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142)
  • 49화

    “더 중요한 사실요?”

    “뜸 들이지 말고, 어서 말해 줘요!”

    신났네, 신났어,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채 디아브 백작 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은 같은 날에 태어났더라고요! 생일이 같았어요.”

    “어머머머! 대단한 인연이었네요!”

    “같은 날에 태어난 사람과 일생에 단 한 번 만나는 것도 힘들 텐데, 두 분은 서로 친하기까지 했으니… 로맨틱해라!”

    나에게로 향한 부인들의 눈동자는 흡입력 강한 로맨스 소설을 읽고 있는 어린 소녀들의 눈동자와 흡사했다.

    하지만 그녀들이 아무리 나를 열심히 쳐다봐도 나는 그녀들에게 딱히 해 줄 말이 없었다.

    뭐 아는 게 있어야 해 줄 말이 있지.

    어깨를 으쓱거리며 민망하게 웃었다.

    “그렇게 보셔도 소용없어요. 정말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저런…. 부인들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기억을 잃은 나를 위한 탄식인지, 재밌는 과거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저들을 위한 탄식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디아브 백작 부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열여덟 번째 생일파티를 두 가문이서 같이 열었더라고요. 가문끼리도 왕래가 잦았었나 봐요. 어때요? 제 정보력?”

    후훗, 그녀가 흡족하게 웃으며 나를 봤다.

    그 모습이 꽤 귀여워서 푸흡, 하고 웃고 말았다.

    “정말 놀라워요, 디아브 백작 부인! 훌륭한 집념과 더욱 훌륭한 정보력이세요! 그건 그렇고 신문 인터뷰 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재빠른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게 또 매우 그럴듯하게 먹혀들었다.

    인터뷰 당사자 셋은 깜짝 놀라며 긴장했고, 메릴 스웨이드 선생님 역시 요소킨 운동에 대한 기사가 나올 것에 대한 기대에 얼굴이 환해졌다.

    인터뷰 일정이 바로 내일이었으니, 그들 머릿속에 로저먼드 월시에 대한 것은 싹 다 휘발되고 말리라.

    휴우,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내 귀여운 운동 친구들을 바라봤다.

    *   *   *

    ‘윽, 저런.’

    오늘 일과 중 난이도 최상의 일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제나 핸더슨 공녀와 메리엔 도론 공녀를 맞이하는 일정 말이다.

    오늘 그녀들은 친구 둘과 함께 요소킨 수업을 처음으로 들으러 오는 날이었다.

    디아브 백작 부인 일행을 보낸 나는 다시 젊은 귀족 영애들을 맞았다.

    앞으로는 굳이 그들을 직접 맞이할 필요 없겠지만, 오늘은 그들이 윌트슨 공작성에 방문하는 첫날이고, 나는 이 공작성의 안주인이었기에 마땅한 예의였다.

    “어서 오세요, 모두들.”

    굳었던 표정을 풀고, 더없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새로운 손님들을 맞았다.

    마차에서 내린 귀족 영애들은 공작성을 휘 둘러보며 입을 떡 벌렸다.

    “와아, 윌트슨 공작성이 훌륭하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실물로 보니 훨씬 더 대단한 곳이군요! 놀라워요!”

    “어마어마하게 거대하군요! 황궁과 견주어도 꿀리지 않을 정도예요!”

    윌트슨 공작성에 대한 칭찬에 우쭐해진 내 어깨가 들썩였다.

    간단한 통성명이 끝나자 나는 그들을 운동실로 안내했다.

    “와아!”

    “거울이 이렇게나 크다니!”

    거울로 가득 채워진 운동실의 세 벽면을 본 귀족 영애들의 입이 다시 벌어졌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세요.”

    귀족 영애들을 메릴 스웨이드 선생님에게 넘긴 나는 얼른 몸을 돌렸다.

    일분일초라도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도론 공녀와 말을 섞을 기회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론 공녀의 하이톤 목소리가 내 목덜미를 붙잡았다.

    “이따 운동 후에 우리 웨이 좀 보러 가도 될까요?”

    순간 한쪽 관자놀이의 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아니, 이 여자가 대체 뭐라는 거야?

    홱 몸을 돌려 도론 공녀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비뚜름히 올라가 있었다.

    지난 만남에서 분명 안 된다고 했는데, 그때의 내 말은 싹 다 무시하려는 심산인 것 같았다.

    강아지에게 ‘위든’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 줬다고도 말했는데, 그녀는 버젓이 옛날 이름인 ‘웨이’로 강아지를 부르고 있었다.

    ‘지금, 나 도발하려는 거 맞지?’

    나를 도발하려는 입은 하나가 아니었다.

    “맞아요. 저희도 웨이를 못 본 지 너무 오래돼서 한번 보고 싶네요.”

    “웨이, 그 귀여운 녀석 잘 지내죠?”

    “꼭 보고 싶어요. 보여 주실 거죠, 윌트슨 공작 부인?”

    네 명의 귀족 영애들이 눈동자를 반짝이며 나를 바라봤다.

    반짝이는 그녀들의 눈동자에 깃든 것은 희망이나 바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괴롭힘이었고, 또 조롱이었다.

    ‘이것들이… 다 짜고 왔구나!’

    순간 화가 치솟아 머릿속이 하얘지고 있는데, 어디선가 귀에 익은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입니다, 영애들.”

    목소리가 나는 쪽을 보니 제크론이 서 있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부드러워 보였지만, 얼핏 미묘한 서늘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위든입니다, 웨이가 아니라. 강아지의 새로운 이름 말입니다. 아내가 도론 공녀와 핸더슨 공녀에게 이미 말했다고 알고 있는데, 벌써 잊었나 보군요.”

