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142)
  • 60화

    “아….”

    주디의 입이 힘없이 벌어졌다. 

    내 말을 믿기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 그렇지만, 마님! 핸더슨 공작가의 파티는 잠깐 얼굴을 비추는 것만으로도 평판이 180도 달라질 수 있는 곳이에요.”

    두 눈을 부릅뜬 주디는 주먹까지 불끈 쥐고 말했다. 

    나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조언임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닌 건 아닌 거다. 

    고려할 가치조차 없었다. 

    ‘핸더슨 공작저의 파티에 참석한다면 분명 도론 공녀와도 마주치게 될 게 뻔해.’

    으으, 생각만으로도 진저리가 났다. 

    닭살이 돋았다. 

    ‘그리고 불쾌한 대화가 오가겠지.’

    나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귀가 전혀 맞지 않는 대화 말이다. 

    위든을 볼 때마다 그 작은 강아지를 마차 뒤에 묶어서 끌고 가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아 괴로웠다. 

    게다가 천생 얌전하고 온화한 위든이 마차가 근처에 오면 세차게 짖는데, 그 모습을 보면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나는 주디를 똑바로 보고 고개를 저었다. 

    “핸더슨 공녀와도, 도론 공녀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아. 이번 티 파티는 건강상의 이유로 불참한다고 답장을 보낼 거야.”

    “역시 위든 때문이군요, 마님?”

    “그렇지 뭐.”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 대한 것이라면 말을 길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잠깐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오염되는 것 같았으니까. 

    주디의 얼굴에서 아쉬움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 결정을 이해해 주는 눈치였다. 

    주디의 마음을 충분히 알았다. 

    예전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공작저로 날아오는 초대장은 다른 귀족가에 비하면 현저히 적을 것이다. 

    주인마님이 그 유명하다는 핸더슨 공작저의 파티에 초대됐다는 것은 고용인의 입장에서도 어깨가 으쓱거릴 정도로 자랑스러운 일일 터였다. 

    ‘미안하지만 절대 싫어.’

    나는 속으로 읊조렸다. 

    *   *   *

    제크론과의 통신은 밤마다 계속됐다. 

    사실 하루 종일 이 시간을 기다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크론과의 5분을 위해 사는 것 같다고나 할까. 

    서로의 안부를 묻는 짧은 대화가 이어졌고, 곧 마칠 시간이 됐을 때였다. 

    제크론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5분은 너무 짧은 것 같아. 우리 10분으로 늘리면 안 될까?

    “…….”

    -응? 엘프윈?

    나는 망설였다. 

    5분이 10분으로 변하는 게 이렇게 쉽다면 10분이 15분으로 변하는 것도, 또 20분으로 변하는 것도 쉬워져 버린다.

    그건 안 된다. 

    제크론은 지금 다른 용무가 아닌 마물 떼를 토벌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 중이니까.

    -응? …응?

    제크론이 자꾸만 보챘다. 

    그는 통신석을 뚫고 나올 기세로 얼굴을 무척 가까이에 대고 날 봤다. 

    열망을 담은 푸른 눈동자가 간절하게 빛났다. 

    제크론이 이렇게 나오면 나는 질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요. 딱 10분이에요. 그 이상은 안 돼요, 절대.”

    -좋아. 

    빙그레 웃는 그를 보고 있자니, 내 입가에서 절로 미소가 생겨났다. 

    그리고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불쑥 튀어나왔다. 

    “핸더슨 공녀한테서 티 파티에 참석해 달라는 초대장을 받았어요. 하지만 건강 핑계를 대고 거절했어요.”

    -잘했어. 당신 마음 편한 대로 하면 되는 거야. 

    “하지만 공작 부인으로서 적당한 사교 생활도 하나의 의무잖아요.”

    내내 마음에 걸렸던 고민을 털어놨다. 

    단지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계속 핸더슨 공녀와 도론 공녀를 피한다면 윌트슨 공작가에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수도 내 귀족 사회에서 두 공작가의 영향력은 막강했으니까. 

    -당신 이미 적당한 사교 생활 아주 잘하고 있어. 매주 귀부인들과 함께 운동하잖아. 게다가 슈라더 후작 부인과도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말이야.

    “…….”

    -그 외 다른 사교 활동은 출산 이후에 차차 해도 늦지 않아. 인생은 길어. 시간은 많다고.

    “당신 말이 맞네요. 고마워요.”

    눈가에 눈물이 고이려고 했다. 

    제크론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통신석을 잡은 손을 좀 더 멀리 뻗었다. 

    -참, 초상화는 완성되어 가고 있나?

    “앞으로 일주일 정도 후에는 완성될 것 같대요.”

    -그래? 기대되는군. 1년 후엔 아이와 함께 초상화를 그리자고. 매년마다 그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 우리가 나이 드는 모습을 차곡차곡 담을 수 있을 테니까.

    “아이들이요?”

    제크론이 잘못 말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되물었는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응, 아이들. 당신 설마 한 명만 낳을 생각인 건 아니지?

