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142)
  • 48화

    다들 아는 내용이다, 유명한 말이다, 라고 하는데 그 앞에서 ‘아니, 난 안 들어 봤는데?’라고 용감하게 대꾸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도론 공녀와 핸더슨 공녀는 역시 극소수에 포함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 뭐, 네.”

    떨떠름한 표정의 핸더슨 공녀가 어물쩍 대답했다.

    그럼 그렇지.

    생긋,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공녀들께서도 들어 보셨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럼 제가 걱정하는 부분도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해요.”

    “…….”

    “위든이 새로운 환경에 좀 더 안정적으로 적응한 후에 만나면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날은 절대 오지 않으리라!

    당신들의 그 섬뜩한 눈동자에 우리 위든을 담게 할 리 없잖아!

    속으로 악담을 퍼부으면서도 살포시 눈을 접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어정쩡하게 서 있는 그녀들을 뒤로하고 내 갈 길을 갔다.

    마차에 올라타는데 갑자기 현기증이 일었다.

    “아!”

    “괜찮으십니까, 마님?”

    “좀 어지러워서요. 오늘 말을 너무 많이 했나 봐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까 제대로 한 방 날리시던데요? 그런데 정말로 동물들에게도 정서가 있나요? 그런 연구가 있나요? 저는 못 들어 봐서요.”

    윽, 의학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매튜가 들어 본 적 없는 걸 보면 이 세계에서는 아직 그런 연구들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리며 해맑게 말했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기억이 있어요. 제국에서는 아닐지라도 분명 어디선가는 그런 연구를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렇군요. 자, 등을 기대 눈을 감고 계세요. 그래도 계속 어지럽다면 말씀해 주세요. 그땐 약을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매튜.”

    그의 지시대로 두 눈을 감고 폭신한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대앉았다.

    침대에 드러눕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   *   *

    제나 핸더슨 공녀와 메리엔 도론 공녀는 쇼핑을 시작하기도 전에 쇼핑할 마음이 싹 다 가셔 버렸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일단 디저트 가게로 들어갔다.

    달달한 간식을 먹으면 조금 기분이 나아질까 싶어서였다.

    “아니! 조금도 나아지지 않아! 오히려 기분이 더 잡쳐지는 것 같아!”

    “목소리 낮춰, 메리엔.”

    도론 공녀의 짜증에 핸더슨 공녀가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저택에서는 마음대로 소리치고 짜증 내도 되지만 여기는 사람들의 눈이 따라붙는 공공장소였다.

    교양 없이 언성을 높이는 행동은 괜한 구설수를 만들 수 있으니 조심, 또 조심해야 했다.

    “강아지의 정서라고? 허, 참! 내 어이가 없어서! 너 진짜 그런 얘기 들어 본 거 맞아?”

    “아니.”

    메리엔의 물음에 제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힘없이 저었다.

    교양과 상식이라면 귀부인들 중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던 제나였다.

    그런데 윌트슨 공작 부인이 다들 아는 얘기라며 읊었던 동물의 정서에 대한 내용은 듣도 보도 못한 내용이었다.

    “너도 모르는 사실을 그 여자는 어쩜 그렇게 잘 알고 있을까? 다 거짓말 아니야? 그냥 지어낸 얘기.”

    “…그렇겠지? 그럴 거야.”

    그 여자가 알고 있는 걸 내가 모를 리가 없으니까, 제나의 꽉 말아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메리엔이 초코머핀을 우걱우걱 씹고 삼켰다.

    다행히 기분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다.

    냅킨으로 입가를 찍어 누른 메리엔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여자 좀 신기한 것 같아.”

    “뭐가?”

    “요소킨 운동을 하는 것도 그렇고, 수업을 듣기 위해 운동실을 공작성에 만들어 준 것도 그렇고… 상주 실내악단을 고용하는 것도 그렇고, 또 오늘은… 강아지의 정서라는 난생처음 들어 보는 개념을 말하는 것도 그렇고….”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

    “그 여자 아무래도…. 좀 또라이 같아.”

    메리엔이 실실 웃으며 곧게 뻗은 검지를 빙글빙글 돌렸다.

    “예전부터 좀 이상하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이 정도로 존재감 강력한 또라이는 아니었잖아? 뭔가 이상해. 또라이가 분명해.”

    거기까지 말한 메리엔이 다시 초코머핀을 한 입 베어 물고는 우걱우걱 씹었다.

    이젠 좀 기분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역시 디저트 최고!

    제나는 디저트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메리엔은 제나에게 말을 거는 대신 가만히 제 앞에 놓인 디저트들에 집중했다.

    평상시의 제나는 유순하고 친절하지만, 상념에 빠진 걸 방해하면 무척 악독해지는 경향이 있으니 조심해야 했다.

    얼마 후, 드디어 제나가 입을 열었다.

    “…듣고 보니 정말 이상하긴 하다.”

    “뭐가? 아, 윌트슨 공작 부인 얘기야? 그렇다니까! 이상하다니까, 그 여자.”

    “한번 앓고 난 뒤 머리에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 있던데… 정말 그런가?”

    “어머, 그럼 그 소문이 맞나 보다! 많이 아프고 난 후에 겁대가리를 상실한 거야!”

