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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38/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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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화

    “어떤 점이 말입니까?”

    “아르젠토 찻잎은 위벨교에서 독점하고 있는 고급 약초이지.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르젠토 차에 중독되는 사람들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어.”

    “…….”

    “줄지 않는 중독 환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앞이 캄캄하다네. 대체 관리를 얼마나 허술하게 했으면 그럴까, 일부러 허술하게 한 것은 아닌가, 다 계획인 것은 아닌가, 이런저런 의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 수밖에 없다네.”

    “흐음… 그렇군요.”

    이 늙은 의원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 매튜의 마음속에 자리했던 작은 의심의 씨앗은 점점 자라서 확신의 줄기를 쭉쭉 뻗어 나갔다.

    “어르신, 부탁이 있습니다. 환자의 개인 정보까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일 년에 아르젠토 차 중독과 관련된 환자의 숫자 정도만 알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간절함을 담은 청년 의원의 눈빛에 주름 많은 눈매에 갇힌 눈동자가 흔들렸다.

    *   *   *

    이젠 제크론의 팔짱을 끼고 걷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편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가 나를 향해 팔을 내밀 때마다 여전히 약간의 닭살은 돋았다.

    하지만 몇 번 하다 보니 그 모든 과정이 익숙해졌다는 말이다.

    나와 제크론은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황태자궁 안으로 들어섰다.

    황태자궁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주는 본궁과는 달리 좀 더 차분한 분위기의 단아한 아름다움이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꽃 장식 케이크를 좋아한다는 황태자비가 기거하는 곳답게, 궁전 곳곳에 다양한 모양의 꽃 장식들이 보였다.

    “어서 오시오. 윌트슨 공작, 공작 부인.”

    “반가워요.”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환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우리를 맞았다.

    나와 제크론은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춰 인사했다.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황태자 전하, 비전하.”

    “감사합니다.”

    이젠 배가 제법 부른 탓에 허리를 숙이는 것이 좀 힘들어졌다.

    내 사정을 단번에 눈치챈 황태자비가 얼른 내 손을 잡아 부축해 줬다.

    “어머, 저런. 몸도 불편하실 텐데, 힘들게 예를 갖출 필요는 없어요. 우리끼리 편하게 만나는 자리인걸요.”

    “감사합니다, 비전하.”

    그녀의 친절에 나는 생긋 예쁜 미소로 답례했다.

    우리는 이미 세팅이 완료된 티테이블로 안내됐다.

    테이블은 형형색색의 갖가지 디저트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중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꽃 장식의 케이크들이었다.

    “어떤 것을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다 준비했어요.”

    “케이크라면 어떤 것이든 다 좋아해요. 이 케이크들은 그 유명한 ‘플라워 앤 케이크’의 케이크들이 맞나요? 꼭 먹어 보고 싶었던 케이크들이에요.”

    “어머 정말요? 잘됐네요. 어서 많이 드세요.”

    “그럼,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호호호, 티타임의 시작은 나와 황태자비의 기분 좋은 웃음으로 시작됐다.

    우리 넷의 대화는 날씨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지난 황후 폐하의 탄신 연회 이야기, 최근 진행되고 있는 철도 건설 사업에 대한 이야기 등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대화가 한창 무르익었을 무렵, 차분한 눈빛의 황태자비가 입을 열었다.

    “신문에서 봤어요. 대신전의 신성수 치료를 받으셨다고요.”

    “네, 이 사람 덕분에 받을 수 있었답니다.”

    제크론을 향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확실히 효과가 있지요?”

    “네, 물론이에요. 워낙 몸이 약한 편이라서요. 신성수 치료 덕분에 몸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 들어요.”

    “정말 다행이네요.”

    황태자비도 이제 슬슬 임신과 출산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역시 고될 과정을 생각하면 먼저 두려움이 몰려온다고 했다.

    “오래전 일이기는 하지만, 제 이모님도 그렇고, 큰언니도 그렇고 모두 출산 중에 돌아가셨거든요. 그래서 임신과 출산이 여인이라면 응당 겪어야 할 일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무서운 건 사실이에요.”

    “네, 저도 그 마음 잘 알아요.”

    황태자비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제크론과 내 눈치를 살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도 대신전의 신성수 치료를 받고 싶거든요. 저희는 윌트슨 공작 부부처럼 위벨 메시나 증서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에요.”

    아… 그런 일이었구나.

    오늘 황태자 부부가 우리 부부를 초대했던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이번에는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윌트슨 공작 부인이 신성수 치료를 받는 것이 기사화가 된 이 시점에 신전법의 개정에 대해서 논의해 볼까 하오. 공작의 생각은 어떻소?”

    “저도 황태자 전하와 생각을 같이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귀족 회의에서 해당 안건을 상정할 생각이었습니다.”

    “오, 윌트슨 공작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군!”

    “네. 신성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환자의 범위에 임산부를 넣으면 많은 여인들과 아이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윌트슨 공작이 함께해 준다면 무척이나 다행이오. 승산이 매우 클 것이오.”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제국민들의 건강이 아니겠습니까.”

    “맞는 말이오. 결국 모든 것은 사람으로부터 나오니 말이오.”

    신전법 개정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나는 신기한 기분이 되어 그들의 대화를 경청했다.

    출산으로 죽게 될 내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했고, 그중 하나가 신성수 치료였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게 된 황태자 부부가 아예 신전법을 개정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고 있었다.

    모든 임산부가 신성수 치료를 받고 안전하고 건강하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세상을 구상하고 있었다.

