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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62/142)
  • 62화

    군대의 공격은 성공적이었지만 거대한 마물들의 숨통을 끊어 놓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게다가 마물들은 죽음에 임박했을 때 마지막 힘을 끌어 모아 폭주하는 특성이 있으므로 끝날 때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이번엔 반대편 쪽에서 대기 중이던 다른 무리의 기마병들이 긴 창을 단단히 쥐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몇몇 마물들은 거대한 손톱으로 달려오는 말을 할퀴었고, 또 몇몇은 날카로운 이빨로 말을 물어뜯었다. 

    마물들의 반격에 쓰러지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공격!”

    제크론이 혼신의 힘을 다해 크게 외쳤고, 와아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모든 군사들이 검을 빼들고 마물들에게 달려들었다. 

    마물의 숨통을 완전히 끊기 위해서는 목을 완전히 베거나, 심장에 정통으로 칼을 꽂아야 한다. 

    병사들은 늘 연습했던 대로 여럿이서 재빨리 조를 이루어 마물을 상대했다. 

    대여섯 명의 병사들이 마물의 팔다리를 공격하면, 나머지 한 명이 심장을 조준하는 식이었다. 

    제크론이 덩치 큰 마물에게 달려들어 심장을 정확히 노렸다. 

    그는 전투 현장에서 조준한 목표물을 놓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검이 마물의 심장에 정확히 꽂혔다. 

    “캬아아악! 커윽!”

    ‘됐다!’

    초록색의 끈적끈적한 피가 주르륵 뿜어져 나왔다.

    쿠웅, 육중한 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함께 싸웠던 제크론과 병사들은 다른 마물들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때였다. 

    피를 흘리며 쓰러졌던 마물이 팔다리를 바르작거리더니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서는 게 아닌가.

    제크론은 상황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분명 칼을 심장에 정통으로 꽂았다. 

    그런데 죽지 않다니! 

    다시 달아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뭔가 잘못됐어. 이상해!’

    마물이 다시 일어선 것을 미처 보지 못한 병사가 희생양이 됐다. 

    거대한 발톱이 병사의 등을 인정사정없이 할퀴었다. 

    제크론은 다시 마물에게 달려들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다른 병사들 역시 제크론의 뒤를 따랐다. 

    접전이 이어졌고, 결국 제크론은 마물의 목을 베었다. 

    “커억!”

    단말마를 내뱉은 마물의 몸과 머리는 곧장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목 자체가 워낙 두껍고 피부도 두꺼웠기에 마물의 목을 단칼에 베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크론은 해냈고, 또다시 마물을 쓰러뜨렸다. 

    이번엔 방심하지 않았다. 

    이미 쓰러진 마물이었지만 그는 마물의 심장을 도려내 몸에서 완전히 분리했다. 

    ‘이쯤하면 됐겠지?’

    한참을 기다렸지만 마물에게서 다른 생체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제크론은 몸을 돌려 전투 현장을 둘러봤다. 

    마물의 새로운 능력에 당황한 것은 제크론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병사들이 전과 달리 우왕좌왕했고, 전보다 더 많은 병사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꽉 다문 어금니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덤벼!”

    제크론은 초록색 피를 뒤집어쓴 채 고함을 내지르며 바로 옆의 마물에게로 달려갔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마치 실성한 사람의 눈동자처럼 번득였다. 

    *   *   *

    “모두 열두 마리입니다.”

    “그래, 뒤처리를 부탁한다.”

    전투에 참여했던 병사들 중 몸이 성한 이들은 모두 막사로 향했다. 

    부상병을 나르고, 마물의 시체를 처리하는 일은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다른 조의 병사들이 와서 담당했다. 

    제크론도, 보좌관도 마물의 피를 뒤집어쓰기는 했지만 부상을 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상자가 평소의 두 배에 달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말에 올라 막사로 향하는 제크론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막사에 도착하자마자 제크론은 회의를 소집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마물들이 평소와는 달랐다. 심장에 칼을 맞고도 되살아났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마물이라니. 아는 게 있나?”

    그의 물음은 마법 기사단의 단장에게 향해 있었다. 

    단장이 난색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각하. 저희도 오늘 처음 보는 현상이었습니다. 지금 마물의 시체를 조사 중에 있고, 수도에도 연락을 취해 관련 서적을 뒤져 보라 명했습니다.”

    “흐음….”

    예상은 했지만 마법 기사단도 알지 못한다는 말에 제크론의 미간에 생겼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다음 물음은 의료진의 단장에게로 향했다. 

    “사상자 현황은?”

    “사망자는 없고,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자가 100여 명에 육박합니다. 부상병들 중 중태에 빠진 이들도 있어 사망자가 생길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무조건 살려내야 한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각하.”

