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142)

44화

“장난으로 받아들였다니 서운하군. 재미없다는 말도 상처야.”

제크론이 푹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의 눈가에는 여전히 장난기가 진득하게 매달려 있었다.

얄미웠지만, 진짜 얄미웠지만… 잘생긴 외모를 미워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고 이것은 나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장담한다.

“덥네요. 여기.”

벌게진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손부채를 파닥거리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할 얘기 있어서 온 것 같은데, 저녁 식사 같이 하면서 얘기하는 게 어때?”

일부러 그에게서 떨어졌는데, 그는 다시 거리를 바짝 좁혀 오며 물었다.

“그, 그러든가요.”

그와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채 그대로 앞서 걸어갔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 서야 했다.

제크론이 내 손을 덥석 붙잡은 탓이었다.

당황한 내가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다시 생긋, 웃으며 말했다.

“에스코트 받으셔야지요, 부인.”

아, 이 사람 왜 이럴까.

달달함의 강도가 점점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   *   *

오늘의 메뉴는 사슴고기 스테이크였다.

적당히 익은 고기가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고기 특유의 잡내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우리 주방장의 요리 솜씨는 일품이었다.

이 맛있는 음식들을 엘프윈은 조금만 먹다 말았다니.

귀한 음식들에게, 귀한 주방장에게 참으로 죄송한 행동이었다.

그러니 더욱더 열심히 먹어 줘야지, 후훗.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칼질에 열중하는데, 제크론이 물었다.

아차, 음식에 심취한 나머지 본래의 목적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입 안에 있는 음식들을 오물오물 씹고 목구멍 아래로 꿀꺽 삼켰다.

무릎 위에 다소곳하게 올려뒀던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나서야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낮에 슈라더 후작 부인과 브랜차드 자작 부인이 다녀갔어요.”

“맞군. 당신 오늘 처음으로 티파티를 주최한 날이었지? 축하해. 이런 날이 올 줄이야.”

“고마워요.”

축하 인사 맨 마지막에 붙은 ‘이런 날이 올 줄이야.’라는 멘트가 내 신경을 자극했지만 그냥 넘기기로 했다.

나는 대인배이고, 지금 더욱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말이다.

“나도 며칠 전 슈라더 후작을 만났는데, 저택에서 상주할 악단을 고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아 골치 아파하더군.”

“벌써 들었군요. 맞아요. 슈라더 후작 부인도 그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말인데요.”

잠시 숨을 고르며 뜸을 들였다.

중요한 이야기 전에는 이렇게 시간차를 둬서 주의를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

“마차 계약은 우리가 맡아서 할 수 있을까요? 지금 서른 개 가문에서 신청이 들어와서 악단을 꾸리고 일정을 계획하는 것만으로도 무척 바쁜 것 같더라고요.”

“…….”

“그래서 악단의 이동 수단은 제가 맡아 보겠다고 했어요. 직접 해 보고 싶어요. 괜찮을까요?”

“당신이 직접?”

순간 제크론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상대에게 긴장감을 유발하는 눈빛이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허락한다면요. 시작은 내가 했는데, 너무 당신과 멀론 경에게만 맡겨 두는 것도 미안하잖아요.”

“…….”

“슈라더 후작가와 계속 소통하면서 일을 진행해야 하니 내가 맡는 게 더 수월할 것도 같아요. 또… 나도 뭔가 해 보고 싶기도 하고요.”

그랬다.

사실 뭔가를 좀 해 보고 싶었다.

거창한 사업은 꿈도 못 꿨지만, 악단 단원들의 출퇴근을 연결하는 마차 계약과 관리 정도는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동할 필요 없이 놀고먹는 귀족의 삶도 황홀하리마치 좋았지만 맘속 어딘가가 좀 허했다.

전생에서 매일 숨 가쁘게 일하는 삶이 고통이었는데, 이곳에서 너무 탱자탱자거리는 삶도 마냥 100퍼센트 편하지만은 않았다.

전생에서 친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매일 출근하던 사람이 막상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까 이상해. 이것도 참 못할 짓이다, 얘.”

출산 후, 육아 휴직을 받고 집에서 생활하던 언니의 하소연이었지만, 당시의 내게는 이해 불가한 내용이었다.

그때의 나는 출근과 야근이 너무 힘들어 마냥 쉬고만 싶었으니까.

언니는 산후우울증 진단까지 받아서 고생을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내 언니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 못했다.

전생에 대한 여러 기억 중 아픈 기억이었다.

흐음… 제크론이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큰 사업이 아닌데도 내게 맡기는 것이 영 못 미더운 모양이었다.

마지막 쐐기를 박을 요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요. 약간의 긴장감은 정신 건강 유지에 필수요건이라더군요. 그래서 내 자신에게 약간의 긴장감을 주고 싶어서요.”

“…당신 정신 건강을 위한 것이라면 막을 수 없겠군. 하지만 난 당신이 너무 무리하게 되는 건 싫어.”

“무리하지 않아요. 걱정 말아요.”

“좋아. 그럼 비서를 한 명 붙여 줄까?”

“비서요?”

거기까지는 생각해 둔 바가 없었다.

하지만 비서는 따로 둘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내게는 전속 하녀가 두 명이나 있었고, 그녀들은 꽤 영리했으니까 말이다.

