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142)
  • 54화

    초상화 작업은 햇살이 잘 드는 2층 응접실에서 진행됐다.

    “이번 초상화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품이 되면 좋겠어요.”

    나는 봉긋 솟은 배를 쓰다듬으며 브렌트를 향해 말했다. 

    지난 초상화에 담긴 엘프윈과 제크론은 바로 황궁 연회에 초대돼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 갖춰 입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지난번과는 다른 분위기의 초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나도, 제크론도 평상시 저택 안에서 입는 편안한 실내복 차림으로 캔버스 앞에 앉았다. 

    “좋습니다. 이렇게 앉아 보시겠습니까?”

    브렌트는 우리 곁으로 다가와 포즈를 고쳐 줬다. 

    기다란 소파에 제크론과 나는 나란히 앉았고, 그의 한쪽 팔이 내 어깨를 살포시 감싸 안았다. 

    나는 한쪽 손을 그의 무릎 위에 올렸고, 그의 다른 손이 내 손 위에 포개졌다. 

    더없이 다정해 보이는 한 쌍의 부부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자세가 불편하진 않으십니까? 등허리를 받쳐 줄 쿠션이 더 필요하진 않으십니까? 나중에 자세가 불편하면 자주 끊고 가야 하니까, 지금 제대로 충분히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은 것 같아요.”

    꼼꼼히 챙기는 브렌트를 보며 나는 생긋, 웃어 보였다. 

    그때였다. 

    내내 심각한 표정으로 곁에 섰던 멀론 경이 끼어들었다. 

    “자세가 불편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마님. 홀몸이 아니셔서 장시간 같은 자세를 유지하는 게 힘드실 테니 말입니다.”

    “그럴게요. 고마워요, 멀론 경.”

    나는 멀론 경을 향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왠지 그의 말에 날이 선 것 같았다. 

    브렌트에게로 향한 그의 눈매가 무척 건조하고 서늘해 보였다. 

    ‘왜 저러지?’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사실 내게 멀론 경이나 브렌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온 신경이 옆에 딱 달라붙어 앉은 제크론에 다 쏠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얇은 옷 사이로 느껴지는 그의 체온이 따뜻했다. 

    내 손 위에 가만히 포개진 그의 손바닥은 다소 거칠었지만 단단해서 안정감을 주었다. 

    ‘…너무 가까워.’

    바짝 긴장한 나머지 숨조차 제대로 내쉴 수 없는 지경이 돼 버렸다. 

    내 긴장감이 피부에 스며 나왔을까, 아니면 숨결에?

    제크론이 걱정하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당신 괜찮아? 어디가 불편한가? 좀 쉬었다가 다시 시작할까?”

    갑자기 너무 많은 질문이 날아들어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은 나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무슨 소리예요? 난 괜찮아요.”

    “…….”

    하지만 한번 좁혀진 그의 미간은 좀처럼 다시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게로 향하는 그의 눈빛은 부드러웠지만 뜨거웠다. 

    다시 긴장감이 몰려왔다. 

    두근두근, 심장이 작게 뛰었다. 

    이럴 땐 화제를 전환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나저나 당신 출정 준비 때문에 바쁠 텐데 제가 괜히 시간 뺏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출정 준비는 조쉬가 잘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렇지, 조쉬?”

    제크론의 시선이 단번에 멀론 경에게로 향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브렌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섰던 멀론 경은 제크론의 물음에 퍼뜩 자세를 가다듬었다. 

    “네, 물론입니다. 그럼 전 바쁘니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그래, 잘 부탁하네.”

    허리를 꾸벅 숙인 멀론 경은 바로 나가는 대신 브렌트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뭐라고 속삭였다. 

    지시를 들은 브렌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멀론 경은 응접실을 나섰다. 

    곧이어 캔버스를 누비는 브렌트의 손놀림이 점점 빨라졌다. 

    집중하는 그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작업 시작 전과 후의 얼굴이 완전 딴판이었다. 

    ‘역시 전문가답네.’

    믿음직스러웠다. 

    살짝 입꼬리가 올라갔던 것 같았다.

    대뜸 브렌트가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그 미소 아주 좋습니다, 공작 부인.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해 주세요.”

    “네.”

    “각하께서도 좀 더 편안하게 살짝 미소를 머금는다는 느낌으로 계셔 주시면 좋겠습니다.”

    “흐음…. 알았네.”

    나는 제크론 쪽을 힐끔거렸다. 

    그는 입꼬리를 살짝만 올리는 게 영 힘들었는지 자꾸만 입매를 씰룩거리고 있었다. 

    어설픈 제크론의 모습이 귀여워 푸흣, 웃음이 나 버렸다. 