    회의에 참석한 모두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난데없이 나타난 기이한 복병에 모두 얼떨떨한 상태가 됐다. 

    상대에 대한 무지는 두려움을 낳는다. 

    제크론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렇다면… 마물들의 목을 베고, 심장을 완전히 도려내는 수밖에 방법이 없는 건가?”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각하.”

    막사 여기저기서 절망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뎀프샤의 군사들은 유능했다. 

    오랜 시간에 걸친 훈련 덕분이었다. 

    하지만 거대한 마물의 목을 단칼에 베고, 동시에 심장을 완전히 도려내는 것은 전혀 다른 경지의 이야기였다. 

    3천의 병사들 중 그 정도를 해낼 수 있는 병사는 많지 않았다. 

    제크론까지 합쳐도 열 손가락도 다 못 채울 정도였다.

    최정예 군사들을 매 전투마다 모두 데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제크론의 근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알겠네. 회의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그만 들어가서….”

    제크론의 말이 중간에 끊겼다. 

    막사 안으로 달려 들어온 은빛 갑옷의 기사 때문이었다. 

    “각하, 여기에서 10km 떨어진 곳에 마물 떼의 움직임이 포착됐습니다. 속도가 빠릅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몹시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가만히 선 채 놀라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고작 10km 거리였다. 

    속도도 빠르다고 했다. 

    게다가 날은 어둑해지고 있었다. 

    어두운 환경은 마물들에게는 유리하고, 인간들에게는 불리하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제크론은 검을 챙겨 들며 외쳤다. 

    “제4부대가 전방에 선다. 5부대와 6부대까지 그 뒤를 따른다.”

    평소였다면 대기조로 한 개 부대만 대동했을 터였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기에 두 개 부대를 대기조로 대동하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각하!”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각하!”

    회의에 모인 기사들의 얼굴에서 두려움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적이 코앞에 있는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굳건한 결의뿐이었다. 

    *   *   *

    타닥타닥….

    벽난로 안 땔감이 타는 소리가 침실 가득 기분 좋게 울렸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목욕까지 마친 후, 나는 벽난로 옆 소파에 앉아 자수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번 배운 것을 기회 삼아 완전히 마스터해 두면 좋을 것 같았다. 

    언젠가 직접 멋들어지게 가문의 문장과 이니셜을 수놓은 손수건을 제크론에게 선물할 것을 꿈꿨다.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은 행복했다. 

    미래에 대한 희망 덕분에 오늘을 살아내는 게 전혀 힘들지 않았다. 

    점점 다가오는 출산의 고통이나 죽음의 운명 따위…. 

    “무섭지만… 그래도 무섭지 않아! 역시… 좀 무섭지만…. 아니, 그래도 괜찮아. 무섭지 않아!”

    이랬다저랬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스스로가 마치 미친 사람 같아 우스웠다.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래도 집중할 게 생기니 좋았다. 

    시간이 금방 갔다. 

    밤은 길었고, 이 세계에서는 밤에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제크론이 늦네.’

    자수에 집중하는 틈틈이 내 시선은 통신석으로 향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기다리는 일정이 있다는 것은 무척 소중했다. 

    아무 것도 아닐 시간을 아름답게 만드는 마법과도 같았다. 

    지금처럼 말이다. 

    ‘아직 전투 중인가?’

    예전에도 연락이 늦었던 적이 있었다. 

    전투가 길어지는 바람에 막사에 늦게 도착했다고 했다. 

    처음이 아니라서 그런지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게다가 무엇보다 제크론은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끌어가는 남자 주인공이었다. 

    그가 이번 작전에서 목숨을 위협당할 만한 큰 부상을 입을 확률은 영(0)에 수렴했다. 

    “밤에도 전투가 있을 수 있어. 그러니 무작정 연락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엘프윈. 다음 날 아침에 꼭 연락할 테니.” 

    제크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제크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포기하고 잠자리에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뭐.’

    자수 도구들을 대충 정리하고 침대로 향했다. 

    폭신한 이불을 덥고 누웠지만 졸리지 않았다. 

    천장을 보면서 양도 세어 보고, 구구단도 외웠지만 헛수고였다. 

    다른 사람은 다쳐도 제크론만은 절대 다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무관하게 걱정이 자꾸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내가 이 세계에 왔다는 것 자체가 원작에 문제가 생겼다는 거니까…. 어쩜 원작대로 흘러가지 않을지도 모르는 거잖아. 그러니까 제크론이 다칠지도 몰라. 심하게 다치면 어쩌지…. 그러면….’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끔찍한 상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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