“비서는 따로 필요 없어요.”

제크론을 향해 산뜻하게 웃어 보이고는 다시 사슴고기 스테이크에 집중했다.

*   *   *

디아브 백작 부인의 베이비 샤워 파티가 있는 날이었다.

파티 장소로 향하는 나는 붕붕 하늘을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이제까지 참석한 파티의 수가 다섯 손가락을 넘었다.

나는 ‘내게 이렇게 사교적인 면이 있을 줄이야!’라며 놀랐고, 나를 보는 다른 사람들은 ‘공작 부인에게 이렇게 사교적인 면이 있을 줄이야!’라며 놀랐다.

지금의 내 삶은 전생의 내 삶과도 과거 엘프윈의 삶과도 그 결이 매우 달랐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진 것은 맞았다.

파티 장소는 수도에 있는 프렛 백작저였는데, 하얀 벽돌을 주로 사용해서 단아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을 풍기는 저택이었다.

응접실은 베이비 샤워 파티답게 알록달록 무지개색의 귀여운 장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주인공인 디아브 백작 부인은 아직 도착 전이었다.

파티를 주최한 프렛 백작 부인과 데이비스 자작 부인은 주인공을 맞이하기 위한 마지막 준비로 동분서주했다.

나와 메릴 선생님 말고도 다른 손님이 세 명 더 있었는데, 디아브 백작 부인을 기다리며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응접실 문이 활짝 열리더니,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 디아브 백작 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나, 여러분! 절 위해 이렇게나 모여 주신 건가요?”

기운찬 디아브 백작 부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우리는 모두 벌떡 일어서서 기쁜 얼굴로 주인공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디아브 백작 부인!”

“축하드려요, 부인!”

“정말이지… 너무 감사해요! 조안, 맨디, 정말 고마워!”

디아브 백작 부인은 프렛 백작 부인과 데이비스 자작 부인을 세게 끌어안았다.

선물 증정식이 끝난 우리는 갖가지 호화로운 음식으로 채워진 테이블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눴다.

분위기는 끝도 없이 화기애애했다.

“그런데 세 분은 서로 어떻게 친해지게 된 거예요?”

나는 금발의 세 여인, 디아브 백작 부인과 프렛 백작 부인, 그리고 데이비스 자작 부인을 보며 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셋은 모두 다른 왕국 출신이었다.

이젠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었지만, 출신 왕국이 다르면 친하게 어울릴 기회가 많이 없던 시대상에 비추어 본다면 그들 셋의 우정은 조금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내 질문의 숨겨진 의미까지 이해한 디아브 백작 부인이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셋 다 승마와 활쏘기를 좋아해요. 이런 취미를 지닌 귀부인을 만나기란 쉽지 않잖아요. 만나자마자 서로를 알아보고 바로 손을 잡았죠.”

“지금 돌이켜 보면, 우리의 만남은 운명, 비슷한 것이었다고 생각해요.”

“출신 왕국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조금의 장애도 되지 않았죠.”

금발의 세 여인은 서로를 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우정에 대한 자긍심이 가히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것 같았다.

‘인생은 결국 혼자 가는 거야.’라고 스스로에게 되뇌는 시간이 많았던 나는 이 세 부인들의 우정은 조금 부러웠다.

나는 바로 말로 표현했다.

“부인들의 우정 정말 부러워요. 제국의 많은 사람들도 부인들의 우정을 보며 서로에 대한 벽을 허물면 좋을 것 같아요.”

“맞아요. 저도 윌트슨 공작 부인의 생각에 동의해요. 부인들이 제국 사교계에 귀감이 돼 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게 말이에요.”

이 자리에 모인 다른 부인들도 다들 비슷한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쳤다.

“세 부인의 인터뷰 기사를 내 보는 건 어떨까요?”

악단 고용과 관련된 신문 기사가 나가자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타났던 경험을 조곤조곤 설명하며 부인들의 의중을 살폈다.

“어머, 인터뷰라니. 난 그런 건 부끄러워요.”

“맞아요. 신문에 내 얼굴이 실릴 걸 생각하면… 못할 것 같아요.”

프렛 백작 부인과 데이비스 자작 부인은 얼굴을 붉히며 민망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디아브 백작 부인의 표정만은 달랐다.

역시 호기로운 성격의 디아브 백작 부인은 주저하는 기색 없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가능하다면 한번 해 보고 싶은걸요! 이런 기회가 어디 흔하겠어요? 해 봅시다! 추억 삼아서요!”

씩씩한 제안에 그녀의 베스트프렌드들은 난색을 표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후훗, 속으로 웃으며 그들을 봤다.

지금은 주저하는 부인들도 결국엔 디아브 백작 부인의 의견을 따르게 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역시 이번에도 나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메릴 스웨이드 선생님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요소킨 운동을 하는 세 부인을 인터뷰하는 건 어때요? 출신지를 넘어선 세 부인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에 더해 운동을 좋아해서 새로운 운동인 요소킨을 같이 한다는 내용까지 더해지면 기사가 더욱 풍성해지지 않을까요?”

“어머,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요!”

짝짝짝, 손뼉을 치며 동의했다.

역시 메릴 스웨이드 선생님!

하나의 운동법을 고안해 낸 창조자답게 그녀는 번득이는 기획력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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