블 앞에 주디가 서 있었다. 

    빙그레 웃는 주디의 표정에서 브렌트는 그녀의 다음 말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마님께서 허락하셨어요. 물론 선생님과 다른 부인들께서도요. 하지만 딱 5분만이라고 하셨어요.”

    “네, 5분으로도 충분합니다.”

    브렌트는 부푼 기대감을 안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   *   *

    허브티와 함께 하는 간단한 담소의 시간이 끝나고 막 운동을 시작하려 할 때였다. 

    끼익, 문이 열렸고, 주디와 함께 브렌트가 들어왔다. 

    눈이 마주친 엘프윈과 브렌트는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예의 바른 참관인답게 그는 발소리를 죽이며 살금살금 걸어 멀찍이 창가 옆에 자리를 잡고 섰다. 

    그의 손에는 작은 수첩이 들려 있었는데, 스케치를 할 생각인 것 같았다. 

    ‘역시 전문 화가네.’

    엘프윈은 빙그레 웃으며 그를 봤다. 

    작가는 본 것을 글로 기록하고, 화가는 본 것을 그림으로 기록하리라. 

    잠시 그에게로 향했던 시선을 엘프윈은 다시 메릴 선생님에게 집중했다. 

    메릴 선생님의 온화한 목소리가 운동실 가득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허리를 곧게 펴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십니다. 하나, 둘, 셋…. 자, 이제 천천히 뱉습니다.”

    평소에는 안 그렇겠지만 운동실 안에서만큼은 순종적인 수강생들은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숨을 쉬었고, 팔을 움직였고, 시선을 바꿨다. 

    선생님이 서두르지 않으니, 수강생들도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운동실 안의 모든 것이 더디게 흘러갔다.

    거기에 더해 저 멀리 1층 로비에서 연주되고 있는 실내악단의 음악 소리까지. 

    브렌트는 제 심장 고동이 점점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열심히 손을 놀리던 브렌트는 잠시 손을 멈췄다. 

    이렇게 완벽한 순간은 붙잡아 두려 애쓰기보다는 그 안에 온전히 스며들어 만끽해야 한다. 

    그는 수첩을 덮어 버렸다. 

    그리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메릴 선생님의 부드러운 음성에, 귀부인들의 우아한 몸짓에 집중했다. 

    지금 저를 자극하는 장면, 소리, 냄새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몸 어딘가에 저장하고 싶었다. 

    5분은 금방 흘러갔고, 브렌트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주디의 안내에 따라 운동실을 나서야 했다. 

    브렌트는 윌트슨 공작성이 점점 좋아져서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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