    “흐음….”

    제나의 눈썹 사이가 잔뜩 좁아지며 짙은 주름이 생겼다.

    윌트슨 공작 부인의 최근 행보는 무척이나 남달랐고 그래서 미심쩍었다.

    궁금한 것은 그대로 넘기지 못하는 성미의 제나 핸더슨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깜짝 놀란 메리엔이 눈빛으로 물었다.

    “좀 알아봐야겠어. 넌 먼저 돌아가. 나는 도서관에 좀 다녀올 테니까.”

    “진짜 이렇게 도중에 간다고? 제나야!”

    메리엔은 제나를 붙잡아 보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   *   *

    요소킨 운동 수업이 끝난 운동실 안은 열기로 후끈했다.

    “역시 운동으로 땀 빼는 것만큼 개운한 것도 없다니까요!”

    “맞아요. 묵은 체증이 쑤욱 내려가는 것 같아요!”

    운동 후, 담소 타임이 왔다.

    부인들은 운동도 좋아했지만, 담소 타임은 더욱 좋아했다.

    “어머나, 데이비스 자작 부인처럼 속 편한 분께서 묵은 체증이 있을 리가요!”

    “아휴, 모르는 소리 마세요. 요즘 날도 우중충해서 그런지 기운도 없고… 아무튼 그래요.”

    데이비스 자작 부인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하자 다정한 위로의 말들이 뒤따랐다.

    그때였다.

    디아브 백작 부인이 우렁차게 외쳤다.

    “그런데 우리 뭐 까먹은 거 있지 않아요?”

    “까먹은 거 뭐요?”

    “모르겠는데요. 뭔데요?”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디아브 백작 부인이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윌트슨 공작 부인의 수수께끼 남성분이요!”

    “어머낫! 맞아요!”

    “완전 잊고 있었네요!”

    뜨헉. 순간 숨을 삼켰다.

    꺄악, 소리까지 지르는 부인들 틈에서 나는 절망했다.

    사실 나는 수수께끼 남성에 대해서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었다.

    일주일 내내 까맣게 잊고 있다가도 요소킨 수업 날 아침이면 불현듯 수수께끼 남성의 존재를 떠올리고는 했다.

    그리고 조금 떨었다.

    다른 부인들이 그의 신원을 알아낼까 봐.

    그리고 그가 엘프윈의 내연남 같은 존재일까 봐.

    꼴깍, 마른침을 삼킨 나는 디아브 백작 부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의기양양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걸렸다.

    “간단했어요. 윌트슨 공작 부인은 서덜랜드 출신이잖아요. 그래서 그 주위에 있는 영지들의 귀족들을 살폈죠.”

    “대단하세요, 디아브 백작 부인. 나는 말만 신나게 하고 진짜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거든요.”

    “그런데 디아브 백작 부인은 행동으로 재빨리 옮기셨네요!”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말이죠, 나는 두근두근 떨리는 가슴을 안고 디아브 백작 부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뭐, 그러고는 열심히 뒤졌죠. 그 수밖에는 없잖아요? 먼저 공작 부인과 비슷한 나이 또래의 귀족 자제를 찾아서 목록을 만들고 천천히 조사하기 시작했죠.”

    “와아… 대단한 집념이세요! 훌륭해요.”

    “그런데 디아브 백작 부인, 죄송하지만 저기… 중간 과정은 생략하고 결과만 말해 주시면 안 될까요? 사실 중간 과정이야 어찌 됐든 상관없잖아요. 그 잘생긴 남성분이 누군지만 중요하죠.”

    “맞아요. 어서 말해 주세요. 네?”

    모두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밝게 빛났다.

    그런가요? 크흠, 디아브 백작 부인은 헛기침을 하면서 목청을 가다듬었다.

    부인들의 애를 태우려 뜸을 들이는 것 같았다.

    이분, 뭘 좀 아는 분이었다.

    “이름은 로저먼드 월시. 월시 공작가의 장남이에요. 남부의 메드록 지역의 영주더라고요. 금발에 녹안. 아직 미혼. 그리고 가장 중요한 윌트슨 공작 부인과의 관계는….”

    “관계는?”

    아니, 이 사람 좀 보게!

    거기서 그렇게 임팩트를 주는 건 대체 왜인가요!

    순간 적막이 흘렀다.

    떠들썩한 여인들 다섯이나 모인 공간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숨소리조차 만들지 않는 그녀들이었다.

    디아브 백작 부인이 빙긋, 웃었다.

    내 입장에서는 매우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흐읍, 숨을 크게 들이마신 그녀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둘이 매우 각별한 사이였던 것 같더라고요? 윌트슨 공작 부인의 데뷔탕트에 에스코트 한 남성분이 월시 소공작이라는 것 같았어요!”

    “어머머머!”

    “데뷔탕트 에스코트면…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겠네요?”

    부인들은 내 눈치를 살피면서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별 대수로운 내용이 아니어서 내심 안도했다.

    엘프윈과 로저먼드 월시라는 남자는 어렸을 때 자주 왕래하던 친한 사이였으리라.

    그뿐이리라.

    디아브 백작 부인의 우렁찬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자, 자! 그게 다가 아닙니다, 여러분!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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