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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6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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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화

    결국 참다못한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설렁줄을 당겨 하녀를 불렀다. 

    숙직 중인 하녀가 바로 달려왔다. 

    “부르셨어요, 마님?”

    “잠이 잘 안 와서… 차 한 잔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호다닥 침실을 나섰던 하녀는 찻주전자와 찻잔을 들고 돌아왔다. 

    내가 좋아하는 사과 파이도 보였다. 

    하녀는 몸도, 눈치도 빨랐다. 

    “여기 있습니다, 마님. 심신 안정을 돕는 차입니다.”

    “고마워.”

    “혹시 더 필요한 게 있으세요, 마님?”

    “아니야. 이제 됐어.”

    “그럼 편히 쉬십시오. 더 필요한 게 생기시면 호출해 주세요.”

    “그럴게.”

    단정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하녀는 바로 침실을 나섰다. 

    오늘 숙직인 하녀가 케이트나 주디였다면 몇 마디 더 붙여 볼 텐데.

    좀 아쉬웠다. 

    하지만 늦은 시간, 아직 낯선 하녀를 붙잡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만큼 나는 얼굴이 두껍지 못했다. 

    호로록, 따뜻한 차가 식도를 타고 부드럽게 넘어갔다. 

    기분이 한결 괜찮아졌다. 

    “제크론은 괜찮을 거야. 내일 환하게 웃으면서 잘 잤냐고 묻겠지, 뭐.”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친구에게 얘기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효과는 있었다. 

    누군가에게 위로받은 사람처럼 바로 안정감이 찾아왔다. 

    “그래, 좋은 생각만 하자, 좋은 생각만!”

    봉긋하게 솟은 배를 쓰다듬으며 다시 차를 홀짝 마셨다. 

    “아리도 아빠 보고 싶지? 조금만 참고 기다리고 있어. 그러면 아빠가 내일 아침 연락하실 테니까 말이야.”

    마치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배 속에서 태동이 느껴졌다. 

    요즘은 시도 때도 없이 태동이 느껴졌다. 

    활발한 아이였다. 

    후훗,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 나왔다. 

    “너는 아빠를 닮아서 무척 건강한 아이란다. 엄마는 다 알지. 암, 알고말고.”

    사실 확실히는 몰랐다. 

    원작에서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나긴 한다. 

    하지만 엄마를 잃은 아이는 곧 제크론의 부모님에게 보내지게 되고 거기서 자란다. 

    나랏일과 영지 일로 바쁜 제크론이 혼자서 아이를 양육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그래서 제크론과 엘프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에 대한 내용은 별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래도 엄마는 알아. 너는 무척 건강하고, 무척 특별한 아이일 거야.”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가슴은 무거워졌다. 

    어쩌면… 엄마 없이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니 눈가에 뜨거운 열기가 몰렸다. 

    배를 쓰다듬는 손가락도 잘게 떨렸다. 

    “아가, 엄마가 미안해…. 이런 안 좋은 생각, 우리 아리한테도 안 좋을 텐데 말이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하지만 무거워진 가슴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점점 아래로 침잠했다. 

    투두둑, 굵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엄마가 정말 왜 이럴까. 주책이야, 진짜.”

    손등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요즘 이런 날들이 많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더 없이 행복했다가 바로 다음 순간 지옥 같은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이게 다 호르몬 때문이야.’

    잘못은 호르몬이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견뎌 내는 것은 순전히 내 몫이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나왔다. 

    후두둑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도 나는 호로록 차를 마셨다. 

    심신 안정에 좋다는 차가 효능을 발휘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지만 기분은 금세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남들에게 말 못할 것들로 기분이 울적해질 때는 일기를 써 보는 게 좋다는 주치의 매튜의 말이 생각났다. 

    스르르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침실과 연결된 작은 서재로 갔다. 

    그리고 엘프윈의 일기장을 꺼내 빈 페이지를 폈다. 

    깃펜을 잡은 손이 흰 종이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두려움과 슬픔이 봇물 쏟아지듯 흘러나왔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나는 일기장을 빼곡히 채워 나갔다. 

    *   *   *

    “하아, 하아…. 하아….”

    제크론은 마물의 몸에서 떼어 낸 심장에 또다시 칼을 꽂으면서 가쁜 숨을 내쉬었다. 

    초록색의 진득한 피가 얼굴에 튀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역시 한밤중의 전투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상대하는 녀석들도 낮에 만났던 녀석들처럼 숨통을 끊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병사들은 고전 중이었다. 

    여기저기서 병사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제크론은 이를 꽉 물고 목표물을 향해 달렸다. 

    아직 쓰러트려야 할 마물이 많았다. 

    재빨리 달려간 제크론이 마물의 목을 내려치려고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피로가 쌓였던 것일까. 

    그의 팔보다 마물의 팔이 더 빨랐다. 

    마물의 거대한 발톱이 제크론의 어깨를 인정사정없이 할퀴었다. 

