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우리 주치의가 오늘 당신의 활약에 무척 놀란 눈치였어.”
저녁 식사 후, 나는 제크론과 함께 이미 어두워진 정원을 천천히 걷고 있었다.
정원 곳곳에 설치된 환한 등불 덕분에 야간 산책이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대낮에 하는 산책과는 분위기가 달라서 좀 더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추워지기 전에 종종 저녁 산책도 즐겨야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벌써 보고받은 거예요? 부지런하네요, 당신.”
“당신에 대한 일인데 게으를 수 없지.”
또, 또 그런다.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대사를 더해 버리면 엘프윈의 작은 심장은 감당이 힘들어진다고!
두근두근.
봐라, 벌써부터 정신없이 뛰는 거.
“특히 당신이 마법 마차의 이름을 지었다며 놀라던데.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한 거지?”
“처음 ‘마법 마차’라는 단어를 봤을 때부터 좀 어색했거든요. 이름을 붙여 주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을 이번 기회에 제안했을 뿐이에요.”
전생에서 원작 소설을 읽으면서 했던 생각이었다.
활동 영역이 광범위했던 제크론이 주요 이동 수단으로 사용했던 마법 마차.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였는데, 자꾸만 내 신경에 거슬렸었다.
소설에의 몰입을 방해할 정도로 말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이름을 붙일지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길드 이름이 괜찮길래 그렇게 제안했던 것뿐이에요.”
“그 길드장이란 자도 마음에 들었으니 당신에게 사업 파트너 자리까지 제안한 거 아니겠어?”
제크론의 칭찬에 뿌듯해진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생글생글 웃었다.
그랬다.
카일러 휴스턴 경은 내게 사업을 함께 키워 나가자며 제안했다.
처음엔 혹했지만, 결국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내 목적은 정신 건강을 위한 약간의 긴장감 유발이었다.
당장 진행하는 악단 이동에 대한 계약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수준이었다.
그 이상 더 무리할 필요는 전혀 없었기에 거절하는 게 마땅했다.
약간의 스트레스는 정신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도를 넘는 스트레스는 그 반대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나는 윌트슨 공작 부인인데, 굳이 열심히 일할 필요 없지. 돈이 이미 많으니까. 다 남편 돈이긴 하지만, 남편 돈이 결국 내 돈이니까.’
제크론의 얼굴을 몰래 힐끔거리며 홀로 앙큼한 생각을 이어 갔다.
일렁거리는 등불 때문인가.
평소보다 더욱 붉고 도톰해 보이는 그의 입술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동시에 갑자기 몇 가지 장면들이 떠올랐다.
바로 원작 소설에서 읽었던 제크론과 베로니카의 키스신들이 말이다.
키스신 장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작가답게 소설에서 둘의 키스신은 아주 길게 묘사됐었다.
서너 장은 거뜬히 넘기는 키스신을 읽을 때면 아 벌어진 내 입에서 한 줄기 가느다란 침이 새어 나오기 일쑤였다.
저 입술… 어떤 감촉이 들까?
분명 부드럽고 따뜻하겠지?
아니, 뜨거우려나?
야릇한 상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한번 내 눈길을 사로잡은 제크론의 입술은 나를 쉽게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가 입술을 움직이며 뭐라고 말했지만, 내게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붉고 도톰한 입술이 뻐끔거리는 모습만 느릿하게 보였으니 말이다.
“…응? 엘프윈? 당신 내 말 듣고 있는 거 맞아?”
“아, 미안해요. 딴생각 좀 하느라 못 들었어요.”
“당신 요즘 딴생각 많이 하는 것 같지 않아?”
“아… 그런 것 같아요.”
이마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있던 딴생각이 제크론의 입술이었다는 것은 밝힐 수 없었다.
그의 눈매가 단번에 가늘어졌다.
“내일은 왕립 마법 아카데미에 간다며? 내 부탁 좀 들어줄 수 있어? 라고 물었어.”
이번엔 잘 들었으리라 믿어, 그가 부드럽게 눈을 흘기며 입을 삐죽거렸다.
“무슨 부탁이요?”
“우리 뎀프샤에 왕립 아카데미 분교를 세우는 건 알지? 그 옆에 마법 아카데미 분교도 세우면 어떨까, 하는 의견이 있어서 말이야. 내가 먼저 제안해 보려고. 내일 가져갈 수 있도록 문서를 만들어 둘게.”
“와아, 뎀프샤에 마법 아카데미 분교까지 세운다고요? 날로, 날로 발전하는 뎀프샤네요!”
“날로, 날로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알았어요. 내일 잊지 않고 문서 잘 챙겨 갈게요.”
자신만만하게 생긋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내 미소를 대하는 제크론의 표정은 조금 어두워졌다.
“연달아서 외출 일정이 있는 게 썩 마음이 놓이진 않아. 제발 무리는 하지 마.”
“매튜가 그 얘기는 안 했나 보군요. 오늘 알타라스에서도 30분 만에 회의를 끝내고 나왔다는 거요. 내일도 속전속결로 끝내고 올게요.”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면서 해맑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내 미소가 제크론의 근심을 덜어 주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제크론이 후우, 작은 한숨을 내쉬며 나를 내려다봤다.
