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당장 편지를 입 안에 넣어 잘근잘근 씹어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겨우 참았다.
“윽….”
하지만 화를 억누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음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문이 벌컥 열렸고, 메리엔이 들어왔다.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릴 때부터 메리엔이라는 것을 예상했지만 몹시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라 짜증이 확 솟구쳤다.
“너, 내가 문 열기 전에는 노크하라고 했지!”
“제나, 왜 그래? 뭐 화나는 일이라도 있어?”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그러니까 왜 노크를 안 해, 왜에!”
제나가 언성을 높이는 경우는 흔치 않아서 메리엔은 어리둥절한 상태가 됐다.
원래 소리를 지르는 쪽은 자신이고, 제나는 조곤조곤 타이르는 쪽이었다.
지금처럼 상황이 역전되는 경우는 제나가 몹시 화가 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럴 땐 얼른 꼬리를 말고 몸을 낮춰야 한다.
메리엔은 제나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 다음부턴 조심할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하는 사과에 매섭게 빛났던 제나의 눈이 조금 풀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화를 완전히 삭이는 것은 무리인 것 같았다.
푹, 땅이 꺼질 듯 한숨이 터져 나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메리엔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제나에게 향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제나였다.
그런 제나가 이렇게 열받았다는 것은 몹시 언짢은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무슨 일인데그래?”
메리엔은 제나의 손에 꼬깃꼬깃 구겨진 종이를 보며 물었다.
제나는 대답 대신 종이를 메리엔에게 넘겼다.
메리엔은 인정사정없이 구겨진 종이를 다시 폈다.
찢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작은 공 모양이었던 종이가 다시 직사각형의 모양을 갖췄을 때, 메리엔은 잔뜩 구겨진 종이를 눈 가까이에 대고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짧은 편지를 다 읽은 메리엔의 얼굴도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겨우 직사각형의 모양을 되찾았던 종이는 이번엔 메리엔의 손아귀 힘에 의해 다시 작은 공 모양이 됐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참 나!”
제나가 화를 냈던 이유를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몸속 피가 들끓기 시작했다.
귀족의 타이틀을 달고 있는 사람이라면 핸더슨 공작저와 도론 공작저에서 열리는 파티에 초대받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여겼다.
최고위 귀족 자리를 백년 넘게 유지한 두 공작 가문은 수도 사교계의 중심이었다.
두 공작 가문의 초대를 한 번은 받아야 사교계에서 인정을 해 주는 분위기가 오래전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이제까지 이런 식으로 참석 거절 편지를 보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어!’
메리엔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물론 초대받은 모든 파티에 참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초대에 거절하는 의사를 나타낼 때는 편지를 보내는 것이 예의의 정석이었다.
하지만 핸더슨 공작저와 도론 공작저에서 개최하는 파티는 달랐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파티 당일 참석이 어려운 사람들은 그 전이나 후에 직접 찾아와서 대면하여 사과의 뜻을 전했다.
그래야 다음 기회가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편지 하나 달랑 보내고 끝이라니!’
메리엔이 까드득, 이를 갈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떠오르는 생각에 그녀의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이런! 다음 주 티 파티에 윌트슨 공작 부인을 초대할 거라고 다 말해 버렸는데!”
“뭐어?”
제나가 빼액 외쳤다.
메리엔을 노려보는 제나의 눈이 싸늘하게 희번덕거렸다.
매서운 제나의 눈빛 앞에서 메리엔은 심장이 쪼그라드는 공포를 느꼈다.
“미, 미안해…. 초대했으니, 당연히 올 줄 알았지, 난….”
만난 지 10분 만에 벌써 미안하다는 소리를 두 번이나 해야 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메리엔은 비참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메리엔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제나의 얼굴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화를 이기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던 제나의 입에서 마치 산짐승이 포효하는 것 같은 외침이 터져 나다.
“으으…. 으으아아악!”
그 외침은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어리벙벙한 표정의 메리엔은 쉬지 않고 소리를 내지르는 제나를 멍하니 바라봤다.
정말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원래 소리를 지르는 것은 제 역할이었다.
제나의 역할은 소리를 지르는 저를 타이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역전도 아니다.
메리엔은 제나가 제게 했던 것처럼 그녀를 타이르는 방법을 알지 못했으니까.
그저 멍하니 포효하는 제나를 지켜만 보고 있을 뿐이니까.
‘그나저나 큰일이네. 윌트슨 공작 부인이 핸더슨가 티 파티 초대에 거절했다는 소문이 곧 파다해지겠는데….’
낭패였다.
그렇게 되면 ‘핸더슨가와 도론가의 파티 참석을 편지 한 장으로 거절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명제에 오점을 남기게 된다.
한 번의 예외는 또 다른 예외로 이어질 게 뻔했다.
끄응, 메리엔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
제나의 목소리가 차츰 줄어들었다.
마침내 외침을 멈춘 제나가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소문이 날 거야. 그러니까 우리 쪽에서 먼저 손을 써야 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지?”
여전히 화가 남아 있는 목소리의 끝이 부르르 떨렸다.
잘 벼른 칼날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메리엔에게 꽂혔다.
