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내 최대치의 반응에 이번엔 하녀들이 당황했다.
“원래 이 바닥이 소문이 좀 빨라요.”
“그러니 너무 노여워 마세요.”
“아니, 그것 때문에 놀란 게 아니라….”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지만 뒷말을 덧붙일 수 없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뇌세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소문 때문에 놀라신 게 아니라면… 설마 어제 두 분이 같은 침실에서 주무신 것 때문에 놀라신 거예요?”
영민한 케이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허리 찜질이 노곤노곤 좋아서 먼저 잠들었던 것 같거든.”
“아, 그러셨군요.”
“정말이래? 그이도 어제 여기서 잤대?”
내 물음에 케이트와 주디는 서로 눈치를 살피더니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들었어요.”
“주무시다가 새벽 일찍 일어나서 나가셨다고요.”
“…그랬구나.”
나 어제 제크론과 한 침대에서 같이 잤구나….
부끄러움이 몰려와 얼굴이 뜨거워졌다.
벌겋게 달궈지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케이트와 주디가 나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부부 사이인데 뭐 어때서 그러세요, 마님?”
“마님께서 피곤하셔서 금방 잠드셨던 것처럼, 아마 공작님께서도 피곤하셔서 그대로 잠드셨던 것 같아요.”
“네. 그런 것 같아요.”
하녀들의 말이 다 맞는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알았다.
제크론과 나는 부부 사이가 아니다.
제크론과 엘프윈은 부부 사이이지만, 나는 아니다.
그 부분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체력이 약해 빠진 내 몸은 금세 스르르 잠들어 버렸지만, 강철 체력인 제크론은 나처럼 바로 잠들지 않았을 터였다.
확실했다.
‘나 너무 피곤하면 코 고는 건 기본이고… 이도 갈고, 잠꼬대도 심하게 하는데… 그 모습을 제크론이 다 봤다는 건…. 싫다. 정말 싫다. 몹시 싫다!’
으으… 끔찍한 상상을 지워 내려 고개를 세차게 저어 봤지만 헛수고였다.
‘침을 흘렸을지도 몰라! 뜨아, 눈곱은? 어제 너무 잘 먹어서 배에 가스가 차서….’
울고 싶었다.
또르르…. 보이지 않는 투명 눈물이 볼을 타고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구슬프게 들릴 정도였다.
완벽한 남주님의 두 눈에 엑스트라 빙의자의 무방비 추한 모습을 보였다는 게 수치스러웠다.
“하아….”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다시 털썩 자리에 누웠다.
“아무래도 좀 더 자야겠어.”
“네, 그럼 편히 주무세요, 마님.”
“주무시다가 필요한 게 있으시면 호출하세요.”
꾸벅 절을 한 케이트와 주디가 나가자 침실에는 나 혼자 남았다.
몸을 굴려 침대 옆자리에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아 봤다.
지난밤 제크론이 여기서 자고 갔는지에 대한 증거 자료를 수집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체취가 나는 것 같았다.
비 내린 숲속의 내음과 닮은.
“으으… 으으윽….”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몸부림쳤다.
절망과 번뇌의 고통을 담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 * *
오늘은 왕립 아카데미 뎀프샤 분교의 착공식이 거행되는 날이었다.
날씨는 착공식을 거행하기에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화창했다.
그리고 뎀프샤의 주인이자 곧 아카데미 분교의 주인이 될 제크론의 얼굴도 구름 하나 없이 무척이나 맑았다.
보좌관 멀론 경이 그를 보며 물었다.
“각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얼굴이 무척 환하십니다.”
“아, 그래?”
제크론이 괜히 제 볼과 턱을 쓰다듬으며 되물었다.
그의 입꼬리가 자연스레 말아 올라가며 빙그레 미소를 만들어 냈다.
“네. 요새 이런저런 업무가 몰려서 피로하시면 어쩌나 걱정되는 날이 많았는데, 오늘은 한결 좋아 보이셔서 걱정이 덜어집니다.”
“어젯밤에 잠을 잘 자서 그래. 오랜만에 푹 잤어. 꿈도 안 꾸고 말이야.”
제크론은 저 멀리 한창 삽질 중인 인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시군요. 잘 주무셨다니, 다행입니다.”
조쉬 멀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작의 잘생긴 옆모습을 지그시 바라봤다.
보좌관 역시 제 상관이 어젯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마님의 침실에서 자고 나온 것을 알고 있었다.
‘하긴 두 분 요즘 분위기가 내내 좋으셨지.’
공작 부부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과거와는 사뭇 달라졌다는 것을 공작성의 모두가 눈치챘다.
좀 더 부드러워졌고, 화기애애해졌다.
아무래도 그 민간치료사의 ‘하루 30분’ 요법 덕택인 것 같았다.
그 처방을 전해 들은 이후, 공작은 아무리 바빠도 매일 마님과 함께할 시간을 만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제 상관에게 이리도 다정한 면이 있는 줄은 몰랐던 조쉬도 요즘 놀랄 때가 많았다.
“공작성 야학 수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반응은 좀 있나?”
