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142)
  • 42화

    “자요. 이것도 받아요.”

    괜히 뾰로통 입술을 삐죽이며 다른 손에 쥐고 있던 강아지의 목줄을 제크론에게 휙 넘겼다.

    그는 피식, 웃으며 목줄을 건네받았다.

    제크론의 미소 한 자락, 웃음 한 방울에 내 가슴이 잘게 떨렸다.

    ‘심장아… 아침부터 정신 줄 놓는 우는 범하지 말아 줘, 제발.’

    내가 엘프윈의 심장을 살살 어르고 달래고 있는데 제크론이 입을 열었다.

    “강아지 이름은 뭐라고 부르기로 했지?”

    “아, 참! 아직 못 정했어요. 당신이 좋은 이름 좀 생각해 줘요.”

    “흐음… 글쎄, 뭐가 좋을까?”

    제크론이 까만 눈썹을 씰룩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강아지 이름 짓는 데 매우 진심인 모습에 나는 또다시 허흡, 더운 숨을 삼켜야 했다.

    입을 벌리면 팔딱팔딱 뛰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 입을 꾸욱 다물었다.

    “위든? 어때?”

    “…….”

    그의 목소리에 색깔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가을 햇살을 닮은 황금빛일 것 같았다.

    사실 얼핏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황금빛 목소리를 본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제크론의 입술이 다시 벌어졌다.

    “엘프윈, 듣고 있어?”

    “뭐, 뭐라고 했어요?”

    “위든이 어떠냐고 물었어.”

    “위든… 위든이 뭔데요?”

    제크론이 고개를 숙여 내게 눈높이를 맞춰 왔다.

    바로 정면에서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는 푸른색 눈동자에 걱정과 유희가 반반씩 섞여 있었다.

    “당신 어디 아파? 잠이 덜 깨서 그런가? 우리 지금 강아지 이름 지어 주기 하고 있었잖아.”

    “아, 맞다.”

    대화 도중에 멍 때리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마를 긁적이며 민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시 딴생각하고 있었어요. 미안해요. 위든, 좋은 것 같아요. 부르기도 편하고, 듣기에도 좋고요. 휘파람 소리가 날 것 같은 이름이에요.”

    푸스스, 제크론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제발 웃지 좀 말아 줘요.

    엘프윈의 심장 상태가 오늘따라 좀 이상하단 말이에요.

    그의 미소를 감당하는 게 힘들었던 나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당신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위든! 이제 네 이름은 위든이다. 위든! 위든!”

    제크론은 강아지의 새로운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다.

    이쯤 되니 내 기억 속 원작 내용에 대해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남자 주인공 제크론은 여자 주인공인 베로니카를 만나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 분명 무뚝뚝하기만 한 냉미남이었다.

    가족과 친구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했다.

    그저 일에만 몰두했고, 제국의 이모저모와 영지 관리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그런데 이렇게 아내와 함께 나란히 걸으며 산책하고, 손을 잡고, 강아지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른다고요?

    원작에서 묘사된 제크론의 모습과 확실히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같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흐음….’

    그의 옆얼굴을 힐끔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원작이 이미 뒤틀린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희망적인 의구심이었다.

    어쨌든 내 최종 목표는 원작을 비틀고 살아남는 것이었으니까.

    어느 포인트에서 뒤틀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좋은 징조인 것은 맞았다.

    “엘프윈?”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이리도 부드럽게 아내의 이름을 불러 주는 남자 주인공은 원작에는 분명 없었으니까.

    “당신 또 딴생각이야?”

    “아, 미안해요.”

    “무슨 생각이었는데?”

    “그건….”

    나는 꽤 솔직한 편에 속하는 성격을 지녔지만, 이 질문에만큼은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순간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생각을 외쳤다.

    “이름이요!”

    “이름?”

    이름을 짓고 있었으니, 계속 이름을 지으면 될 일이었다.

    이곳에 살면서부터 잔머리력의 레벨이 한 단계 상승한 것 같아 속으로 뿌듯하게 웃었다.

    “네, 이름. 우리 아이 태명도 지어 줘요.”

    “태명?”

    “태어나기 전까지 계속 아가야, 라고 부르기보다 예쁜 이름으로 불러 주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아, 그렇군.”

    “사실 이미 늦은 감이 있죠. 태명으로 불러 주면 부모와 자식 사이에 깊은 유대감도 생길 거예요.”

    내 순발력에 감탄하며 생글생글 미소 지었다.

    반면 제크론은 좀 난감해 보였다.

    “흐음… 태명이라… 뭐가 좋을까….”

    그가 다시 눈썹을 씰룩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강아지의 이름을 짓는 것에도 매우 진심인 남자니, 제 아기의 태명을 짓는 것은 더욱 진심일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아리?”

    “아리? 에이, 그건 너무 여자애 이름 같잖아요.”

    “응, 그렇지. 그런데 배 속 아이가 여자아이일 수도 있는 거잖아?”