메리엔은 마른침을 꼴딱 삼키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럴 땐… 전면전?”
“맞아. 전면전이야.”
제나의 한쪽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부릅뜬 눈과 비틀린 입매를 한 제나의 모습이 섬뜩해서 메리엔은 아무 대꾸도 못한 채 조용히 두 주먹을 말아 쥐었다.
* * *
이른 아침, 간단한 식사 후, 작전 회의가 열렸다.
은색 갑옷을 입은 마법 기사단 소속 기사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토벌단에서 마법 기사단의 역할은 마물 떼의 위치를 추적하는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북동쪽 방향으로 30km 근방에 마물 떼의 움직임이 포착됐습니다. 열 마리 내외로 수가 많지 않지만 이동 속도가 빠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몸집이 클 것으로 예상합니다.”
“타라스크나 쇼스니론과 비슷한 종류겠군요.”
“네, 저희들은 그렇게 예상하고 있습니다.”
은빛 갑옷의 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는 미간에 잔뜩 힘이 들어간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이미 여러 번 강조했지만 이번 토벌 작전에서 만난 대부분의 마물들은 과거와 달리 좀 더 포악한 성질머리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점을 항상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한 음절, 한 음절 힘주어 내뱉는 기사의 말에 모두가 집중했다.
마침내 제크론이 입을 열었다.
“잘 알겠네. 그래서 예상 전투 후보지와 시간대가 나왔나?”
“네, 방금 계산을 끝냈습니다.”
은빛 갑옷의 기사가 손에 들고 있는 노트와 테이블 위에 놓인 지도와 대조하며 살피다가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강줄기 근처의 작은 평지였다.
“세 시간 후, 이곳입니다. 좁은 강을 사이에 두고 궁수를 배치할 수 있습니다. 기마병은 나무숲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마물들이 평지로 나오면 그때 공격을 개시하면 되겠습니다.”
제크론을 비롯한 회의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지도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무난한 작전이었다.
뜻밖의 변수가 없다면 말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제크론이 입을 열었다.
“세 시간 뒤라면 촉박하군. 서둘러야겠다!”
“알겠습니다, 각하.”
* * *
뎀프샤에서 온 3천 명의 군사들 중 2천 명은 제크론과 함께 산으로 올랐고, 나머지 1천 명은 다섯 개 조로 나뉘어 차드엘 산맥 아래 마을들의 복구와 경비를 맡았다.
산으로 올라온 2천 명의 군사들은 다시 2백 명씩 열 개 조로 나뉘어 순서대로 작전에 나섰다.
한 개 조가 작전에 직접 투입됐고, 다른 한 개 조가 근처에서 동향을 살피며 대기했다.
병사들은 제크론의 지시에 따라 대형을 정렬했다.
50명의 궁수들은 강 너머에서 이쪽을 조준했고, 다른 50명의 궁수들은 나무를 타고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50명의 기마병들과 50명의 보병들은 나무숲에 숨어 마물 떼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쿵, 쿵, 쿠웅…. 쿵, 쿵….
거대한 발걸음 소리에 땅이 울리기 시작했고, 산새들이 푸드덕거리며 자리를 떴다.
‘드디어!’
제크론은 어금니를 지그시 앙다물었다.
이번 전투도 속전속결로 끝내리라 다짐하면서.
마물 떼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법 기사단에서 예상했듯이 대략 열 마리 정도였다.
물을 찾아 강으로 달려가던 마물들이 순간 멈칫했다.
숨어 있는 병사들의 기운을 감지했으리라.
우락부락하게 생긴 것과는 달리 감각이 예민하게 발달한 짐승들이었다.
제크론의 다른 지시가 있을 때까지 병사들은 숨죽여 기다렸다.
마물들이 킁킁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마물들이 좀 더 강가 쪽 평지로 가 줬으면 수월한 싸움이 됐을 터였다.
하지만 마물들은 나무숲을 벗어나지 않은 채 주위를 어슬렁거릴 뿐이었다.
‘제길!’
제크론은 입술을 깨물며 마물들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이대로 숲 안에서 전투를 치러야 할 것 같았다.
처음 세웠던 계획을 상황에 맞게 수정하는 것은 전투에서 비일비재했다.
특히 마물 토벌 작전에서는 더욱 그러했고.
제크론은 긴 창을 든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나무 위에 자리 잡은 궁수들과 숲 이곳저곳에 숨어 있는 기마병과 보병 모두가 그의 손에 집중했다.
허공에 치켜들었던 그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을 때, 궁수들이 일제히 활을 쐈다.
슝!
슈웅!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화살들이 마물의 몸에 꽂혔다.
“크아아아앙!”
“케에에에엑!”
마물들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했다.
하지만 두꺼운 피부를 가진 마물이었기에 화살은 치명적인 부상을 안겨 주지는 못했다.
이번엔 기마병의 차례였다.
제크론을 필두로 한 한 무리의 기마병들이 긴 창을 단단히 쥐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전속력으로 달려간 기사들은 창을 마물의 몸에 꽂아 넣었다.
제크론도 어렵지 않게 마물의 이마 중앙에 창을 꽂았다.
“카아아아악!”
“크으으으엑!”
마물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