    제크론의 시선이 단번에 내게로 꽂혔다. 

    “뭐야? 지금 날 비웃는 건가, 당신?”

    “아니, 그게 아니라… 귀여워서요.”

    “뭐어? 귀엽다고? 내가?”

    “네.”

    “전혀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나는 사내에다가, 당신보다 나이도 많고, 몸도 이렇게나 큰데…. 내가 귀엽다니.”

    “그런 것들이랑 상관없이 그래도 귀여운 걸 어떡해요.”

    일단 얼굴이 잘생겼으니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도 다 정답이었다. 

    귀엽다, 섹시하다, 멋지다, 훌륭하다, 아름답다, 근사하다, 사랑스럽다 등등.

    어느 것 하나 틀린 말이 없었다. 

    제크론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를 향해 어깨를 으쓱거리며 생글생글 웃어 보이자, 그도 피식 웃었다. 

    “오! 그거예요! 지금 그 모습 무척 좋아요! 아름다워요! 그렇게 두 분이서 살짝 마주 보면서 미소 지어 주면 좋겠습니다!”

    브렌트가 노래 부르듯 목청껏 외쳐 댔다. 

    아… 뭐라고요?

    제크론과 계속 마주 보라고요?

    더욱 난감해진 주문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다시 긴장감이 몰려왔고, 진땀이 날 것 같았다. 

    그때였다. 

    “당신도 귀여워.”

    “…….”

    제크론이 눈매를 살포시 접으며 웃었다. 

    그의 청량한 미소를 보고 있으려니 나도 자연스레 따라 웃게 됐다.

    어떤 감정이 몽글몽글 뭉쳐지더니 가슴 가득 솟구쳤다. 

    ‘이런 게 행복인 건가? 아마도… 그렇겠지?’

    단단한 행복감 안에 꽁꽁 싸여 있어서 그런지 이게 행복인지 뭔지 분간이 잘 안 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했다. 

    지금 이 순간이 끝나지 않고, 영원히 이어지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는 것. 

    속절없는 바람이었다. 

    사각사각-

    커다란 캔버스 위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연필 소리가 응접실 안을 채웠다.

    째깍째깍-

    있는 줄도 몰랐던 벽시계의 초침 움직이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내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속이 썼다. 

    *   *   *

    브렌트는 침대 위에 누워 디저트를 우걱우걱 씹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끽하는 맛있는 음식과 쾌적한 환경에 날아갈 듯 기뻤다. 

    직접 요리를 하지 않아도, 직접 청소를 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또 동시에 전혀 예상치 못한 행운이 갑자기 날아들어 어안이 벙벙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이 사과 파이는 무척 맛있군!”

    아그작, 아그작, 잘 구워진 파이가 그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오늘 작업을 회고했다.

    첫날 작업치고 무척 순조롭게 진행됐다. 

    특히 윌트슨 공작을 화폭에 담을 수 있는 시간은 내일까지가 전부였기에 작업에 더욱 집중해서 속도를 내야 했다. 

    일단 대강이라도 공작의 전체 모습을 빠지지 않고 담는 게 중요했다. 

    세밀한 부분 작업과 수정은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내일까지 공작의 모습을 얼추 완성하려면 오늘 밤에 미리 작업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는 널찍한 게스트룸 한쪽에 세워진 캔버스 앞에 섰다.

    붓을 들어 색깔을 입히기 시작했다. 

    금방 집중했고, 붓을 든 손이 점점 빨라졌다. 

    그러다가 문득 캔버스에 그려진 두 사람의 웃는 얼굴에 시선이 고정됐다. 

    “두 분 모두 분위기가… 완전 달라졌어.”

    놀라울 정도였다. 

    1년 전 신혼 부부 사이엔 냉랭한 긴장감이 팽팽했다.

    작업하는 내내, ‘표정 좀 푸세요.’, ‘미간에 힘 빼세요.’, ‘웃어 보세요.’와 비슷한 주문을 몇 번이고 반복해야 했다. 

    두 부부 사이에는 대화도 일절 없었다. 

    있어도 날 선 문장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두 부부의 얼굴에서 미소가 자연스럽게 배어 나왔고, 간간히 작은 웃음소리와 대화 소리도 들렸다.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역시 새 생명의 축복 덕분인 건가?”

    흐음…. 브렌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내 싱글벙글 웃기 시작했다. 

    윌트슨 공작 부부의 초상화 작업을 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또 금방 귀족들이 저를 찾아와 작업을 의뢰할 것이 뻔했다. 

    그리고 그들은 물을 것이다. 

    윌트슨 부부에 대해서.

    그들의 질문에 답해 줄 말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브렌트는 다시 붓을 열심히 놀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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