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142)
  • 64화

    “아…!”

    통신석에 비친 제크론의 모습에 너무 놀란 나머지 외마디 탄식이 크게 터져 나왔다. 

    내 예상이 맞았다. 

    그의 왼쪽 어깨에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꽤 넓은 면적이었고 꽤 두터웠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손가락 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한편 제크론은 별거 아니라는 듯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내 반응에 당황했는지 그의 짙은 눈썹이 일그러졌다. 

    -별로 깊지 않은 상처야. 이번 작전 끝나고 공작성에 돌아갈 때면 아마 흉터조차 남아 있지 않을걸?

    제크론은 난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변명 같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속절없이 벌어지는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제크론이 다쳤어! 소설 초반에 부상당한다는 내용은 없었던 것 같은데. 대체 왜!’

    원작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릿속이 뒤죽박죽 시끄러웠다.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원작대로 가고 있는 게 아니야? 아무리 원작이 뒤틀렸다고 해도 제크론은 주인공인걸? 이게 대체….’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쿵쾅쿵쾅, 심장이 아프게 뛰었다. 

    제크론이 작은 한숨을 내뱉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이렇게 걱정할까 봐 숨기려고 했던 거야. 미안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숨기려고 하면 안 됐는데. 

    “…….”

    -오히려 당신이 더 많이 걱정하게 만들어 버렸군.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진정하고 울지 마.

    “미안해요. 괜히… 유난 떨어서.”

    지금 더 힘든 것은 제크론일 터였다. 

    마물을 상대해야 하는 전쟁터에 있는 사람은 그였다. 

    늦은 밤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것은 그였다. 

    어쩌면 오늘도 있을 전투를 철저히 대비해야 하는 것도 그였다. 

    제크론 앞에서 눈물을 보여 그에게 근심을 안겨 줘서는 안 된다. 

    나는 숨을 참으며 눈물을 꾹 눌러 담았다.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니야. 고마워. 걱정해 줘서. 

    “…….”

    -날 위해 눈물을 흘려 주는 사람은 당신뿐이야. 고마워. 하지만 난 정말 괜찮으니까 걱정은 조금만, 아주 조금만 해 줘. 

    그의 잘생긴 얼굴에 싱긋, 청량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크론의 미소는 언제나 전염력이 강하다. 

    통신석을 통해 보는 미소인데도 내 입꼬리가 그를 따라 살포시 말려 올려갔다.

    *   *   *

    집사장이 매튜의 진료실을 찾았다. 

    “편지가 왔습니다, 선생님.”

    “아, 감사합니다.”

    여러 통의 편지가 매튜의 손에 전달됐다. 

    용무를 마친 집사장은 바로 나갔다. 

    혼자 남은 매튜는 천천히 편지 봉투를 살피며 발신인의 이름을 확인했다. 

    그런데 여러 통의 편지들 중 딱 하나의 편지에 적힌 발신인의 이름이 낯설었다. 

    “글렌 이스펀? 누구지?”

    낯선 이름을 여러 번 불러 보며 기억을 되살리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매튜는 재빨리 봉투를 뜯어 편지를 살폈다. 

    편지를 몇 줄 읽은 매튜는 바로 글렌 이스펀이 누군지 기억해 냈다. 

    그는 처비튼에서 만났던 나이 많은 의원이었다. 

    중독 치료 경험이 많다는 의원을 찾아갔던 매튜는 아르젠토 차 중독에 대해서 물었었다.

    매튜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열 장이나 되는 긴 편지에는 그동안 글렌이 치료했던 아르젠토 차 중독 환자들과 그 치료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환자 중에는 심신 미약한 젊은 귀족이 많았다. 

    10대 때부터 신경증을 앓아 왔기에 그 치료 수단으로서 복용하던 것을 끊지 못하고 결국 중독으로까지 이어지는 사례가 많았다. 

    편지를 끝까지 다 읽은 매튜는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기 시작했다. 

    몇몇 중요한 이야기들은 따로 수첩에 정리하기도 했다. 

    글렌이 언급한 환자는 대부분 공작 마님과 비슷한 상황의 환자였다. 

    공작 마님도 어렸을 때부터 아르젠토 차를 복용했다고 들었다.

    신경증 치료를 받던 중 의사에게 처방받고 마신 게 처음이었다고. 

    “흐음….”