    “아, 맞다. 깜빡했어요. 호호.”

    “아직 젊은데도 불구하고 기억력이 안 좋다니 걱정되겠습니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제크론이 두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곱게 접으며 소리 내 웃었다.

    새하얀 미소에 영애들이 넋이 나간 듯 황홀하게 그를 올려다봤다.

    “농담이라니요. 호호호.”

    “말씀도 참 재밌게 하시네요, 윌트슨 공작님께서는. 호호호.”

    역시 남자 주인공의 존재감은 끝내줬다.

    그의 말 한마디가, 행동 하나가 분위기를 금세 바꿔 놓았으니 말이다.

    제크론에게 감사할 일이 하나 또 생겼다.

    *   *   *

    원래 요소킨 운동이 끝난 후, 운동실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허브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것이 루틴이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담소의 시간을 테라스가 있는 3층 응접실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티테이블은 테라스에 세팅됐다.

    테라스 아래로는 잘 정돈된 정원이 보였는데, 엘프윈과 강아지 위든이 산책 중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밖에 위든을 보여 드릴 수 없어서 죄송하지만, 부디 이해 부탁드립니다.”

    제크론이 영애들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중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렸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 중인 상황에서 전 주인을 만나게 되면 위든이 헷갈려 할까 봐, 그래서 괜히 오해해서 불안해할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머, 강아지의 마음까지 세심하게 헤아려 주시는 모습이 정말 고우세요.”

    메릴 스웨이드 선생님이 두 손을 모으며 외쳤다.

    순진한 눈빛을 반짝이는 선생님을 향한 도론 공녀와 핸더슨 공녀의 시선이 곱지 못했다.

    “다 아내의 생각입니다. 엘프윈은 강아지가 공작성에서 하루하루 편안한 기분으로 지내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공작 부인이 강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군요!”

    엘프윈을 찬양하는 메릴 선생님의 목소리에 도론 공녀가 인상을 팍 썼다.

    이를 눈치챈 핸더슨 공녀가 이종사촌의 옆구리를 꾸욱 찔렀다.

    표정 관리 좀 하라는 신호였다.

    “네. 아내가 그러더군요. 사람의 수명은 70년 정도지만, 개들의 수명은 10년 정도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개들의 하루는 인간의 하루보다 일곱 배 소중하다고 말입니다.”

    “일곱 배 소중한 하루라니! 처음 듣는 개념이지만, 정말 맞는 말이네요! 공작 부인의 신박한 생각에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제크론과 메릴 선생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핸더슨 공녀가 대뜸 끼어들었다.

    “공작 부인의 어떤 생각에 깜짝 놀라셨나요, 선생님? 공작 부인의 신박한 생각을 저희에게도 공유해 주세요.”

    호호, 핸더슨 공녀의 간드러진 웃음소리에 제크론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반면, 신이 난 메릴 선생님은 밝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첫 만남부터 그랬지요.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요소킨 운동법에 대해서 큰 확신을 가져 주셨어요.”

    메릴 선생님은 엘프윈과의 첫 만남을 회상하며 말을 이었다.

    “어찌나 감사하던지요. 요소킨 운동법을 만든 저조차 확신이 없었는데, 공작 부인께서는 요소킨 운동은 금방 인기를 얻고, 큰 사업으로까지 확장할 수 있다며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답니다.”

    “…윌트슨 공작 부인이 그런 말까지 했었군요.”

    “네. 그뿐만 아니라, 운동 강의실을 제공해 주시는 열의까지 보이셨죠. 덕분에 이렇게 오늘 영애들과 함께하게 된 것이고요.”

    메릴 선생님의 얼굴이 뿌듯한 감격으로 빛났다.

    “저택에 상주하는 실내악단을 고용하신 것도 순전히 윌트슨 공작 부인의 제안이라고 들었어요. 정말 훌륭한 제안이라고 생각해요.”

    “어머머, 그러고 보니… 공작성에 들어설 때부터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 음악 소리 덕분이었군요!”

    내내 가만히 있던 도론 공녀의 친구 중 한 명이 탄성을 내질렀다.

    엘프윈에 대한 칭찬이 이어지자 제크론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그때였다.

    바람을 타고 엘프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옳지, 잘했어, 위든! 이번에도 또 잘할 수 있지? 믿는다! 얏!”

    엘프윈이 공을 던지자, 위든이 잽싸게 달려가 공을 주워 왔다.

    “옳지, 우리 위든 천재네, 천재!”

    한차례 폭풍 칭찬을 퍼부은 뒤, 엘프윈은 다시 공을 던졌다.

    인간과 강아지의 공놀이가 한동안 이어졌다.

    “어머나! 웨이가, 아니지, 새 이름이 위든이라고 했죠? 위든이 이렇게 안 짖는 건 처음 봐!”

    “그러게 뭐만 하면 왕왕, 시끄럽게 짖어 대던 꼬마였는데, 신기하네!”

    도론 공녀의 친구들이 강아지의 새로운 면모에 놀랐는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도론 공녀가 이때다, 싶었는지 도끼눈을 뜨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짖지 못하게 하려고 윌트슨 공작 부인께서 너무 엄격한 훈육을 한 건 아닌지 걱정되네요. 강아지는 짖는 것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건데, 짖지 못하게 하면… 사람한테 말하지 말라는 거랑 뭐가 다르겠어? 위든이 답답해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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