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42)
  • 37화

     

    당 충전이 시급했던 나는 하녀들을 이끌고 근처 디저트 가게로 들어갔다.

    “각자 음료 한 잔, 디저트 두 종류씩 고르기로 하자.”

    “저는 음료 한 잔이면 괜찮아요.”

    “저도요.”

    하녀들은 음료 외에 디저트까지 주문하는 것은 주제넘은 사치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나는 단호했다.

    “오늘 내가 도움을 많이 받아서 고마워서 그래. 너희들이 먹지 않는다면 나도 안 먹을 테니까 그런 줄 알아.”

    효과는 직방이었다.

    그녀들은 내 명령에 따라 디저트도 두 개씩 주문했다.

    지친 몸은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들을 쪽쪽 빨아들였다.

    당 충전을 끝낸 몸은 금방 원기를 회복했다.

    “그런데 저희가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겠어요. 마님께서 아직 사신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걱정 마. 이미 뭘 살지 다 결정해 놨으니까.”

    수첩을 톡톡 가볍게 두드리며 씨익 웃어 보였다.

    디저트 가게를 나온 내 발걸음이 빨라졌다.

    수첩에 적힌 목록 중에서 세 가지씩을 골라 차례차례 샀다.

    내 뒤를 따르는 케이트와 주디의 얼굴에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 가득 차올랐다.

    그도 그럴 게 내가 고르는 제품들 중에 그녀들이 추천했던 제품들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황태자비의 취향도 아니었고.

    대신 자신들이 마음에 들어서 유심히 봤던 제품들을 사니 놀랄 만도 했으리라.

    쇼핑을 마친 우리는 마차로 돌아왔다.

    제품들을 하나씩 그녀들에게 건넸다.

    “자, 받아. 케이트는 꽃 장식 머리핀, 스카프, 그리고 장갑. 주디는 비즈 장식 머리핀, 벨트, 그리고 모자.”

    그녀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쇼핑하는 내내 눈길을 끌었던 제품들을 얻게 되니 무척 놀란 표정이었다.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선물이야. 그동안 너희들 고생이 많았잖아. 기억을 잃은 날 곁에서 잘 돌봐 줘서 고마웠어.”

    “어머나, 이걸 다….”

    “마님….”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뜻이야.”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선물에 케이트와 주디의 눈시울이 금방 붉어졌다.

    감동받은 그녀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괜히 감격스러워져서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게 다가 아니야.”

    다시 명랑하게 말하며, 손가방에서 봉투를 꺼내 케이트와 주디에게 건넸다.

    “짜잔! 공작님께서 너희들에게 금일봉도 챙겨 주셨지 뭐니!”

    묵직한 봉투에는 그녀들의 한 달 치 월급 정도의 액수가 들어 있었다.

    “이미 월급도 충분히 받고 있는걸요. 이건 받을 수 없어요.”

    “맞아요.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것인데 이런 선물과 금일봉이라니요….”

    워낙 처음 겪어 보는 선물 세례에 하녀들은 기뻐하기보다는 당혹스러워했다.

    그녀들이 느끼는 놀라움을 이해했다.

    “선물도 받아 본 사람이 받을 줄 안대. 그러니까 너희들이 당황스러워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놀라게 해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이번만큼은 눈 딱 감고 받아 주면 좋겠어.”

    내가 부드럽게 타이르듯이 말하자, 그녀들은 더 이상 거부 의사를 내비치지 않았다.

    상전의 부탁 같은 명령에 두 번이나 연달아 거절하는 것은 순진한 하녀들은 상상도 못 할 행동이었으니까.

    “감사합니다, 마님.”

    “고맙습니다. 잘 쓸게요, 마님.”

    하녀들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야. 마지막 하나가 더 있단다!”

    헤헷, 신나게 말하며 마차를 출발시켰다.

    화려한 상점가를 벗어난 마차는 뎀프샤로 향했다.

    하지만 바로 공작성으로 돌아가는 대신 뎀프샤 동부에 있는 작은 마을인 처비튼으로 향했다.

    케이트와 주디의 집이 그곳에 있었다.

    나와 제크론이 내 충직한 하녀들을 위해 준비한 마지막 선물은 이틀간의 특별 휴가였다.

    케이트와 주디가 곁에 없으면 내 삶은 좀 불편해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에게 꼭 특별 휴가를 주고 싶었다.

    집이 공작성 근처인 다른 고용인들과는 달리 케이트와 주디는 집이 멀어서 일 년 중 가족들과 보낼 수 있는 날이 그리 많지 않음을 알고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공작 부인으로서 누리는 행복을 내 하녀들에게도 조금 나눠 주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특별 휴가를 계획했고, 제크론 역시 흔쾌히 승낙해 줬다.

    “정말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마님.”

    “뭐라 말로 설명하지 못할 만큼… 정말 고맙습니다, 마님.”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한 채 집으로 향하는 케이트와 주디를 보며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오늘 저녁 그녀들의 집에 웃음꽃이 찬란하게 피었으면 하고 바라면서.

    *   *   *

    마차는 공작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천천히 달렸다.

    작은 마을의 풍경이 차창을 통해 고스란히 시야에 들어왔다.

    그동안 내 외출의 목적지는 제도의 화려한 상점가나 황궁, 혹은 귀족가의 대저택 정도였다.

    이렇게 평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처음 보는 광경은 내 심장을 덜컹 내려앉게 만들었다.