    “으윽!”

    불타는 것과 같은 고통이 어깨를 강타했다. 

    뜨거운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아직 물러서기에는 일렀다. 

    그는 어깨를 마물에게 내주는 대신 그대로 검을 휘둘러 마물의 목에 칼을 박아 넣었다. 

    ‘…약해!’

    칼을 박아 넣는 데는 성공했지만 두꺼운 목을 완전히 베지는 못했다. 

    힘이 부족했다. 

    “캬아아아앙!”

    마물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치자 제크론의 몸이 나가떨어졌다. 

    “각하!”

    병사들이 바로 달려왔고, 제크론이 끝내지 못한 공격을 이어 갔다. 

    접전 끝에 결국 마물의 육중한 몸은 힘없이 쓰러졌다. 

    조쉬가 재빨리 쓰러진 제크론에게 다가섰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아.”

    하지만 제크론의 상태는 그의 말처럼 괜찮지 않았다. 

    날카로운 발톱이 할퀴고 간 자리는 깊이 파여 있었고, 많은 양의 피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피를 많이 잃은 탓에 핑, 머리가 돌았지만 제크론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황은 거의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제크론이 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난 괜찮으니, 저기 마지막 녀석을 처리하고 와, 조쉬.”

    “하지만… 네, 알겠습니다, 각하.”

    잠시 망설이던 조쉬는 제크론의 명령에 따랐다. 

    제크론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전투 현장을 바라봤다. 

    피와 살점 그리고 비명이 난무하는 현장은 끔찍했다. 

    그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속전속결로 끝낼 계획이었던 이번 토벌 작전은 예상처럼 빨리 끝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진화한 마물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마물이 진화라니.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여러모로 수상했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눈을 뜨자마자 거울로 달려갔다. 

    “아… 역시. 큰일이다!”

    간밤에 눈물을 흘린 탓에 두 눈이 탱탱 부어 버렸다. 

    분명 오전 중으로 제크론에게서 연락이 올 텐데, 이런 얼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얼른 케이트를 불러 얼음물을 가져오게 했다. 

    케이트는 내게 왜 울었는지 묻지 않았다. 

    내가 대답하기 곤란해할 만한 것들은 애초에 묻지 않는다. 

    고맙게도. 

    나는 그녀의 사려 깊은 태도가 좋다. 

    차가운 물수건을 눈에 대고 침대에 누웠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그래도 곧 제크론의 모습을 본다는 생각에 기뻤다. 

    나의 아침은 바빴다.

    눈가의 붓기를 빼고, 아침 식사를 하고, 씻고, 옷을 갈아입고, 제크론의 통신을 기다렸다. 

    테이블 위에 놓인 통신석을 노려보고 있는데, 마침내 장치가 번쩍번쩍 불빛을 발했다. 

    나는 재빨리 장치를 들었다. 

    “제크론!”

    -엘프윈, 잘 잤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어젠 전투가 늦게까지 이어져서 말이야.

    “이해해요. 다친 데는 없어요?”

    나는 제크론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피며 물었다. 

    다행히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그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나는 멀쩡해. 그러니 걱정 마. 그나저나 당신은? 몸 괜찮아? 아픈 데는 없고?

    “난 괜찮아요. 매튜도 괜찮다고….”

    제크론의 입에서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을 열심히 하는데 갑자기 그의 모습이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는 평소와 달리 로브를 걸치고 있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당신… 로브를 걸치고 있네요.”

    -아…. 좀 쌀쌀해서.

    아무래도 산속이니 아침, 저녁으로 좀 더 추울 터였다. 

    그런데 이제까지 괜찮았다가 갑자기 춥다고?

    게다가 그의 표정도 왠지 어색하게 굳는 것 같았다. 

    나는 눈매를 좁히며 그를 찬찬히 뜯어봤다. 

    어딘가 자연스럽지 않았다. 

    -당신 오늘 일정은 어떻게 되지? 위든은 잘 있나? 어제도 같이 산책했고?

    갑자기 이것저것 묻는 제크론의 말이 빨라졌다. 

    마치 화제 전환을 꾀하는 것처럼 말이다. 

    역시 수상했다. 

    “당신 로브 좀 벗어 볼래요?”

    -로…브는 왜? 갑자기?

    “그냥 뭐 좀 확인하려고요.”

    -춥다니까 그러네.

    하, 하하…. 제크론은 어색하게 웃으며 로브의 앞섶을 단단히 여몄다. 

    팔의 움직임이 좀 어색했다.

    게다가 움직일 때 잠깐이었지만 그의 미간에 주름이 생기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어서요. 당신이 확인해 주지 않으면 난 걱정돼서 앞으로 잠을 한숨도 못 자게 될지도 몰라요.”

    눈매와 목소리가 둘 다 동시에 뾰족해졌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제크론은 하아, 한숨을 뱉어내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걸치고 있던 로브를 스르르 벗었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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