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도론 공녀의 친구들은 그녀의 억지 주장에 대놓고 핀잔을 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동의하지도 못한 채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핸더슨 공녀의 표정 역시 잔뜩 구겨져 있었다.
괴소리가 먹히는 장소와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이 사람들은 아니었다.
“엘프윈이 그러더군요.”
가만히 듣고 있던 제크론이 입을 열자, 거기 모인 모든 여인의 시선이 그의 입으로 향했다.
윌트슨 공작의 청량한 음색은 언제 들어도 듣기 좋았다.
여인들의 눈동자에 기대감이 차올랐다.
“개들이 심하게 짖는 경우는 적으로 간주되는 것의 위협으로부터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한 행동인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결국 두려움의 표현인 것이지요.”
“…….”
“그래서 강한 주인이 자신을 든든하게 지켜 주고 있다고 느끼면 그 안정감으로 인해 짖는 행동이 많이 완화될 수 있다고 하더군요.”
“와아… 공작 부인께서는 어쩜 그리도 동물의 심리를 꿰뚫고 계실까요? 놀랍네요!”
메릴 선생님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도론 공녀의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였지만, 묘하게 설득됐다.
하지만 도론 공녀의 생각은 달랐다.
‘개의 심리? 쳇! 하등한 동물들에게 심리 같은 게 있을 리 없잖아.’
하지만 분위기상 속마음을 다 내비칠 수 없어서 도론 공녀는 입을 꾸욱 다물고 있어야 했다.
“저도 처음엔 놀랐습니다. 아내가 갖고 있는 개에 대한 상식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신선했거든요. 하지만 듣다 보면 다 일리가 있더라고요.”
그때였다.
핸더슨 공녀가 두 눈을 날카롭게 번득이며 제크론의 말꼬리를 낚아챘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상식이라니, 재밌는 표현이에요, 공작님.”
이번엔 모두의 시선이 핸더슨 공녀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매끄럽게 움직였다.
“사실 저도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특히 동물의 정서나 심리에 대해서 했던 말들은 너무도 새로워서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아보기까지 했답니다. 진짜 그런 연구 결과들이 있는지 해서요.”
“…….”
“열심히 찾아봤지만, 이상하게도 제 눈엔 보이지 않더라고요. 왕립 도서관에 있는 동물 관련 책들을 죄다 뒤졌는데도 말이죠.”
“…그래서 영애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제크론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어 최소한의 미소는 유지했지만, 그의 눈매만은 달랐다.
제크론의 푸른 눈동자가 한겨울 찬 바람에 꽁꽁 언 강 바닥처럼 차갑게 번득였다.
“그저 신기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왕립 도서관을 빼곡하게 채운 책들에서도 찾을 수 없는 상식을 공작 부인께서는 어떻게 알고 있을까, 하는 단순한 호기심 말이에요.”
호호호, 핸더슨 공녀의 웃음소리가 테라스를 넘어 정원에 있는 엘프윈의 귓가에도 닿았다.
그 섬뜩한 웃음소리에 엘프윈이 고개를 돌려 테라스 쪽을 봤다.
멀어서 확실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제크론도 제 쪽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 * *
위벨교 대신전의 회의실.
고위 귀족들과 대신관의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제크론을 비롯한 다섯 명의 귀족들이 원탁에 앉아 대신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문이 열리면서 대신관 크레이그 셰넌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사제 두 명도 그와 함께였다.
회의는 빠르게 진행됐다.
오늘 회의의 주요 안건은 신전법의 개정이었다.
그중 가장 첫 번째 논의 대상은 신성 치료 환자의 범위에 대한 것이었다.
“흐음… 옳으신 말씀입니다. 강력한 제국을 만들기 위한 필요조건 중 건강한 아이의 출산 역시 중요한 축을 이루겠지요.”
“동의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한 번의 출산 과정에서 아이와 산모, 둘 다 건강하게 지킬 수 있는 확률이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면 산모를 신성 치료의 환자 범위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는 데에 귀족들이 의견을 모았습니다. 대신관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제크론의 물음에 대신관의 이마 주름이 진해졌다.
윌트슨 공작이 위벨 메시나 증서를 들고 와서 임신한 아내의 신성 치료를 의뢰했을 때부터 어렴풋하게나마 예상했던 일이었다.
불과 두 달 전의 일이었다.
그 시일이 이리도 빠를 줄은 몰랐다.
이 젊은 공작의 말과 행동의 파급력이 제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것에 크레이그 셰넌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불쾌했다.
“임산부들에게 신성 치료를 제공하는 것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모든 임산부들에게 치료를 제공하기에는 치유 신관과 신녀의 수에 한계가 있습니다.”