    제크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그제야 나는 내 실수를 깨달았다.

    무의식적인 실수였다.

    원작을 읽은 나는 엘프윈이 낳는 아이가 남자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절대 아는 척을 하면 안 되는 정보였다.

    “그게… 내 배 모양을 본 사람들이 다들 사내아이일 것 같다는 얘기를 해서요.”

    “배 모양만으로 확신할 수 있다고?”

    “물론 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니죠….”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제크론의 짙고 굵은 눈썹이 장난스럽게 출렁거렸다.

    “그럼, 역시 아리?”

    한번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을 포기하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크론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당신은 이 아이가 딸이면 좋겠어요?”

    “사실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없어. 건강하기만 하다면 말이야.”

    “맞아요. 그건 그래요. 아리, 좋은 것 같아요. 귀엽고 예쁜 이름이에요.”

    사내아이에게 여자아이스러운 태명을 붙여 주는 것 정도쯤은 괜찮을 거라고 합리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야! 아빠가 지어 준 태명이 마음에 드니? 아리야!”

    막상 여러 번 입에 담아 불러 보니 딱히 여자아이 이름이라고만 할 수도 없는 것 같았다.

    중성적인 느낌의 이름이라고 충분히 우길 수 있을 이름이었다.

    “아리야, 아리야!”

    아이의 태명을 부르며 배 위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그 순간 태동이 느껴졌다.

    “어맛! 아리가 알아들었나 봐요!”

    내가 두 눈을 반짝이며 외치자 제크론도 얼른 내 배 위에 손을 얹고 태동을 느꼈다.

    “아리야. 역시 아빠의 작명이 마음에 들었던 거지, 그렇지? 우리 아리, 아빠와 통하는 데가 있구나.”

    하하하, 제크론이 기분 좋게 웃었다.

    또 그런다.

    이 사람, 오늘따라 내 심장을 너무 많이 아프게 한다.

    아픈 심장 때문이었던 걸까, 아니면 뒤죽박죽 호르몬 때문인 걸까.

    어느새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드는 감각에 나는 얼른 옷소매로 눈물을 훔쳐야 했다.

    ‘나 지금 너무… 행복한 것 같아.’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이어지면 좋겠다는 헛된 희망이 생겼다.

    참으로 허무맹랑한 꿈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달콤한 꿈이기도 했다.

    *   *   *

    “디아브 백작 부인, 다음 달이 벌써 산달이죠?”

    요소킨 운동이 끝나고 우리는 빙 둘러앉아 허브차를 마시며 잠깐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디아브 백작 부인이 크게 부풀어 오른 배를 쓸어내리며 방긋 웃었다.

    “네, 이제 곧 출산일이에요. 주치의는 4주 뒤쯤으로 예상하고 있어요.”

    “긴장되시겠어요!”

    “조금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래도 결국 잘 해내리라 생각해요. 저도, 아가도요.”

    호호, 디아브 백작 부인이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서 말인데, 다음 주에 베이비 샤워 파티를 하기로 했어요.”

    “작은 파티가 될 예정이에요. 메릴 선생님과 윌트슨 공작 부인도 참석해 주시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참석, 해 주실 거죠?”

    조안 프렛 백작 부인의 초대에 선생님과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꼭 참석할게요.”

    “그렇게 되면 운동실이 아닌 곳에서 다 같이 만나는 것은 처음일 것 같아요. 이거 기대되는걸요!”

    흥이 오른 나는 손뼉까지 치면서 외쳤다.

    “정말 그렇네요!”

    “어머, 좋아라!”

    꺄르르, 운동실 안에 한바탕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여인들의 웃음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메릴 스웨이드 선생님이 나를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곧 요소킨 주말 수업이 하나 더 늘 것 같아요.”

    “어머, 정말요? 잘됐네요!”

    나를 비롯한 다른 부인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메릴 선생님을 쳐다봤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드디어 점점 세를 넓혀 가는 우리의 요소킨 수업!

    “이 수업이 끝나고 바로 다음 시간에 진행하는 수업으로 계획 중이에요. 괜찮을까요?”

    “물어보나 마나죠! 물론 가능합니다! 축하해요, 선생님!”

    “정말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이게 다 여러분 덕분이에요.”

    메릴 선생님이 수줍게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 어떤 분들이 수업을 신청하신 건가요?”

    “핸더슨 공녀와 도론 공녀세요. 친구 두 분까지 해서 총 네 분이 수업에 참여하고 싶으시다 하셨어요.”

    윽, 순간 숨이 턱 막혔다.

    핸더슨 공녀와 도론 공녀라니!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두 인물의 등장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들을 공작성 안에 들이는 것이 몹시 끔찍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요소킨 수업을 폐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둘에게만 수강 신청 기회를 박탈할 수도 없었다.

    ‘제 발등을 제가 찍는다… 이 속담 지금 나한테 쓰면 딱인 거 맞지?’

    식도를 뚫고 나오려는 애달픈 한숨을 꾹꾹 눌러 담으며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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