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142)
  • 51화

    “윌트슨 공작, 지금 황제 폐하께 특혜를 받고 있다고 자랑하는 겁니까?”

    “자랑이라니요. 그럴 리 있겠습니까?”

    제크론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단지, 제 포부에 대해서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서도 흔쾌히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

    대신관은 제크론의 희미한 미소 안에 담겨 있는 의기양양함이 못마땅했다. 

    감정을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대신관이지만 이번만큼은 무표정을 유지하는 게 힘들었다. 

    단지 전쟁터에서 운이 좋아 이름을 떨친 애송이 군인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공작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지 이제 고작 2년밖에 되지 않은 이 애송이 공작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그가 보여 주는 행정력과 정치력에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었다. 

    다른 무엇보다 제 신념을 먼저 앞세운 그는 거침없이 전진해 나갔다.

    마치 그의 사전에 걸림돌이라는 단어는 없는 사람처럼.

    ‘걸림돌이 없을 리가 있나….’

    후훗, 대신관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대귀족님들의 생각은 잘 들었습니다. 돌아오는 신관 회의에서 이 내용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논의를 거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회의는 일단락됐다. 

    모두가 빠져나간 새하얀 회의실. 

    대신관은 그대로 자리에 앉은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전 제국민을 상대로 한 임산부의 신성수 치료라니?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어린 신관과 신녀를 양성하기 위한 기관을 세운다고?

    불필요한 이야기였다.

    “흐음….”

    대신관의 입술이 벌어지면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얇은 눈썹이 꿈틀거리기도, 이가 으득 갈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순간 그의 입매가 미묘하게 뒤틀렸다. 

    그리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좀 살기 편해졌나 보군, 다들. 그러니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하는 것일 테지.”

    쯔쯧, 대신관은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며 혀를 찼다. 

    그의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발했다. 

    “그러니까 역시… 걱정거리가 아예 사라지면 안 된다니까….”

    후후후, 대신관의 입을 뚫고 흘러나온 웃음소리가 기괴했다. 

    *   *   *

    요소킨 운동실. 

    “바쁘다, 바빠! 자자, 소파는 여기로. 테이블은 거기, 그대로. 좋았어.”

    가구를 들고 우왕좌왕하는 하인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내 손가락이 바빴다. 

    오늘은 디아브 백작 부인네의 신문 기사 인터뷰가 있는 날이었다. 

    인터뷰 장소는 이곳, 운동실이었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게 관건이었지만 그래도 기분 전환 삼아 소파와 테이블의 위치를 바꾸고 새로운 러그를 깔았다. 

    “그래! 이러니까 훨씬 분위기가 산뜻해졌네!”

    화사한 하늘색의 러그 덕분에 운동실 분위기가 한층 밝아졌다. 

    호호,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곁에 섰던 케이트가 날 보며 생글거렸다. 

    “마님, 기분이 좋아 보이세요.”

    “좋지, 그럼.”

    한번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인터뷰 당사자가 아니니 당연히 떨리거나 긴장되는 것도 없었다. 

    널찍하고 단정한 운동실을 자랑하면서 그저 우리끼리의 작은 이벤트를 즐기기만 하면 된다. 

    흡족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마지막으로 운동실을 휘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안으로 들어온 집사장이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마님, 기자들이 도착했습니다.”

    “그래? 여기로 모셔 줘.”

    “알겠습니다, 마님.”

    잠시 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낯의 기자, 닐 베이스와 필립 빙거가 운동실 안으로 들어왔다. 

    “또 뵙습니다, 윌트슨 공작 부인.”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부인.”

    “어서 오세요, 기자님들.”

    운동실을 담은 기자들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하긴 이런 식의 운동실은 제국 어디에서도 구경하지 못했으리라. 

    “와아…. 거울이 상당하군요!”

    “벽면 세 개를 뒤덮는 거울이라니요!”

    그들의 눈동자가 이리로 데굴, 저리로 데굴 굴러다녔다.

    운동실의 모습에 놀라는 기자들의 모습에 내 입꼬리가 자꾸만 위로 솟구쳤다. 

    ‘자중하자, 자중! 품위 있는 호스트답게!’

    중력을 거스르려는 입꼬리를 감추려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곧이어 디아브 백작 부인 일행이 도착했고, 간단한 인사 뒤 바로 인터뷰가 시작됐다. 

    인터뷰는 막힘없이 이어졌다. 

    출신 왕국이 다른 세 친구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우정을 이어 오고 있는지에 대한 문답이었기에 어려울 것이 없었다. 

    초반에는 다소 긴장했던 프렛 백작 부인과 데이비스 자작 부인도 차차 안정을 되찾았는지 얼굴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리고 세 분이 함께 요소킨 운동을 시작하셨다는 말씀이죠? 조금은 생소한 이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닐의 질문에 먼저 입을 연 것은 디아브 백작 부인이었다. 