    “네에?”

    순간 당황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당황한 내 반응에 제크론 역시 당황한 눈치였다. 

    그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 같았다. 

    -난 아이를 많이 낳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당신이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야. 

    “…….”

    -출산이 위험하다는 걸 알았으니, 자녀 계획은 전적으로 당신 의견을 따를 생각이거든.

    머리가 띵, 울려서 이야기의 흐름을 제대로 따라갈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대로 멍하니 있는데, 제크론이 계속 말을 이었다. 

    -어쨌든 매년 초상화를 그리는 건 좋은 생각 같지 않아? 그건 동의해 줄 거지?

    “네, 좋은 생각 같아요.”

    겨우 대답했다. 

    그 후 몇 마디 대화가 더 오가다가 마침내 통신을 마쳤다.

    하지만 통신석을 내려놓은 후에도 나는 한동안 계속 멍한 상태였다. 

    ‘제크론은 우리의 미래까지 계획하고 있구나.’

    그제야 나는 내가 단 한 번도 미래를 그려 본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고 싶었지만, 운명을 바꿔 보겠노라 다짐했지만, 그래서 갖은 노력을 했지만, 사실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품었더라면 출산 이후의 삶에 대해서 계획해 보거나 기대했을 터였다. 

    ‘그런데 마치 미래가 없을 사람처럼… 그렇게 살았구나.’

    인간을 살게 하는 것은 오로지 희망일 텐데,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희, 망.”

    목소리를 내서 단어를 만들었다. 

    한번 말해 본 것뿐인데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희망, 가져 보는 거야!’

    두 눈을 부릅떴다. 

    주먹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 하면 희망을 샘솟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출산 후의 미래를 상상해 보기로 했다. 

    “먼저… 아이의 백일잔치와 돌잔치는 아주 성대하게 열 거야.”

    가만, 그런데 백일잔치와 돌잔치라니! 

    여긴 한국이 아니란 말이다!

    푸핫, 웃음이 났다. 

    ‘아무렴 어때? 그냥 해 버리면 되는 거지 뭐!’

    누가 알겠어? 

    백일잔치와 돌잔치가 유행하게 될지? 

    후후, 웃음이 계속 났다. 

    역시 희망은 좋은 거다. 

    웃을 일이 생기고, 또 그만큼 근심이 사라진다. 

    “또 뭐가 있을까?”

    부푼 배를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바로 두 번째부터 막히다니. 

    그러다가 불현듯 제크론이 얼굴을 붉히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 아이를 많이 낳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많은 아이라니.

    얼굴에 홧홧한 열기가 몰렸다. 

    떠나기 전날 밤, 옆에 누운 제크론이 나를 살포시 안은 채 했던 말도 떠올랐다. 

    “토벌에서 돌아오면, 그땐 매일 이렇게 한 침대에서 자는 거야. 알았지?”

    감미로운 중저음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목덜미에 닿았던 그의 숨결이 되살아났다. 

    “으….”

    나는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스르르 자리에 누웠다. 

    두 눈을 딱 감고 구구단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 일은 이, 이 삼 육, 이 사 팔, 이 오 십….”

    제크론으로, 그의 숨결로, 그의 체온으로 가득 찬 머릿속을 비워야 했으니까.

    사실 다른 무엇보다 자꾸만 떠오르는 원작 소설에서의 베드신 장면들을 비워야 했으니까. 

    ‘오늘도 잠은 다 잤구나.’

    끄응,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구구단을 계속 외웠다. 

    “삼 일은 삼, 삼 이 육, 삼 삼 구….”

    *   *   *

    핸더슨 공작저. 

    제나는 엘프윈으로부터 받은 답장을 꾸깃꾸깃 접으며 이를 갈았다. 

    “감히 거절을 해? 하아!”

    하도 어이가 없이 헛웃음이 다 나왔다. 

    제가 보낸 초대장에 거절 의사를 표시한 사람은 이제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참석 못하게 된다면, 다른 날에 찾아와도 되는지를 묻거나, 본인 대신 친인척을 참석시켜도 되는지를 물었다. 

    핸더슨 공작저에서 열리는 파티는 규모가 크든 작든, 날씨가 좋든 궂든 모두가 참석하고 싶어 했다. 

    최근 수도에서 유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최근 돌고 있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듣고 싶다면, 최근 주목받는 인물을 만나고 싶다면 무조건 참여해야 하는 것이 핸더슨가에서 열리는 모임이었으니까.

    그런데 엘프윈 윌트슨 공작 부인은 예상을 깨고 불참을 알려 왔다. 

    만삭의 몸이라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었지만 제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만삭의 몸으로 요소킨 운동은 하면서, 만삭의 몸으로 산책은 하면서, 만삭의 몸이라고 티 파티에는 잠깐도 참석할 수 없다니! 

    “말이 조금도 되지 않잖아!”

    꼬깃꼬깃 구겨진 편지를 손 안에 꽉 말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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