    ‘마치… 나비 효과 같아.’

    지구 한쪽에서 팔랑거리는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현상 말이다.

    속으로 감격에 감격을 더하며 그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는데, 황태자비가 나를 보며 물었다.

    “공작 부인의 생각은 어때요?”

    “저는… 약한 여인과 어린아이의 건강과 생명을 경시하지 않는 세상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역시 그렇죠.”

    황태자궁에서의 티파티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이어졌다.

    *   *   *

    공작성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나에게로 향한 제크론의 시선에 걱정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당신 몸은 괜찮아? 티타임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어. 불편한 데는 없어?”

    “허리가 조금 배기기는 하지만 괜찮아요. 저도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즐거웠어요.”

    “공작성에 도착하면 찜질과 마사지를 하라고 일러둬야겠군.”

    “그래야겠어요.”

    그 말을 하는 동시에 생각났다.

    찜질과 마사지를 편하게 해 줄 케이트와 주디가 공작성에 없다는 사실이.

    제크론도 그랬나 보다.

    “그런데 당신 전속 하녀들은 지금 모두 휴가를 떠났군.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명씩 보내는 건데 말이야.”

    그가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잘생긴 미간에 주름이 진하게 졌지만, 그의 미모에 타격을 전혀 주지 못했다.

    “괜찮아요. 찜질 정도는 내가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생긋, 웃어 보였지만, 그의 미간에 잡힌 주름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더니 잠시 후, 그의 얼굴에 생글생글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가 짓궂은 장난을 계획하는 꼬마 아이의 미소와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만 내 쪽을 보면서 생글거리는 제크론을 보며 내가 한 생각은 이랬다.

    ‘조금… 음흉해 보여.’

    *   *   *

    착각이나 오해가 아니었다.

    늦은 밤, 제크론이 하녀들과 함께 내 침실로 찾아왔다.

    아까 마차에서 봤던 짓궂은 미소를 하고 말이다.

    “어쩐 일이세요?”

    그의 방문에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오늘은 황태자궁에 함께 다녀온 터라 기운을 나누기 위한 ‘하루 30분’은 따로 챙길 필요가 없었으니 말이다.

    하녀들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돌멩이들이 가득 담긴 그릇과 타월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침실에는 나와 제크론, 둘만 남았다.

    “허리가 배긴 임신한 아내를 위한 찜질과 마사지는 남편의 일이라는 얘기를 어디서 들었던 기억이 있어서 말이야.”

    후후, 제크론이 두 눈을 반으로 곱게 접으며 말했다.

    아, 그랬던 거구나.

    이런 속셈이 있었던 것이구나.

    “오늘 외출 시간도 길었는데, 당신 바쁘지 않아요?”

    “바쁘지만 어쩔 수 없지. 남편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데. 당신 남편은 나뿐이잖아?”

    “바쁜 사람 시간 뺏으면서까지 괜히 이런 일 시키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더욱 내가 해야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단단히 작정하고 온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잘 부탁해요.”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두근두근, 심장이 작게 떨리기 시작했다.

    ‘또 이런다, 또! 엘프윈의 심장아… 나대지 마라, 쫌!’

    빠르게 뛰는 심장을 다그치며 어금니를 아드득 물었다.

    누워 보라는 제크론의 말에 나는 베개를 베고 옆으로 누웠다.

    붉어진 얼굴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재빨리 움직였다.

    제크론은 타월에 따뜻한 돌멩이들을 놓고 둘둘 말아 내 허리 위에 올리고 지그시 눌렀다.

    따뜻한 열기가 금세 허리 전체를 기분 좋게 달궜다.

    “으아… 좋아요. 시원해요.”

    역시 외출 시간이 길어지니 몸이 힘들긴 했나 보다.

    허리가 데워지자 몸 전체가 노곤노곤 나른해졌다.

    “괜찮아? 불편하거나 뜨겁거나 하지는 않고?”

    “딱 좋아요.”

    으으음… 입에서 자연스레 기분 좋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뒤로 제크론이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내 뇌와 몸이 빠르게 단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얼핏 들리는 것도 같았다.

    ‘…왜 웃지? 뭐가 그리… 재밌을까?’

    이런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도 같았지만, 내 기억은 거기에서 뚝, 끊겼다.

    *   *   *

    다음 날 나는 오전 늦게 눈을 떴다.

    전생의 나는 잠이 많은 편이었지만, 엘프윈의 몸은 별로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산달이 가까워지고 몸이 무거워질수록 잠도 늘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느긋하게 쉬라는 몸의 신호이리라.

    눈을 뜨자 나를 맞아 준 이들은 케이트와 주디였다.

    특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그녀들의 안색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밝았다.

    “깨셨어요, 마님?”

    “저희가 보고 싶진 않으셨나요?”

    호호, 수줍은 미소가 그녀들의 입가를 맴돌았다.

    반가운 목소리에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보고 싶었지. 어젠 너희들이 없어서 공작님이 직접….”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제크론에게 허리 찜질을 받다가 그대로 잠들어 버린 것이 생각났다.

    “공작님이 직접 찜질해 주셨다면서요? 좋으셨어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

    “소문이 쫙 났던걸요. 어제 두 분이서 오랜만에 같은 침실에서 주무셨다고요.”

    “뭐어!”

    주디의 입에서 나온 말에 너무 놀란 나머지 두 눈을 최대치로 뜨고, 턱을 최대치로 떨어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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