    건물들은 페인트칠이 거의 벗겨져 있었고, 도로 이곳저곳에는 흙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각종 쓰레기도 거리 곳곳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관리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길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의 옷은 낡았고, 표정은 어두웠다.

    특히 어린아이들의 경우 제대로 씻지도 못했는지 얼굴이며 몸 곳곳에 흙먼지가 가득했다.

    안타까운 광경이었다.

    황후 폐하의 생신 연회에 참석했을 때가 생각났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황궁의 풍경을 눈앞에 두고 서 있을 때는 살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었다.

    그 열망은 너무도 강렬해서 젖은 눈동자를 하고 제크론에게 매달려 애원하게 만들 정도였다.

    하지만 만약 이런 곳에 서 있었다면, 모든 것이 낙후되고 더러운 곳에 서 있었다면 살고 싶다는 희망 따위는 절대 생기지 않았을 것만 같았다.

    지금 마차를 타고 이곳을 지나치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착 가라앉는 것을 보면 말이다.

    마차가 바로 빵집 앞을 지나는데 주인과 어린 소녀가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오늘은 남은 빵이 없구나. 다 팔렸거든. 미안하구나, 얘야.”

    “네… 어쩔 수 없죠.”

    삐쩍 마른 소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힘없이 몸을 돌렸다.

    빛을 잃은 소녀의 눈동자가, 꺾어질 듯 가느다란 팔목이 내 시선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곧바로 천장을 탕탕, 쳐서 마차를 세웠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하인이 재빨리 달려와 차창 앞에 섰다.

    “무슨 일이십니까요, 마님?”

    “저기 저 빵집에 가서 빵을 새로 구워서 소녀에게 주라고 해 줘.”

    지갑에서 100데론 지폐 다섯 장을 꺼내 마부에게 건넸다.

    500데론이면 일반 4인 가정의 한 달 생활비 정도였기에 꽤 큰돈이었다.

    빵집 사장의 퇴근을 한 시간 늦추는 대가로 모자라지 않으리라.

    내 명령에 놀란 듯 마부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다시 100데론 지폐 다섯 장을 꺼냈다.

    “그리고 이 돈도 건네주면서 앞으로 저 소녀가 먹을 빵은 남겨 두고 팔면 좋겠다고 전해 줘. 다음에 내가 보상하겠다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마님.”

    양손에 500데론씩을 단단히 쥔 하인이 빵집으로 향했다.

    하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빠른 걸음으로 마차를 지나치는 은발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좁은 골목길로 서둘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공작성의 주치의 매튜를 연상시켰다.

    ‘매튜인가? 에이, 설마….’

    고개를 갸웃거리며 은발 남자의 뒷모습을 빤히 봤다.

    매튜와 많이 닮았지만, 그 남자가 매튜일 리는 없을 거라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매튜가 이 시간에 이런 곳에 있을 일이 뭐가 있겠어? 공작성 연구실에 있던가, 아니면 제도의 상점가 거리에 있다면 또 몰라.’

    상념에 빠져 있는데 하인이 돌아왔다.

    “마님께서 하신 말씀은 잘 전달했습니다. 빵집 주인이 잘 알아들은 눈치입니다.”

    “그래, 고마워.”

    마차는 곧 출발했고, 나는 그렇게 그날 작은 마을 어귀에서 얼핏 스친 은발의 사내를 기억에서 지웠다.

    *   *   *

    매튜는 그날 처비튼 거리를 배회하고 있던 게 맞았다.

    동네에서 유명하다는 의원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의원은 특히 중독 치료에 탁월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요 몇 년 사이 아르젠토 차 중독에 대한 치료를 한 적이 있습니까? 혹시 주로 어떤 이들을 상대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매튜의 물음에 얼굴의 반이 흰 수염으로 덮인 의원이 눈매를 날카롭게 만들었다.

    “환자의 정보는 쉽게 넘겨줄 수 없소이다. 잘 아실 만한 양반이 그런 걸 물으시면 어쩌나.”

    크흠, 헛기침을 내뱉는 소리가 몹시 깐깐했다.

    매튜는 인정에 호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순한 인상은 나이 지긋한 어른들에게 꽤 먹힌다는 것을 본인도 잘 알았다.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아르젠토 차에 중독돼서 무척이나 고생했습니다.”

    “지금은 다 치료됐나 보군. 그럼 된 거 아니오?”

    “그런데 그 후유증으로 기억에 장애가 생겼지 뭡니까. 지금은 일단 중독 증세는 치료했다고 하나 언제 또 도질지 모르는 일이고요.”

    “기억 장애라니… 오랜 시간 중독됐었나 보군.”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찻잎의 출처가 위벨교 대신전이라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배신감이 들었죠. 어째서 어린아이가 진단서도 없이 다량의 고급 찻잎을 구할 수 있던 걸까요?”

    “…….”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게 웃고 있는 여동생을 보고 있노라면… 위벨교에서 일부러 아르젠토 차에 중독시킨 건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네, 압니다. 몹시 불경한 생각이지요.”

    푸욱, 이쯤에서 매튜는 짙은 한숨을 뱉어 냈다.

    맺히지도 않은 눈물을 훔치는 시늉도 잊지 않았다.

    어린 여동생을 걱정하는 청년 의원의 눈물과 한숨을 늙은 의원은 무시할 수 없었다.

    주름진 늙은 의원의 얼굴이 더 쪼그라들었다.

    “사실, 나도 그 부분이 영 의심스러웠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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