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142)

55화

다음 날도 아침부터 초상화 작업이 이어졌다. 

나와 제크론은 다시 소파에 나란히 앉았고, 그의 팔이 내 어깨에 둘러졌으며, 또 손이 포개졌다. 

그리고 서로를 마주 봤다. 

여기에 오기 전, 부은 얼굴을 진정시키기 위해 냉수 찜질을 해야 했다. 

그림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제크론에게 부은 얼굴을 보이기 싫다는 마음이 더 컸다. 

어차피 오늘의 그림 작업은 제크론 중심으로 이어질 예정이었으니까 말이다. 

그의 얼굴을 살폈다. 

나처럼 냉수 찜질을 한 게 아닐 텐데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하나도 붓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출정 준비를 하느라 바빴을 텐데도 불구하고 다크 서클의 그림자 하나 없었다. 

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어쩜… 얼굴이 하나도 안 붓고, 다크 서클도 없고…. 아침인데도 아침 같지가 않은 얼굴이네요.”

“그래서 좋다는 건가, 싫다는 건가?”

“그야… 억울하다는 거죠.”

“뭐가?”

“난 아침 일찍 일어나서 냉수 찜질을 하고 왔거든요.”

“난 당신 부은 얼굴도 좋아해.”

너무 갑자기 훅 들어오는 바람에 순간 당황했다. 

난데없이 고백이라니!

물론 그냥 예의상 한 말이겠지만 옆에 앉은 잘생긴 남편이 하는 ‘좋아해.’라는 말을 처음 들은 나는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딱딱하게 굳은 내 얼굴을 본 제크론은 내 반응을 잘못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가 얼른 덧붙이면서 말했다. 

“물론 안 부은 얼굴도 좋아하고.”

“…….”

“당신이면 다 좋아.”

제크론이 생긋 웃으며 상큼하게 말했다.

놀란 나머지 입이 절로 벌어졌다. 

얼굴에 화르르 열이 올랐다. 

붉어진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홱 돌려 시선을 피했다. 

어리둥절한 음성이 뒤따라왔다. 

“왜… 아? 내가 말한 적이 없던가? 당신 좋아한다고?”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쿵쾅쿵쾅, 심장이 요동쳤다.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바라봤다. 

그는 담백한 모습으로 멀뚱히 내 쪽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렇게 뜬금없는 고백이라니!

이 사람 아침부터 뭘 잘못 먹은 게 분명하다. 

“그….”

뭐라고 한소리 내뱉고 싶었다. 

그런 말을 왜 지금, 여기서 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가까스로 입은 벌렸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이 꽉 막힌 것 같았다. 

어쩌면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심장에 막힌 것일지도 몰랐다. 

내 얼굴은 점점 더 달궈졌고, 도저히 제크론을 쳐다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딱 브렌트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입을 아 벌린 채 넋이 나간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저 사람의 얼굴은 왜 붉어지는 건데?’

고백받은 사람은 난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안절부절못하는 젊은 화가를 보자 열이 단번에 식었다. 

브렌트가 수줍은 얼굴로 다소곳하게 말했다. 

“두 분… 참 보기 좋으십니다. 하지만 지금은 작업 중이니… 자중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랑의 대화는 작업 끝나고 해 주시면….”

몸을 배배 꼬며 말하던 브렌트는 결국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는 붉어진 볼을 두 손으로 감싸기까지 했다. 

뭐? 자중하라고?

사랑의 대화?

대체… 이 분위기를 어떻게 해석하면 저런 반응이 나오는 걸까? 

어이없어 하고 있는데, 제크론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런, 미안하네. 사랑의 대화는, 크흠, 자중하도록 하지.”

제크론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다시 제대로 포즈를 잡았다. 

제크론은 브렌트의 반응을 온전히 이해하는 눈치였다. 

사과까지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점점 더 어이가 없어졌다. 

나만 소외당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별로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하루빨리 완성될 초상화를 기대하며 나도 자세를 잡았다. 

손이 포개졌고, 서로를 마주 봤다. 

전생의 한국에서는 사진 한 방이면 끝나는 일을 여기서는 몇 날 며칠 동안 캔버스 앞에서 같은 포즈를 취해야 했다. 

무척 고달픈 과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소중한 경험이기도 했다. 

이렇게나마 제크론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돼서 좋았다. 

여전히 그의 곁에 딱 붙어 앉은 채 그와 시선을 마주치고 있는 게 어색하기는 했지만 즐겨 보기로 했다. 

다시없을 기회일 테니.

*   *   *

중간 티타임 시간을 제외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응접실 소파에 앉아 포즈를 취해야 했다. 

물론 앉아 있기만 하면 됐지만 만삭의 몸으로 같은 자세를 장시간 동안 유지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제크론이 다정한 눈빛으로 물었다. 

“당신, 찜질이 필요하지 않아?”

필요했다. 

원했다. 

하지만…. 

“케이트와 주디에게 부탁할 생각이에요.”

“내가 해 주지.”

“괜찮아요. 케이트와 주디에게 맡기는 게 더 편해요.”

그가 아쉬움이 가득 담긴 눈길로 나를 봤다. 

