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통신석의 성능은 무척이나 좋았는데, 빙그레 말려 올라가는 제크론의 입꼬리까지 선명하게 다 보였다.
-갑자기 질문이 너무 많아서 다 못 들었어. 하나씩 다시 물어봐 줄래?
“어때요? 괜찮아요?”
-응. 괜찮아. 혹시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기사단과 병사들은 토벌 원정이나 전투에 무척 익숙하다고.
“…….”
-이런 것쯤은 일상이야. 불편한 것 없이 잘 있으니 너무 걱정 마.
제크론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차분한 어조로 내 물음에 답했다.
손바닥만 한 통신석으로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많이 안심됐다.
-그리고 다음 질문은 뭐였더라?
“이제 됐어요. 더 궁금한 건 없어요.”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얼굴 봤으니 됐어요. 당신 피곤할 텐데, 어서 쉬어요. 내일도 아침 일찍부터 행군할 텐데.”
어느새 그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대신 아쉬움이 담긴 눈동자로 나를 봤다.
제크론의 눈은 그 안에 무엇이 담겼든 언제나 아름답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통신석 속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
“내일 밤에도 자기 전에 연락 줄 거죠?”
-물론이지.
“참, 멀론 경에게 고맙다고 전해 줘요.”
-그래.
“잘 자요.”
-잘 자, 엘프윈.
그렇게 통신이 끊겼다.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크론은 오랜 행군으로 피곤한 게 사실이었고, 내일도 오늘만큼의 일정으로 바쁠 것도 사실이었으니.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래, 욕심 부리지 말고, 이 정도면 딱 좋아.”
혼잣말을 중얼거린 나는 신문과 통신 장치를 테이블로 치우고 잘 준비를 했다.
자리에 누우며 생각했다.
꿈에서 제크론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 * *
신문에서는 연일 차드엘 산맥으로 간 마물 토벌단에 대한 기사가 1면에 실렸다.
그중에서도 제크론이 이끄는 뎀프샤의 군대에 대한 이야기가 비중이 컸다.
뎀프샤의 군대 외에도 대여섯 곳의 영지에서 군대가 투입됐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뎀프샤의 군대가 수적으로도, 경험치를 비롯한 실력으로도 우세한 것 같았다.
그래서 당연히 사람들의 관심도 그들에게 쏠려 있었고.
덕분에 나는 제크론의 소식을 신문 1면에서 손쉽게 찾아 읽을 수 있었다.
차드엘 산맥에 도착한 군대는 여러 조로 나뉘어 게릴라식 전투를 벌인다고 했다.
기사의 내용으로 짐작컨대 아직까지는 토벌단의 성적이 꽤 우수한 것 같았다.
‘다행이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신문을 내려놓는데,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주치의 매튜였다.
원래대로였다면 매튜 역시 제크론과 함께 토벌단에 합류하는 게 맞았다.
부상당한 병사들을 치료해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제크론은 매튜에게 공작성에 남으라고 명령했다.
나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마님. 오전 진료 왔습니다.”
“어서 와요, 매튜.”
젊은 주치의는 언제나처럼 산뜻한 모습으로 내 옆에 와서 앉았다.
그의 진료는 매일 간단한 문진과 함께 시작했다.
“밤새 불편한 곳은 없으셨나요? 잠은 잘 주무셨습니까, 마님?”
“태동이 심해서 새벽에 두 번 정도 깼어요. 그거 말고는 특별히 불편한 곳은 없어요.”
“아기씨께서 활동량이 많은 것 같군요.”
매튜는 빙그레 웃는 얼굴로 내 대답을 수첩에 적었다.
문진이 끝난 후, 매튜는 체온과 맥박을 확인하고, 청진기로 내 심장과 태아의 심장을 살폈다.
10분 후 진료가 끝났다.
“이상입니다. 오늘도 건강하십니다, 마님!”
매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매일 진료가 끝나면 그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말했다.
