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142)

52화

모든 이들은 동작을 멈추고 닐의 입만을 바라봤다. 

“그게… 차드엘 산맥에서 마물 떼의 습격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일 당장 출장 취재 명령을 받았습니다.”

“마물 떼…요?”

“어머나! 차드엘 산맥이면….”

“맞습니다. 이곳 뎀프샤와도 맞닿아 있어서 윌트슨 공작께서 토벌단에 앞장서시게 될 듯합니다.”

부인들의 걱정 어린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순간 쿵, 심장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이런 전개가 원작 소설에 있었던가?’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원작 소설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엘프윈 윌트슨이 살아 있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 초반 한두 페이지 정도뿐이었다.

상세한 언급 없이 넘어가는 사건들이 많았으리라.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소설의 주인공인 제크론의 신상에 큰 변화를 끼치는 사건은 없었다. 

그러니 이번 마물 토벌단에 제크론이 합류한다고 해도 그는 큰 부상 없이 살아남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나였다. 

마물 토벌 작전은 적어도 몇 주는 걸릴 게 분명했다. 

그사이 진통이 시작되고 출산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엘프윈이 출산하는 날에 제크론이 옆에 있었는지는 원작 소설에 나오지 않았다.

단지 출산 중 죽었다는 언급만 있었을 뿐. 

‘이대로 그를 영영 못 보게 되는 건가…?’

심장 저 안쪽이 묵직하게 아파 왔다. 

닐과 필립이 출장 준비를 위해 서둘러야 했기에 티타임은 금방 끝낼 수밖에 없었다. 

손님을 배웅하고 있는데, 케이트와 주디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내게 닿았다. 

“마님, 안색이 안 좋으세요. 주치의 선생님을 부를까요?”

“아니야. 좀 쉬면 괜찮아질 거야.”

날 걱정하는 하녀들을 뒤로한 채 침실로 향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하아….”

침대에 철퍼덕 눕는데 진득한 한숨이 절로 나왔다. 

눈물도 함께였다. 

“왜 우는 거야…. 바보 같이….”

소매로 눈물을 대충 닦아 내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배가 점점 불러 오고 출산일이 다가올수록 자신감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내가 뭐라고 감히 죽음의 운명에 맞선단 말인가. 

나는 전생에서 죽었다. 

이미 한 번 진 싸움이었다. 

예고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다가온 죽음은 강력했고, 나는 단숨에 잡아먹히고 말았다.

봉긋 솟은 배를 안았다. 

“아가…. 너를 만나고 싶은데… 엄마도 너랑 같이 살아서… 그렇게 살고 싶은데….”

아기를 세상에 남겨 둔 채, 제크론을 다시 보지 못하고 나 홀로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서러웠다. 

흐흐흑, 눈물이 멈추지 않고 줄줄 계속 흘러나왔다. 

팔을 들어 눈물을 닦을 힘도 나지 않았다. 

아침부터 인터뷰 준비하느라 많이 움직였던 탓일까. 

피곤이 몰려왔다. 

그렇게 까무룩 잠이 들었나 보다. 

노크 소리를 듣고 눈을 떴을 땐 날이 이미 저물어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고 침실 안으로 들어온 이는 제크론이었다. 

“자는데 내가 깨운 건가?”

“아니에요. 충분히 잤는걸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가 침대 위에 걸터앉아 나를 마주 봤다. 

“울었어?”

“아….”

눈물 자국이 그대로 있었나 보다. 

고개를 돌려 얼굴을 닦으려 했지만 그가 내 턱을 가볍게 그러쥔 탓에 움직일 수 없었다. 

제크론은 다른 손을 움직여 내 눈물 자국을 닦아 줬다. 

나에게로 향한 그의 눈빛과 손길이 따뜻하고 다정했다. 

“차드엘 산맥에 마물 떼가 나타났다고….”

“이미 들었군. 맞아. 그래서 하루 빨리 토벌단에 합류해야 해.”

“당신도 가는 거예요?”

“물론이지. 차드엘 산맥은 뎀프샤에도 닿아 있으니…. 설마 그래서 운 건가?”

“…….”

“왜….”

왜 우냐는 그의 물음에 나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대신 또다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냥… 걱정돼서….”

“…….”

그는 아무 말 없이 볼 위를 흐르는 눈물을 닦아 줬다. 

잠시 후, 그의 눈가에 장난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엘프윈, 당신 눈에는… 내가 약해 보이는 건가?”

“그런 게….”

“나, 이래봬도 검술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사람들은 날 전쟁 영웅이라고 부르는 건 알고 있지, 당신?”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는 얼굴에 내 여린 심장이 떨렸다. 

청량한 미소가 내게도 전염됐는지, 피식 웃음이 났다. 

“아무리 전쟁 영웅이라고 해도… 전쟁 영웅을 남편으로 둔 아내는 어쩔 수 없이 걱정할 수밖에 없다고요.”