    “아시다시피 임산부들이 할 수 있는 운동이 별로 없잖아요? 승마나 활쏘기같이 평소에 하던 운동도 아이를 갖고 나서는 하기 어려워지곤 하니 말이에요. 그때 마침 요소킨 운동에 대해서 알게 됐어요.”

    목이 말랐는지 말을 잠시 멈춘 그녀는 호로록, 레몬 티를 마시며 옆에 앉은 프렛 백작 부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녀의 신호를 받은 프렛 백작 부인이 이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한 분뿐이었고, 일정이 다 찼다고 하셨죠. 하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나 하고 있을 때, 운명처럼 윌트슨 공작 부인을 만나게 됐죠.”

    “처음엔 디아브 백작 부인만 요소킨 운동을 시작했어요. 한 시간 운동을 위해서 이 먼 곳 윌트슨 공작성까지 와야 한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고, 게다가 그땐 윌트슨 공작 부인도 잘 모르는 상태였거든요.”

    데이비스 자작 부인이 건너편에 앉은 나와 눈을 마주치며 생긋 웃어 보였다. 

    나도 답례로 그녀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불과 몇 달 전의 이야기인데, 까마득히 먼 옛날이야기 같았다. 

    그땐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낯설었다. 

    내 모습과 이름, 그리고 목소리도.

    게다가 나를 둘러싼 전부 다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몇 달 사이에 많은 것이 익숙해졌고 편해졌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새로운 세계에 완전히 녹아들게 됐다. 

    레몬 티로 충분히 목을 축인 디아브 백작 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쾌활한 목소리가 운동실 가득 청아하게 울렸다. 

    “하지만 곧 이 친구들도 합류하게 됐죠. 운동 자체가 워낙 훌륭했고, 거리 문제는 마법 마차가 해결해 줬으니까요. 게다가 호스트인 윌트슨 공작 부인이 다정한 분인 걸 알게 됐거든요.” 

    “요소킨 운동은 여성들에게 정말 완벽한 운동이랍니다. 앞으로 몇 년 동안 우리들은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게 되겠죠. 길면 10년까지도요. 그 긴 시간 동안 임신 상태인지 아닌지와 관계없이 꾸준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일 거예요.”

    “저희뿐만 아니라, 쉐리던의 많은 여성분들이 요소킨 운동을 시도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친구들과 함께 땀 흘리면서 우정과 건강,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을 테니까요.”

    호호호, 명랑한 웃음소리와 함께 인터뷰는 끝났다.

    지난밤에 미리 연습했던 것일까. 

    그녀들의 완벽한 대사와 표정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자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짝짝짝, 우리는 그녀들의 수고에 박수를 보냈다. 

    평생 인터뷰는 처음이라는 그녀들의 얼굴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가득 피어올랐다. 

    *   *   *

    인터뷰가 끝난 후, 우리는 그대로 운동실의 소파에 앉아 간단한 티 파티 시간을 갖기로 했다. 

    하녀들이 빠른 손놀림으로 테이블 위를 갖가지 디저트로 채우는 사이, 닐이 동그란 뿔테 안경을 추어올리며 나를 봤다. 

    “좋은 기사가 될 것 같습니다. 각기 다른 왕국 출신 귀부인들의 이야기도, 여성들을 위한 새로운 운동 요소킨에 대한 이야기도 모두 훌륭한 기사거리입니다.”

    닐은 흥분한 나머지 침까지 튀기면서 열정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바로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는 게 아닌가.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신 윌트슨 공작 부인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는요, 뭘. 기사와 그림, 둘 다 예쁘게 뽑아 주시리라 믿을게요.”

    호호호, 나는 자연스럽게 부채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어느새 테이블 세팅은 끝나 있었다. 

    테이블 주위에 둘러앉은 귀부인들과 기자들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랜베리 크림치즈 스콘을 한입 베어 문 닐이 콧수염을 쓸어내리며 천천히 맛을 음미하고 있을 때였다. 

    그의 얼굴 전체에 몽글몽글한 행복감이 퍼져 나가고 있는데, 그의 주머니에서 불빛이 번쩍거렸다. 

    “어?”

    닐은 얼른 주머니에 손을 넣어 반짝이는 것을 꺼냈다. 

    납작하고 투명한 마력석으로 만든 통신 장치였다. 

    나도 얼마 전 슈라더 후작 부인에게 받은 적이 있는 통신 장치였다. 

    “실례하겠습니다.”

    닐은 고개를 숙여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웃으면서 나갔던 닐이 다시 돌아왔을 때는 다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네, 그게….”

    닐은 쉬이 말을 잇지 못한 채 입만 달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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