    매튜는 한숨을 내쉬며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나라에서는 대부분 향정신성 약물의 사용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젠토 차는 그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래서 의사의 처방전이 있다면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가짜 처방전으로 차를 구하는 경우가 많고, 결국 중독 피해자가 많아진다는 거지.’

    쉽게 구할 수 있는 가짜 처방전. 

    쉽게 구할 수 있는 아르젠토 찻잎. 

    늘어 가는 중독 환자. 

    하지만 누구도 손을 쓰고 있지 않았다.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방관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원하는 대로 순순히 흘러가는 지금 이 상황을 기뻐하면서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끔찍한 생각이었다. 

    매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단 지금까지 파악한 상황에 대해서 보고할 필요가 있었다. 

    매튜는 재빨리 빈 편지지를 펼치고 깃펜을 들었다. 

    그리고 왕립 의료 학회에 보내는 보고서 형식의 편지를 길게 써 내려갔다. 

    그는 두 눈을 번뜩이며 집중했고, 깃펜을 쥔 손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   *   *

    나는 화가 브렌트가 지내고 있는 게스트룸에 왔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그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저런….”

    “네, 맞아요. 눈이 좀 부었어요. 그래서 오늘은 캔버스 앞에 앉지 못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공작 부인?”

    “그게….”

    나는 망설였다. 

    제크론의 부상에 대해서 타인에게 말하는 게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오늘 아침 신문에도 제크론의 부상에 대한 기사가 실린 것을 기억해 낸 나는 사정을 숨김없이 털어놨다.

    “그이가 부상을 당했다는 연락을 받아서요. 놀랐는지 눈물이 속수무책으로 흘러내리더라고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네, 하지만 큰 부상은 아니라고 해요. 곧 괜찮아질 거라고요.”

    “그래도 멀리서 기다리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걱정이 안 될 수가 없겠습니다, 공작 부인.”

    브렌트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직은 낯선 이 젊은 화가가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것 같아 위로가 됐다. 

    입꼬리가 절로 살짝 올라갔다. 

    “맞아요. 걱정돼서 미칠 지경이에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맑게 웃어 보였다. 

    브렌트의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어른거렸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공작 부인.”

    “내일은 초상화 작업에 꼭 참여할게요. 또 울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네, 부탁드립니다.”

    “그럼 쉬어요. 저는 남편을 기다리러 가 봐야겠어요.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흘러 기다리는 게 힘들지만요.”

    아직은 낯선 젊은 화가에게 한 번 위로 받았다고 금방 친밀감이 생겼던 것일까. 

    나는 농담조의 말을 내뱉고는 몸을 돌렸다. 

    그런데 브렌트의 목소리가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시간을 빨리 흐르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몰라 고개를 돌려 브렌트를 봤다. 

    그의 눈가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공작 부인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부인의 시간을 빠르게 흘러갈 수 있게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시도해 보시겠습니까?”

    “…….”

    순간 망설였다. 

    당연했다. 

    나는 브렌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시간을 빨리 흐르게 하는 방법이라니? 화가가 마법 주술 따위를 하는 건 아닐 테고…. 무엇을 하려는 걸까?’

    고민하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던 것일까. 

    푸후훗, 브렌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저런, 죄송합니다, 공작 부인.”

    “괜찮아요. 자, 이제 말해 봐요. 시간을 빨리 흐르게 하는 방법이 뭐죠?”

    “마님께서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십니까? 제가 개인 강습 경력도 있어서요. 마님께서 원하신다면 마님의 1일 강사가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그림…이요?”

    무척 솔깃한 제안이었다. 

    그림 그리기처럼 고상한 취미를 갖는 게 꿈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전생에서는 워낙 바쁜 매일을 살았던 탓에 이렇다 할 취미를 만들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뭐, 어차피 다 핑계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이번엔 그럴 듯한 핑계로 그림 그리기를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수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유명 인기 전문 화가에게 배우는 그림은 뭐가 달라도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나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전문가에게 그림을 배울 수 있다니 영광이에요.”

    “윌트슨 공작 부인을 가르쳐 드릴 수 있다니 제게 영광이죠.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날씨가 좋으니 정원에서 작업해 볼까요?”

    “어머, 좋은 생각이에요.”

    들뜬 기분이 됐다. 

    난생 처음 전문가에게 받게 되는 미술 수업이라니. 

    저녁에 제크론과 통신할 때 자랑할 거리가 생겼다는 생각에 흥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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