치잇, 나는 부드럽게 눈을 흘겼다.

제크론의 얼굴이 좀 붉어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걱정하는 아내를 둔 남편이니,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돌아오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야겠군.”

중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고요하게 울린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흡, 당황한 나는 숨을 집어삼켰다. 

그의 입술이 볼에 닿았다. 

“아….”

말캉한 감촉에 나는 몸을 떨어야 했다. 

으으…. 너무 가까웠다. 

얼굴에 열이 몰리기 시작했다. 

쪼옥, 쪼옥…. 쪼옥.

뜨거운 숨결을 머금은 보드라운 입술이 볼 위를 누볐다. 

“당신 눈물은 맛있군. 달콤해. 꿀인가?”

“…….”

“또 울어도 좋아, 엘프윈. 내가 다 마셔 줄 테니까.”

어깨에 닿는 그의 손이 무척이나 뜨거웠다. 

내 몸 어딘가를 녹일 기세였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무슨 사달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어깨를 비틀었다. 

“제크론…. 너무….”

그의 몸을 살짝 밀자, 그의 입술이 아쉬운 듯 떨어져 나갔다. 

시선이 마주쳤다. 

푸른 눈동자에 가득 들어찬 것은 분명 강렬한 욕망이었다. 

그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좀 전까지 내 볼 위를 누볐던 그의 입술이 붉었다. 

제크론의 모든 것이 날 유혹하고 있었다. 

날 빨아들이고 있었다. 

‘다시는 이 사람을… 못 보게 될지도 몰라. 이렇게… 마지막이 될지도 몰라.’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끔찍했다. 

괴로웠다. 

그리고… 외로웠다.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 

나를 잃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놀랐는지, 그가 헛숨을 삼키며 멈칫했다. 

하지만 제크론의 주저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그가 내 등허리를 감싸 안았고,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서로의 숨결을 나눠 가졌다. 

*   *   *

늦은 시각이었지만 보좌관실은 등불로 환했다. 

아직 퇴근하지 못한 조수들의 손과 발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출정 준비를 위해 할 일이 많았다.

마지막으로 병사들과 무기의 상태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야 했고, 충분한 양의 식량도 확보해야 했다. 

내일 발 빠르게 움직이려면 오늘 중으로 문서 작업을 완료해야 했다. 

“출정 일정은 사흘 뒤입니다, 각하.”

“그래.”

제크론도 개인 집무실이 아닌 보좌관실에 앉아 보고를 받았다. 

그가 보좌관실에 앉아 있는 것은 몹시 드문 경우였지만 출정 준비를 할 때는 늘 이런 식이었다. 

병사들의 목숨을 걸고 나가는 일인 만큼 만전을 기해야 했으니까 말이다. 

자정이 넘어서야 보좌관실에 겨우 불이 꺼졌다. 

보좌관, 조쉬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각하, 혹시 출정 준비로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

그 질문에 제크론은 엘프윈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지금 이 모습을 초상화에 남기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요.” 

의외의 부탁에 무척 놀랐는데,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초상화 화가를 당장 구할 수 있을까? 내일 당장.”

“화가를… 내일 당장, 말입니까?”

뜻밖의 명령에 조쉬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엘프윈이 많이 불안해하는 것 같다. 출정 전에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 해.”

“아, 그러시군요. 내일 아침 일찍 제가 직접 수도에 다녀오겠습니다.”

제크론의 부연 설명 덕분에 조쉬는 명령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했다. 

마님의 불안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일이니 중요한 일이었다. 

조쉬는 다짐했다. 

유명 화가의 당일치기 섭외는 쉽지 않겠지만 무슨 수를 쓰더라도 해내고 말겠다고. 

*   *   *

목욕 후 침대에 누웠지만 제크론은 쉬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저를 걱정하며 흘리던 엘프윈의 눈물이 잊히지 않았다.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어두운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녀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떠올라 자꾸만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요즘 들어 부쩍 엘프윈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이 좀 올라서 그런가? 아니면….’

다른 이유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이유가 뭐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귀여운 아내가 저를 걱정하며 눈물을 흘려 주었다는 것.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누군가가 저를 위해 눈물을 흘려 준 것은 몹시 생경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낯설었지만, 또 그래서 기뻤다. 

두근거렸다. 

‘이건 마치… 보살핌 받고 있는 것 같군.’

후…. 혼자 생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데 얼굴에서 열감이 느껴졌다. 

몽글몽글 따듯한 기분이 몸 전체에 퍼져 나갔다. 

‘보살핌을 받는다는 건… 사랑받고 있는 거랑 비슷한 건가? 사랑…이라니!’

어두운 침실, 제크론의 두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다. 

사라지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엘프윈의 생각 때문이었다. 

좀 전의 기분 좋은 열감은 이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변해 버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밤새 엘프윈의 생각만 하다가 잠을 한숨도 못 잘 것 같았다.

제크론은 벌떡 일어섰다. 

냉수 목욕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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