예상했던 대답이었기에 제크론과 다른 귀족들은 특별히 놀라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차분히 듣고 있던 제크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왕립 아카데미 의학부에 자문을 구한 결과, 유산되기 쉬운 임신 초기와 출산을 앞둔 임신 말기, 이렇게 두 번 신성 치료를 받을 수 있다면 산모와 아이의 건강을 지킬 수 있는 확률이 상승할 것이라 했습니다.”
“한 임산부당 두 번의 신성 치료라니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치유 신관과 신녀의 수가 적습니다. 제국 내 임산부들을 모두 감당하기 벅찹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요.”
같은 말의 반복이었다.
대신관은 임산부 치료의 필요성은 알겠으나 인력 부족을 이유로 들며 신전법의 개정에 반대하고 있었다.
대신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보다 목소리가 조금 더 커져 있었다.
“신성이라는 것이 인력으로 되는 게 아님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늘에서 점지하여 내려 주시는 것, 그것이 신성입니다.”
“…….”
“황제 폐하께서 원한다고 해서, 혹은 제가 원한다고 해서 신관과 신녀의 수가 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대신관의 단호한 음성이 회의장의 공기를 울렸다.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그의 말이 다 맞는 것처럼 들렸으리라.
하지만 제크론은 달랐다.
대신관의 말에 은밀하고 거대한 오류가 있음을 알았다.
신성력은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 맞지만, 신관과 신녀의 수는 대신전에서 조절이 가능했다.
“신성력이 발현되는 열 살 전후의 아이들 중 대신전에서 수용하지 못하여 탈락되는 아이들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크론의 말에 대신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자리에서도, 그 누구의 입으로도 공식적으로 언급된 적이 없는 사실이었다.
지금 제크론 윌트슨 공작의 입에서 언급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대신전은 수용 여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신성력이 발현된 아이들 중 그 부모가 일정 금액의 보호비를 지급한 경우에만 아이들을 받아 신관과 신녀로 훈련시켰다.
신관과 신녀의 양성을 일종의 돈벌이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런 식으로 신관과 신녀들의 수를 제한함으로써 신관과 신녀 한 명, 한 명의 가치를 높이려고 애썼다.
“탈락되는 어린 신관과 신녀들이 없다면 몇 년 후, 신관과 신녀들의 수가 충분히 늘지 않겠습니까. 제국 내 모든 임산부들에게 신성 치료를 제공하는 데 무리 없을 만큼 말입니다.”
“일부 후보 아이들을 탈락시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대신전의 수용 여력이 부족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윌트슨 공작을 비롯한 여기 계신 분들께서는 그 많은 후보 아이들을 수용할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하셨습니까?”
대신관이 원탁에 앉은 귀족들의 면면을 찬찬히 살피며 말했다.
무감한 눈빛과 고저 없는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이 섞여 있지 않았다.
그래서 소름이 끼치도록 섬뜩했다.
하지만 제크론은 아랑곳 않고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뎀프샤에 있는 위벨교 신전과 연계하여 어린 신관과 신녀들을 수용하고 교육시킬 수 있는 시설을 만들고자 합니다.”
“또 뎀프샤입니까?”
허어, 대신관의 입에서 탄식 섞인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바로 다음 말을 이었다.
“뎀프샤에 왕립 아카데미 분교에 이어 왕립 마법 아카데미 분교도 세울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후보 신관과 신녀들의 수용 시설까지 만들겠다고요? 욕심이 많으십니다, 윌트슨 공작.”
뎀프샤에서 진행되는 사업들을 지적하는 대신관의 눈빛과 목소리에 서서히 노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크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특유의 청량한 음색으로 답했다.
그의 입가에 얼핏 미소가 어리는 것도 같았다.
“잘 보셨습니다, 대신관님. 저는 욕심이 많은 편이죠. 뎀프샤에 세우고 싶은 것들이 아직도 더 많습니다.”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잘도… 그런 말을 하십니다.”
“부끄러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고아원과 양로원, 그리고 도서관과 병원 등등 이것저것 영지민을 위한 것이라면 뭐든지 세우고 싶은 것이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
“최대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도록 거대하고, 최고의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양질의 시설을 만드는 것이 뎀프샤 영주로서의 제 목표이자 욕심입니다.”
“허, 참으로 당당하십니다, 윌트슨 공작. 공작은 뎀프샤의 영주이기 전에 제국의 황제를 곁에서 모시는 신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 잇속만 챙기려고 하다니요. 실망입니다.”
점점 날카로워지는 설전에 함께 자리했던 귀족들의 얼굴이 점점 사색이 됐다.
하지만 설전의 당사자인 제크론의 얼굴에는 여전히 여유로움이 넘쳐 났다.
그의 여유로운 모습이 대신관을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이런 제 목표이자 욕심은 황제 폐하께서도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장려해 주고 계시죠.”
“윌트슨 공작, 지금 황제 폐하께 특혜를 받고 있다고 자랑하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