내 건강 염려증을 가라앉혀 주기 위함인 것 같았다.
처음엔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거려야 했지만 이젠 많이 익숙해졌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매튜.”
“요즘 기분은 좀 어떠신지요?”
“기분…이요?”
평소라면 진료 후, 바로 빠른 걸음으로 진료실로 돌아가는 매튜였다.
조수 없이 혼자서 공작성의 이런저런 환자들을 돌봐야 해서 매일이 바빴다.
언젠가 그에게 조수를 한 명 들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혼자 일하는 게 더 익숙하고 편합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할 뿐이었다.
바쁠 텐데도 불구하고 가만히 앉아 내 기분에 대해서 묻고 있었다.
“괜찮은 것 같아요. 평소와 다름없이요.”
“다행이군요.”
짧게 대답한 그는 여전히 자리를 지켜 앉은 채 입을 달싹였다.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앉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재촉할 생각은 없었다.
매튜가 손가락으로 안경을 추어올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각하께서 갑자기 자리를 비우셔서 마음이 쓰입니다. 두 분이 점점 가까워지던 차에 벌어진 일이라서 더욱 그렇습니다.”
“…….”
“혹시 조금 우울해지고 뭔가를 털어놓고 싶으실 땐… 일기를 써 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마님.”
“일기…요?”
좀 뜬금없이 들리는 이야기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매튜를 보는데,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풀지 않고 계속 쌓아 두기만 하는 건 건강한 방법이 아닙니다.”
“…….”
“좋은 감정이든, 그렇지 못한 감정이든 적절하게 배출할 필요가 있지요.”
“…….”
“물론 친구 분들과 티타임을 가지면서 풀 수도 있지만 남들에게 쉽게 꺼내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을 때는 일기 쓰기를 추천드립니다.”
“매튜, 혹시 예전에도 내게 일기 쓰기를 추천했었나요?”
“네. 그랬습니다.”
“역시 그랬군요.”
나는 엘프윈이 썼던 일기장을 떠올리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매튜가 또 물었다.
“혹시 아르젠토 차가 다시 생각나거나 하진 않으신지요?”
“아르젠토 차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게 뭐였더라…. 아!
빙의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 번뜩 떠올랐다.
아르젠토 차에 중독됐던 이 몸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쓰러졌다.
신경 안정제로 쓰이는 약초인데, 중독의 위험이 있어 복용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차라고 했다.
그래서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중독 치료를 했었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이름도 까먹었을 정도로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안경을 추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매튜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기뻐하는 눈치였다.
“참, 그리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따라 말이 많은 매튜였다.
“요소킨 운동은 이번 달까지만 참여하는 게 어떠실까요? 다음 달엔 거동이 더욱 힘들어지실 겁니다. 되도록 침실에 머무르시고, 가벼운 산책 정도만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내 대답을 끝으로 매튜와의 대화는 일단락됐다.
그가 침실을 나서자마자 바로 주디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들고 온 은쟁반 위에는 고급스런 편지 봉투가 놓여 있었다.
“핸더슨 공녀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누구? 핸더슨 공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
핸더슨 공녀가 내게 편지를 보낼 이유가 전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괴롭히려는 심보가 아니면 모를까.
주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핸더슨 공녀가 맞다고 했다.
나는 얼른 편지를 뜯고, 내용을 확인했다.
편지의 시작은 화려한 미사여구가 더해진 계절 인사였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아름다운 말로 듣기 좋게 꾸미면 악한 본성이 가려질 줄 아는 걸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편지를 계속 읽어 나갔다.
편지의 중반부에 이르러서야 본론이 적혀 있었다.
……. 윌트슨 공작성에서 요소킨 운동을 할 수 있게 돼서 정말 영광이에요. 윌트슨 공작 부인께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윌트슨 공작님께서 성을 비우신 요즘 많이 적적하시리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공작 부인을 저희 핸더슨 공작저 티 파티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부디 오셔서 자리를 빛내 주시길 바라고 있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