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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5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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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화

    조쉬는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외출 준비를 마쳤다. 

    수도, 라하브에 가서 오늘 당장 작업이 가능한 화가를 구하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투치 씨가 일정이 비어 있다면 좋을 텐데. 뭐, 그럴 가능성이 낮은 것 같지만….”

    브렌트 투치는 1년 전 쯤에 윌트슨 공작 부부의 초상화 작업을 진행했던 화가다. 

    공작 부인이 직접 고른 화가로, 그림체가 정교하면서도 손이 빨라 당시에도 조금씩 인기를 얻어 가는 신예였다. 

    1년 전, 신예에 불과했던 화가는 윌트슨 공작 부부의 초상화 작업 이후 인기가 치솟았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들은 기억이 있었다. 

    조쉬는 브렌트 투치의 작업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헛수고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발걸음을 서둘렀다.

    똑, 똑, 똑!

    마침내 화가의 작업실에 도착한 조쉬는 세게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안에서 들리는 인기척은 없었다. 

    몇 번 더 두드렸지만 마찬가지였다. 

    “안에 없는 건가? 큰일이군.”

    다른 화가를 찾아가야 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삐그덕, 문이 열리더니 까치집 모양으로 머리가 헝클어진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일이죠?”

    금방 잠에서 깼는지 목소리가 푹 잠겨 있었다. 

    졸린 눈은 금방이라도 다시 잠에 빠져들 것 같았다. 

    조쉬는 가벼운 묵례를 하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화가 브렌트 투치 씨가 맞으신가요?”

    “네, 그런데요.”

    “윌트슨 공작성에서 왔습니다. 저는 윌트슨 공작님의 보좌관 조쉬 멀론입니다.”

    “윌트슨 공작성이라고요?”

    브렌트의 두 눈동자가 터질 듯 커졌다. 

    졸음이 확 달아난 얼굴이 됐다. 

    조쉬는 브렌트의 안내를 따라 작업실 안으로 들어섰다. 

    좁은 작업실 안은 난장판이었다. 

    의자 하나는 옆으로 넘어져 있었고, 테이블보는 미끄러져 테이블의 절반 정도만 가리고 있었다. 

    여기저기 쓰레기와 말라붙은 붓이 뒹굴었고, 그리다 만 캔버스 몇 개와 양동이가 구석에 세워져 있었다. 

    조쉬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렇게 좁고, 이렇게 지저분한 곳은 오랜만이라 눈이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윌트슨 공작성에서 어쩐 일로 오신거죠?”

    “화가 선생님을 찾아온 이유가 달리 있겠습니까? 초상화 의뢰를 맡기려고 왔습니다.”

    “윌트슨 공작 부부의 초상화 말인가요?”

    “물론이죠.”

    조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브렌트가 난색을 표하며 쭈뼛거렸다. 

    조쉬는 이 젊은 화가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그의 명성은 1년 전 윌트슨 공작 부부의 초상화 작업을 하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귀족 사회의 이목이 윌트슨 공작성에 집중되고 있었으니, 공작 부부의 초상화를 작업한 화가의 실력을 궁금해하는 자들이 많았다. 

    모르긴 몰라도 그의 몸값은 그새 열 배는 뛰었을 터였다. 

    ‘그런데 은혜도 모르고 이렇게 뻗대는 꼴이라니! 쳇! 그러니 아직도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는 거겠지!’

    조쉬는 속으로 악담을 퍼부었다. 

    하지만 눈치 없는 젊은 화가 브렌트는 조쉬의 속마음을 알 리 없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게… 잊지 않고 또 찾아 주셔서 감사하기는 하지만…. 그, 뭐랄까….”

    조쉬는 쭈뼛거리는 브렌트의 입을 뚫고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에 주의를 집중했다. 

    조쉬의 눈매는 어느새 잘 벼른 칼날처럼 날카로워져 있었다. 

    눈빛만으로도 작업실 안의 뭔가를 단번에 베어 버릴 기세였다. 

    하지만 브렌트는 여전히 그 어떤 눈치도 채지 못한 채 제 할 말만을 느릿느릿 해 나갔다. 

    “…작년 윌트슨 공작성에서의 작업을 떠올리면… 뭐랄까, 그게… 좀 많이 힘들었거든요.”

    “어떤 점이 힘들었습니까?”

    조쉬는 어금니를 앙다문 채 물었다. 

    어금니에 워낙 힘이 많이 들어가서 발음이 조금 뭉개졌지만 역시 브렌트는 눈치채지 못했다. 

    “아시잖습니까? 공작 부인께서 워낙 쉬운 성격이 아니라는 걸요.” 

    “…저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조쉬의 관자놀이의 신경이 빠직, 울렸다. 

    브렌트의 하소연이 이어졌다. 

    “흐음…. 보좌관님께는 그런 내색을 전혀 비치지 않으셨나 보군요? 작년 한 달 동안의 작업 시간은 제겐 무척 고통스러웠습니다.”

    “…….”

    “약속 시간에 맞춰서 가면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못 하겠다 하시기 일쑤였죠. 또 작업에 좀 집중할라 치면 바로 피곤하다 하시며 쉬겠다 하신 적도 부지기수였고요.”