“그 얘기로는 날 안심시킬 수 없어, 엘프윈.”
“…….”
“회의 시간이 짧으면, 그 짧은 시간 안에 쏟아붓는 노력과 기운의 양이 더 커지잖아. 그러니 무리하는 건 마찬가지야.”
아, 그렇군요.
그의 말이 맞았다.
그의 말에 완전히 동의한다는 의미로 입을 꾹 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크론이 날 걱정해 주고 있어. 이 세계의 남자 주인공이 날 위해 주고 있어. 나를….’
남편의 다정한 눈빛과 속삭임에 내 연약한 심장이 다시 덜커덩거리며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눈치 없는 심장을 타박하며 가만히 서 있는데 커다란 그의 몸이 순간 훅 가까이 다가왔다.
“아프면 안 돼, 엘프윈.”
허리를 숙인 그가 입술을 내려 내 이마 위에 살며시 얹는 게 아닌가!
‘으아… 이, 입술이 닿았어! 그 입술이… 남자 주인공의 입술이 내게 닿은 거야!’
말캉하고 보드라운 점막이 살갗에 닿자마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쪼옥, 입술이 떨어지면서 나는 젖은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몸속 피가 보글보글 끓어올랐다.
당황한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사람 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원래 이렇지 않았다면서요?
부부 분위기가 항상 냉랭했다면서요?
냉미남의 정석이라면서요?
그런데 왜 이리 다정하고 스윗한 걸까요?
답을 알 수 없는 물음들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냉미남? 그게 뭔데?”
미남이니까 좋은 건가, 제크론이 붉어진 얼굴을 하고 내게 물었다.
흐업! 나 분명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던 것 같은데, 목소리까지 나와 버린 거야?
으악, 어떡해!
“왜 이러다니… 그야… 당신은 내 아내이고, 우리 아이 때문에 여러모로 고생하고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옆에 있어 주는 것밖에 없어서…. 그래서….”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제크론은 홍당무처럼 벌게진 얼굴로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입 밖으로 나오면 안 되는 물음들이었는데, 목소리 간수를 제대로 못 한 내 탓이었다.
‘난감하구만.’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두 눈을 끔뻑이면서 그대로 서 있었다.
“그래. 당신 말처럼 원래는 이러지 않았지. 예전엔 우리 자주 다투기도 했고… 또 며칠 동안 말 한마디 안 하기도 했고 말이야.”
“…….”
“당신이 몇 날 며칠 앓아누웠어도 나는 잠깐도 들여다보지 않았어. 그래서 많이 반성했어. 당신이 아팠던 게… 그래서 기억을 잃은 게 다 내 탓인 것 같아서 말이야.”
“…여보.”
떠듬떠듬, 그의 입에서 천천히 쏟아지는 고백을 듣고 있으려니 코끝이 시큰거렸다.
눈가에 열이 몰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 감정은 나의 감정일까, 엘프윈의 감정일까?
제크론의 고백은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잘하려고 노력 중이야. 그렇다고 해서 과거가 완전히 용서되는 건 아니겠지만.”
“고마워요. 당신이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줄은 몰랐어요. 내가 기억을 잃은 게 당신 때문일 리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젠 자책하지 말아요.”
불현듯 그를 안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몸을 한 사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쭈뼛쭈뼛 제 잘못을 읊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가슴 한쪽 구석이 간질간질거렸다.
그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리고 두 팔을 활짝 벌려 그를 안았다.
물론 체격 차이가 있어서 결국 내가 그에게 안기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아무 말 없이 제크론을 꼬옥 안았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그도 내 어깨와 머리에 팔을 둘러 살포시 안아 줬다.
단단하고 너른 그의 품은 따뜻했다.
포근한 그의 품 안에서 나는 생각했다.
‘내게 다정하지 말아요, 제발. 이러면 당신과 헤어지는 길이 너무 힘들어질 테니까요.’
쿵쾅, 쿵쾅.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심장 고동이 또렷하게 들렸다.
‘당신의 운명은 내가 아니고, 내 운명은 당신이 아니에요.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졌는걸요. 그러니까 제발… 내게 다정하지 말아요.’
이번에는 생각이 제멋대로 목소리로 나가지 못하게 아랫입술을 꼭 짓씹었다.
그렇게 한동안 애틋한 분위기가 흐르는데 별안간 불청객이 날아들었다.
“으, 으악! 꺄아아악!”
나방이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나는 벌레가 싫다.
몹시 싫다.
내가 나방을 내쫓으려 팔을 허우적거리고 있으니 제크론도 도왔다.
끈질긴 나방을 겨우 내쫓았을 때 나는 거의 탈진한 상태가 돼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크론도 무릎을 꿇고 앉아 나를 봤다.
그가 이마에 붙은 내 머리카락들을 천천히 쓸어 넘기면서 물었다.
“괜찮아, 당신?”
대답할 힘조차 없었던 나는 그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크론이 다시 나를 안았다.
그의 단단한 가슴이 내 이마에 닿았다.
이번에는 정확히 들렸다.
쿵쾅쿵쾅,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제크론의 심장 고동 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