자기 강점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원하는 것을 손쉽게 얻을 수 있는지 너무도 잘 아는 남자다, 이 사람은. 

‘…여우 같아.’

나는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동시에 ‘알았어요.’라는 허락의 말도 삼켰다. 

절대, 절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하루 종일 붙어 있었는데, 찜질 시간까지 붙어 있는 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한 수준이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고갯짓이었다. 

하지만 제크론은 포기를 몰랐다. 

그가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가까이 다가왔다. 

허리를 낮춰 눈높이를 맞추고 작게 속삭였다. 

“오늘이 마지막 밤인데도?”

정말 이러기야, 당신? 애교 비슷한 것과 절실함을 담은 푸르른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윽,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무리였다. 

그냥 그까짓 등허리를 빨리 내어 주는 게 상책이리라. 

고개가 절로 위아래로 움직였다. 

“…알았어요.”

후우, 작은 한숨을 삼키며 나는 얼른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속으로 자기합리화적 생각을 이어 갔다. 

‘그래, 오늘 밤이 마지막 밤인걸. 어쩌면… 영원한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그러니까 하루 정도 남자 주인공을 독차지하는 사치쯤은 괜찮으리라.

그 정도는 누려도 되겠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앞장서 걸어가는데, 제크론이 성큼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 나란히 걸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해 주겠다는 의미였다. 

피식,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오늘 밤, 나는 주저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곰살맞게 다가오려는 그를 밀어내지 않을 작정이었다. 

*   *   *

오늘 밤 내내 그를 독차지하겠다는 내 깜찍한 바람은 그냥 바람으로 그쳐야 할 것 같았다.

저녁 식사 후, 제크론은 출정 전 마지막 점검을 위해 보좌관을 대동하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병사들과 말, 그리고 무기와 식량의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올게.”

그가 남겨 놓은 말을 곱씹으며 방에서 빈둥거리고 있을 때였다. 

똑똑똑, 단정한 노크 소리와 함께 케이트가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 들린 은쟁반 위에는 곱게 접힌 손수건이 있었다. 

“그게 뭐야?”

“주인님께서 내일 출정하시니, 손수건 선물을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요.”

손수건 선물이라니?

나는 케이트가 하는 말의 의미를 단번에 파악하지 못했다. 

어리둥절해 하는 내 모습을 보고 케이트 역시 어리둥절한 상태가 돼 버렸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 풍습이 있어?”

“아, 맞다. 제가 종종 마님께서 기억을 잃으셨다는 걸 까먹어서 탈이네요. 하하…. 맞아요. 그런 풍습이 있어요, 마님.”

“…….”

“다음 날 출정하는 남편에게 전날 밤 아내가 손수건을 선물하죠. 원래대로라면 직접 수를 놓은 손수건을 드리는 게 맞지만 마님께서는 자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잖아요. 그래서 사 왔어요.”

손수건을 펼쳐 봤다.

하늘색 고급 실크 위에 금사로 가문의 문장이 수놓여 있었다. 

늑대의 옆얼굴을 담은 문양이 손수건의 한쪽 면을 가득 채웠다. 

“멋지다! 그런데….”

“네?”

“솜씨가 별로지만 그래도 나도 직접 해 보고 싶어. 이니셜이라도 넣어 보면 안 될까?”

케이트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다분히 놀란 모양이었다. 

엘프윈은 자수라면 끔찍이 여겼나 보다. 

하지만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선물에 내 작은 정성을 담고 싶었다. 

“무, 물론이죠. 한번 시도해 보시겠어요?”

“응. 그런데 먼저 연습부터 좀 해야 할 것 같아. 가르쳐 줄래?”

“물론이죠, 마님. 그런데 자수는 저보다는 주디가 한 수 위예요. 가서 주디를 데려올게요.”

“그래, 고마워.”

케이트는 마음이 급했는지 종종걸음으로 나갔다. 

고급스럽고 근사해 보이는 손수건을 내려다보며 귀퉁이를 매만졌다. 

“이쯤에 새기면 될 것 같은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제크론에게 선물해 줄 게 생겨서 기뻤다. 

‘왜 이 생각을 진작 하지 못했지?’

미리 알았더라면 좀 더 연습해서 이니셜이 아니라 이름 전체를 수놓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 한 가닥이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어쩔 수 없지 뭐. 이번엔 이니셜로 만족해야지.”

이번에?

다음번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피식, 웃음이 났다. 

한심했다. 

이렇게 스스로의 처지를 잊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아….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고, 주디와 케이트가 나타났다. 

내 충직한 하녀들의 얼굴에 감격스러움이 가득 묻어 있었다. 

‘마님이 자수라니!’

‘이런 날도 있다니!’

분명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으리라. 

표정을 전혀 감추지 못하는 하녀들을 보자 빙긋 웃음이 났다. 

“나 완전 초보자니까, 처음부터 차근차근 하나하나 가르쳐 줘야 해.”

“저만 믿으세요, 마님!”

주디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 목소리가 너무 커서 나와 케이트는 움찔 어깨를 떨어야 했을 정도였다. 

하하하, 이내 침실 안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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