    브렌트의 하소연이 계속 이어졌다. 

    공작 부인의 흠을 타인에게 일러바치는 데 신이 난 것처럼 보여 조쉬는 이를 까드득, 갈았다. 

    “비가 오니 칙칙해서 가만히 앉아 있기 힘들다, 날이 좋아 더워서 가만히 앉아 있기 힘들다…. 끝도 없이 불평불만이 이어졌지요.”

    으으…. 브렌트는 당시의 일을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다. 

    그의 탄식을 가만히 듣고 있던 조쉬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화가 치솟았다.

    ‘감히 네까짓 게 우리 마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정신 줄을 조금이라도 놓으면 금방이라도 주먹이 날아갈 것 같았다. 

    흐음, 후우…. 조쉬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애써 화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오늘 이곳을 찾은 목적에 집중했다. 

    다른 이유 없이 공작 부인에 대한 불평만을 늘어놓는 것을 보아하니, 브렌트는 다른 일정은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잘만 설득하면 오늘 중으로 그를 공작성에 데려갈 수 있으리라. 

    ‘무슨 수를 써서든 이 작자를 데려가야 한다!’

    윌트슨 공작의 명령도 명령이었지만 사실 공작 부인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그리고 지금은….

    ‘이 썩을 놈의 화가에게 우리 마님의 진면목을 똑똑히 보여 주고 싶군!’

    기필코 이 머리가 텅텅 비어 보이는 배은망덕한 녀석을 뉘우치게 해 주리라! 

    조쉬는 이를 꽉 물었다. 

    “가장 최근 받은 작업비의 세 배를 드리지요.”

    “세, 세 배요?”

    “작업이 끝날 때까지는 공작성의 게스트룸에서 지내실 수 있습니다.”

    “공작성의 게스트룸이라니….”

    브렌트는 망설였다. 

    다시는 윌트슨 공작가와 엮이지 않겠노라 다짐했지만 세 배의 작업비에 게스트룸 숙박까지, 그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그저 그런 식당에서 사 먹는 식사보다 귀족의 성에서 대접받는 식사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다르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꼴깍, 그는 입맛을 다셨다. 

    조쉬는 확실히 봤다. 

    브렌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조쉬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단, 작업은 오늘 당장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이라고요? 지금 당장이요?”

    “네. 그리고 공작 각하께서는 오늘과 내일밖에 시간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빠른 작업이 필요합니다. 어떻습니까? 초상화 의뢰를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그, 그게….”

    조쉬의 날카로운 물음에 브렌트는 진땀을 흘렸다. 

    두 부부 중 한 사람의 그림을 먼저 빠르게 작업하는 것은 브렌트에게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윌트슨 공작 부인의 이랬다저랬다 하는 비위를 맞추면서 작업해야 하는 게 역시 걸린단 말이지.’

    끄응, 일그러진 입매를 뚫고 짙은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세 배의 작업비란다. 

    그래도 게스트룸 숙박이란다. 

    이런 제안을 거절한다면 바보, 머저리 취급을 받게 되리라. 

    ‘그래. 원래 돈 버는 건 더럽고 치사한 거 아니던가? 눈 딱 감고 해 보지, 뭐!’

    브렌트는 그 변덕스러운 윌트슨 공작 부인에게 이번 딱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결심이 선 그는 두 눈을 밝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리겠습니다, 초상화.”

    “그럼 어서 씻고, 도구를 챙겨 나오시오. 30분 드리겠습니다.”

    조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브렌트는 후다닥 2층 침실로 달려갔다. 

    어질러진 꼴을 보며 기다리느니 마차 안에서 기다리는 게 낫겠다 생각한 조쉬는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목적을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여전히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후우….”

    마차에 앉은 그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가라앉지 않은 화가 가슴 속에서 들끓고 있었다. 

    조쉬 본인도 지금 이 상태가 의아했다. 

    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공작 부인에 대한 브렌트의 평가는 전혀 생뚱맞은 소리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진실에 가까웠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도 공작 부인을 못마땅하게 여기지 않았던가. 

    모시는 상관의 아내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공작 부인은 확실히 달라졌다. 

    그녀는 고용인들에게 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게 배려해 주는 주인이었다. 

    저가 과로하는 것을 눈여겨봐 주고 인력을 충원할 것을 건의했던 주인이었다.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하다는 의미로 뜻 깊은 선물도 준비해 준 인정 많은 주인이었다. 

    ‘그래, 우리 마님은 좋은 분이셔.’

    몇몇 사람들은 공작 부인이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을 준비를 하면서부터 달라졌다고 했다. 

    새로운 세계를 위한 준비인 것 같다고 했다. 

    맞는 소리처럼 들렸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조쉬가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브렌트가 마차 안으로 올라탔다. 

    “준비 다 됐습니다. 자, 출발하시지요.”

    젊은 화가가 생글생글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라는 옛말은 다 거짓이었다. 

    조쉬는 지금 당장 앞에 앉은 브렌트를 한 대 쥐어 패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느라 두 주먹을 불끈 쥐어야 했다. 

    우락부락한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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