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142)
  • 47화

    그날 밤, 잠에 쉬이 들 수 없었다.

    이미 침대에 누운 지 오래였지만, 계속 뒤척이고만 있었다.

    자꾸만 제크론의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등불에 일렁이던 붉고 도톰한 입술이, 이마에 닿았던 보드랍고 말캉했던 감촉이, 단단한 가슴속에서 열렬히 뛰고 있던 심장 고동 소리가 내 머릿속을 완전히 장악했다.

    “당신은 내 아내이고, 우리 아이 때문에 여러모로 고생하고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옆에 있어 주는 것밖에 없어서…. 그래서….”

    천천히 더듬더듬 내뱉었던 그의 고백이 귓가에 맴돌았다.

    두근두근.

    굵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내 심장을 감싼 것 같았다.

    “그래서 많이 반성했어. 당신이 아팠던 게… 그래서 기억을 잃은 게 다 내 탓인 것 같아서 말이야.”

    자책하는 어두운 목소리가 내 가슴을 후벼 팠다.

    “…당신 탓이 아니에요. 저쪽 세계에서 죽어 버린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이 세계로 흘러 들어와 엘프윈의 몸을 차지했기 때문이지.”

    조용히 혼잣말을 읊조렸다.

    하아, 무거운 한숨을 뱉어 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는 잠이 들 것 같지 않았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실과 작은 문으로 연결된 개인 서재로 갔다.

    그리고 엘프윈의 일기장을 폈다.

    이 세계에서 처음 눈 떴을 때 조금 읽다가 너무 부끄러워진 나머지 그대로 덮어 둔 일기장이었다.

    다시 차근차근 일기장의 내용을 읽어 봤다.

    엘프윈은 제크론을 원망하면서 험한 말을 길게도 늘어놓았다.

    유치한 단어들의 나열이었지만, 날것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었다.

    “엘프윈, 제크론은 꽤 괜찮은 사람이야. 바보나 멍청이, 혹은 말미잘 같지 않아, 전혀. 다정하고 따뜻하기까지 한걸.”

    일기장에 손을 얹고 속삭였다.

    내게 몸을 주고 사라져 버린 엘프윈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었다.

    “제크론은 네게 미안하댔어. 앞으로 잘하겠대. 그러니까 제크론을 용서해도 되겠지? 마음을 열어도 되겠지?”

    나도 모르는 새에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분명 오락가락 호르몬 때문일 터였다.

    “그리고… 미안해. 네가 충분히 느끼지 못했던 남편의 관심과 애정을…. 나만 누리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네가 느꼈어야 했던 것들을 나 혼자 독차지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정말 미안해.”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   *   *

    수도에 있는 왕립 마법 아카데미에 갔던 일은 잘 해결됐다.

    부족한 마부의 수를 채우기 위해서 재학생들 중 파트타임 희망자를 받아서 일할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하러 갔었다.

    왕립 아카데미의 수강 자격은 귀족 자제들에게만 부여되지만, 마법 아카데미의 경우는 마나를 운용하는 능력만 있다면 신분에 상관없이 수강생이 될 수 있었다.

    수업료는 면제라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평민 학생들의 경우 부모의 도움 없이 생활비를 스스로 충당해야 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는데, 그런 학생들은 파트타임 일자리를 절실히 원했다.

    “학생들에게 좋은 기회가 되겠군요. 제안 감사합니다. 희망자를 조사하여 명단을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뽀글뽀글 까만 곱슬머리의 교장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윌트슨 공작께서 마법 아카데미의 분교 설립까지 계획 중이시라니. 저희야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허허허,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교장의 집무실을 넘어 복도까지 울려 퍼졌다.

    *   *   *

    “윌트슨 공작가 덕분에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것 같습니다.”

    교장과의 면담이 끝나고 복도를 걸어가는데 알타라스의 길드장 카일러가 싱글벙글 말했다.

    그의 생각에 적극 동의하는 바이지만, 나는 조금 겸손한 모습을 보이고 싶기도 했다.

    “아닙니다. 워낙 사업 아이템이 훌륭했던 탓이지요.”

    “공작 부인께서는 겸손하기까지 하시군요! 제발 모자란 부분이 한 군데라도 있다고 말씀해 주세요. 안 그러면 전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오늘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것 같습니다.”

    “어머나, 말씀도 참 재밌게 하시는군요! 호호호.”

    시도 때도 없이 날아오는 칭찬은 시도 때도 없이 듣기 좋으니, 계속 쉬지 말고 들려주세요!

    즐거운 내적 외침은 목소리의 형태 대신 표정의 형태를 띠며 내 얼굴 전체에 퍼져 나갔다.

    “새로운 마차 제작은 잘 진행되고 있나요?”

    카일러는 보통의 4인용 마차 대신, 그 두 배에 해당하는 8인용 마차를 제작하겠다고 했다.

    꽤 괜찮은 생각이었다.

    마차의 크기를 키우면 마차 한 대와 마부 한 명이 감당할 수 있는 인원수가 늘어나니 일정 짜기가 좀 더 수월해질 터였다.

    “명심해 주세요, 휴스턴 경. 신속한 일 처리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확실한 안전성이라는 것을요.”

    “물론이죠.”

    “부주의로 인한 사고는 절대 일어나면 안 돼요. 안전성에 대한 신뢰도는 한 번 깎이면 다시 회복하기 어렵거든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공작 부인.”