“아, 야학 수업은… 아직 수강생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금씩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수강생들의 만족도도 높고요.”
공작 부인의 건의로 만들어진 수업이었다.
글을 알지 못하는 평민 고용인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 수업이었다.
처음 마님의 생각을 전달받았을 때 조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먹고살기 바쁜 평민 고용인들에게 글공부라니!
그 잘난 황족들이나 고위 귀족들조차 생각하지 못한 것을 마님이 하시다니!
사실 그러다가 말겠거니 했다.
워낙 변덕이 심한 분이시니 말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마님은 확실히 달라졌다.
예민한 성격은 그대로지만, 변덕 부리는 성질은 많이 누그러졌다.
‘하지만 여전히 안심할 수는 없어.’
언제 또 신경증이 도져서 변덕을 부릴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거 잘됐군. 수업은 꾸준히 이어 나갈 수 있게 자네가 많이 신경 써 주게.”
“네, 알겠습니다, 각하.”
“그리고 수강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인터뷰도 진행하게나.”
“인터뷰요? 무슨?”
“만족도 조사 말이야. 만족하는 점과 보완했으면 하는 점들을 문서로 정리해서 보고해.”
“어디에 쓰시려고요?”
“어디에 쓰긴.”
제크론은 공사가 진행 중인 흙 밭 쪽을 턱짓하며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설마?’
조쉬 멀론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에이, 아니겠지.
조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방금 떠오른 제 예상이 맞다면 그건 너무도 큰일이 되고 만다.
그러니 아닐 것이다.
‘설마… 아닐 거야. 그래, 아니야.’
* * *
공작성의 동쪽 별관 2층에 마련된 야학 강의실에 열 명 남짓 정도의 고용인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곧 여덟 시부터 시작될 수업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하루 종일 노동에 시달리느라 몸은 고됐지만 글을 배우는 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어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드르륵, 뒷문이 열리더니 엘프윈 공작 마님이 들어왔다.
그녀의 전속 하녀들인 케이트와 주디도 함께였다.
마님이 해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응원차 잠깐 들렀다네. 갓 구운 머핀과 따뜻한 우유를 준비했으니 수업 시작 전에 들게나. 일단 배가 두둑해야 머리도 제대로 굴러가는 법이거든.”
“우와… 감사합니다, 마님.”
“잘 먹겠습니다, 마님.”
지친 표정으로 앉아 있던 고용인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가난한 평민 주제에 글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도 큰 행운인데 거기다가 이런 간식과 응원도 받다니.
케이트와 주디를 제외한 다른 고용인들이 모두 어안이 벙벙한 채 엘프윈을 바라봤다.
이런 상황과 대접이 영 익숙하지 않아서 나오는 반응이었다.
동그란 눈을 몇 번 깜빡이던 공작 부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런, 내가 있으니 자네들이 편하게 먹지 못하는 것 같군. 그럼 나는 이만 가 보겠네. 열심히들 배우게.”
마님은 팔랑팔랑 손을 흔들고는 후다닥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확실히 마님께서 많이 달라지셨군.”
“아주 그냥 완전히 딴사람이 되셨어.”
거기 모인 고용인들이 이번에는 케이트와 주디를 보며 한마디씩 했다.
마님의 전속 하녀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료들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아무래도 곧 출산을 앞두시니 더욱 주변이나 아랫사람들을 챙기게 되는 건 아니신가 싶어요.”
“그러게 말이에요. 아이를 낳는다는 건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것이고, 또 어떻게 보면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것이니까요. 새로운 세상을 신경질적으로 대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친절하게 대하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을 많이 보이세요.”
공작 부인의 변화에 대한 케이트와 주디의 깊고 진지한 해석에 듣고 있던 동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맞는 말이야. 아이를 낳는다는 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게 맞아.”
“그래서 우리들한테도 자상해지신 것이로군.”
“우리 공작성의 분위기를 확 바꿔 놓은 아기님은 복덩이가 틀림없어!”
“맞아. 윌트슨 공작성의 축복이야, 축복!”
공작 부인과 배 속의 아기에 대한 찬양의 말이 몇 마디 오가는 사이 어느새 선생님이 강의실 안으로 들어왔고, 그대로 수업이 시작됐다.
마님이 챙겨 준 머핀과 우유로 배를 든든하게 채운 고용인들은 두 눈을 반짝이며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했다.
* * *
사실 오늘 내가 야학 강의실을 방문한 이유는 수업을 조금이라도 참관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어떤 식으로 수업이 진행되는지, 어떤 분위기인지 몸소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 고용인들의 입장에서는 주인마님의 존재가 영 부담스럽기는 한가 보다.
‘하긴 회식 자리에 상사가 끼면 안 되는 것과 비슷한 논리겠지.’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침실을 향해 터덜터덜 걷고 있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조쉬 멀론 경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왕립 아카데미 분교 착공식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모양이었다.
나를 발견한 멀론 경이 종종걸음으로 내 곁으로 와서 허리를 꾸벅 숙였다.
“마님, 어쩐 일로 나와 계십니까?”
“야학 강의실에 들러서 응원해 주고 온 참이에요.”
“응…원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