    카일러는 자신 있다는 듯 듬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내 걱정은 계속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왜냐하면 원작 소설에서 마법 마차 사고 관련한 에피소드가 생각나 버렸거든.’

    여자 주인공인 베로니카에게 일어났던 사고였다.

    원래 목적지와는 다른 곳으로 가게 되면서 길을 잃고 제크론과 길이 엇갈리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다시 만나기는 했지만.

    ‘다시 만나서 격렬하게 포옹하고, 키스를 나눴었나? 아니면 뜨거운 밤을 보냈나?’

    키스라니….

    뜨거운 밤이라니….

    요즘 시도 때도 없이 제크론과 베로니카의 러브신이 떠올라서 난감했다.

    내 머리 위를 몽글몽글 떠도는 요상망측한 상상의 장면들을 내쫓으려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집중하자, 집중! 내가 무슨 생각을 하다가 망측한 장면으로까지 갔지? 맞다, 마차 사고!’

    그와 비슷한 사건이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으므로 나는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해서 계속 카일러를 단속시키게 되리라.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라 정신없는 와중에 카일러의 감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마차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안전성 문제를 깐깐하게 챙기시는 모습이… 역시 제 사업 파트너가 되기에 매우 적절합니다.”

    “휴스턴 경, 어제 확실히 말씀드렸잖아요. 사업 파트너까지는 못 한다고.”

    내가 난색을 표하자, 카일러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변하는 게 사람 마음입니다. 그러니 기다리다 보면 공작 부인의 마음이 이쪽으로 기울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무릇 사람이란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한 줄기 제 희망을 짓밟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공작 부인.”

    “…네. 그러세요. 그 희망… 잘 가꿔 보세요.”

    더 이상 말리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섰다.

    오늘 분의 기운을 거의 다 쓴 것 같으니 재충전이 필요했다.

    윌트슨 공작성으로 돌아가야 했다.

    *   *   *

    매튜와 함께 마차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얼굴들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 일진 무척이나 좋았는데, 좋은 일진도 이제 끝인가 보구나.’

    마법 아카데미 교장과의 볼일이 다 끝난 뒤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가, 라며 속으로 구시렁거리고 있을 때였다.

    제나 핸더슨 공녀와 메리엔 도론 공녀가 내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윌트슨 공작 부인.”

    “오랜만입니다, 공작 부인.”

    그녀들의 다소곳한 인사에 나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핸더슨 공녀, 도론 공녀.”

    “덕분에요. 저희가 요소킨 운동 수업을 들으러 윌트슨 공작성에 가게 된 건 알고 계시죠?”

    “네, 물론이죠. 메릴 스웨이드 선생님께서 무척이나 기뻐하시던걸요.”

    “무척이나 기대된답니다. 부인과 같은 수업은 아니지만 오며 가며 종종 뵐게요.”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얼굴만 아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말이다.

    “그럼 곧 뵙겠습니다. 전 이만.”

    묵례를 까딱하고 돌아서려는데, 도론 공녀의 하이톤 목소리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우리 웨이는 잘 지내고 있나요?”

    그녀의 입은 방긋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감히 귀여운 강아지를 학대한 주제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먼저 그 이름을 입에 올리다니!

    괘씸해!

    나 역시 입꼬리를 바짝 올려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두 눈은 바짝 힘을 줘 뾰족하게 만들었다.

    “물론이죠. 새로운 이름을 지어 줬어요. 위든이라고요. 제 둘도 없는 산책 친구가 되었답니다.”

    “위든이라니….”

    “위든이 아침, 저녁으로 정원 산책을 같이 해 주는 덕분에 심심할 틈이 없지 뭐예요.”

    “…….”

    “호기심이 무척 강한 친구더라고요. 깡충깡충 잘 뛰기도 하고, 이곳저곳 냄새 맡는 것도 좋아하고 말이에요. 강아지와의 산책이란 무릇 그래야죠. 마차에 매달고 달리게 하는 게 아니라요.”

    “그, 그건 그때 한 번뿐이었다고요!”

    도론 공녀가 욱하며 언성을 높이자 핸더슨 공녀가 그녀의 팔을 세게 붙잡았다.

    참으라는 신호였다.

    다행히 도론 공녀는 핸더슨 공녀의 신호를 잘 받아들였다.

    입을 꾹 다문 도론 공녀 대신 핸더슨 공녀가 입을 열었다.

    “웨이가… 아니지, 위든이 새로운 환경에서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이번 방문에서 요소킨 수업이 끝나면 잠깐 만나 봐도 될까요?”

    “그건… 솔직히 망설여지네요. 아직 새로운 환경에 적응 중인데, 전 주인을 만나는 게 강아지의 정서에 좋을 것 같지는 않아서요.”

    “강아지의 정서라고요?”

    둘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다시 도론 공녀의 하이톤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보여 주고 싶지 않으면 그냥 보여 주고 싶지 않다고 말하세요. 강아지의 정서라니,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예요?”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저 기세를 보라.

    이쯤 하면 싸우자는 거다, 이 여자.

    하지만 싸우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뭐랄까…. 그녀들의 무지가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인간에게 감정이 있는 것처럼 동물들에게도 감정이 있답니다. 특히 강아지처럼 영리한 동물들은 더욱 그러하죠. 이미 많은 동물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고 발표된 내용이랍니다. 물론 공녀들께서도 들어 본 적 있으실 거예요, 그렇죠?”

    슬며시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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