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142)
  • 36화

    백지 소원권의 정식 명칭은 ‘위벨 메시나 증서’라고 했다.

    국가에 큰 공을 세운 자들에게 위벨교 대신전에서 수여하는 증서였다.

    위벨교 대신전의 은혜를 구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증서 안에 원하는 것을 써 넣으면 대신관은 어떤 것도 묻지 않고 원하는 바를 들어준다고 했다.

    백지에는 그 어떤 소원도 써 넣을 수 있었다.

    위벨교 600년 역사상 위벨 메시나 증서를 받은 이는 제크론까지 딱 열 명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경우, 증서는 각 가문들의 가보가 되어 대대손손 지켜지고 있었다.

    제크론 전에 위벨 메시나 증서가 실제로 쓰인 경우는 딱 한 번이었다.

    “100년 전, 래드너 공작가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멸문의 위기에 처하자 위벨 메시나 증서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가문의 이름과 목숨을 지킬 수 있었죠.”

    기자 닐 베이스가 맵시 있게 뻗은 제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했던 말이 끊임없이 귓가에 맴돌았다.

    멸문까지 막을 수 있는 증서라니!

    쿵, 심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대단한 걸 단지 내 치료를 위해 썼다니.’

    어쩌면 언젠가 제크론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을, 아니 윌트슨 공작가 전체를 지킬 수도 있을 힘을 지닌 문서를… 나를 위해, 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썼다니.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요동쳤다.

    물론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내 목숨이었다.

    하지만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이의 목숨을, 어쩌면 다수의 목숨을 지킬 수도 있을 기회를 앗아 가 버렸다는 생각은 나를 괴롭히기에 충분했다.

    “그토록 대단한 걸…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렇게 덜컥 써 버리면 어떡해요? 나만… 사람들 앞에서 바보가 됐잖아요.”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겨우겨우 억누르며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가늘게 떨렸다.

    흐음, 짧은 한숨을 뱉은 제크론이 입을 열었다.

    “당신과 아이의 건강이 그만큼 중요하니까 내린 결정이야. 덕분에 당신이 건강과 함께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어서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렇지만… 멸문도 막을 수 있는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진 증서라면서요. 그런데 고작….”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내게 가장 중요한 내 생명에 대한 이야기에 ‘고작’을 붙이는 내가, 날 그렇게 만드는 이 상황이 싫었다.

    일족 수십 명의 목숨에 비하면 내 목숨은 한낱 ‘고작’에 불과한 것 같았다.

    제크론이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지그시 내 눈을 바라봤다.

    단단한 그의 악력 덕택에 내내 잘게 떨리던 손이 떨림을 멈췄다.

    “당신과 아이의 건강이 고작일 리가 없잖아. 당신과 아이가 없다면 멸문당할 가문이 애초에 없을 텐데?”

    제크론의 입에서 부드럽게 흘러나온 말은 확실히 틀린 말이었다.

    내가 없더라도 윌트슨 공작가는 계속 이어질 테니까 말이다.

    그것은 빙의자인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나만의 비밀이었다.

    할 말을 잃은 채 그를 올려다봤다.

    그의 눈동자가 단단한 빛을 발했다.

    “내 가문을 지키고 싶은 내겐 너무도 당연한 결정이었어. 그러니 당신도 이해해 주길 바라.”

    “흐흐… 흐흑….”

    결국 눈물을 쏟아 내야 했다.

    제크론이 들썩이는 내 어깨를 그의 품으로 끌어다가 안아 줬다.

    토닥토닥, 내 등허리를 쓸어 주는 그의 손길은 또 얼마나 다정했는지.

    그렇게 한동안 울다가 어느 정도 진정됐을 때였다.

    제크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당신이 걱정해야 할 문제는 그게 아니야.”

    “…걱정해야 할 문제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눈물 콧물 범벅인 내 얼굴을 그가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이 장면… 얼마 전에도 봤던 것 같은데?

    ‘나 요즘 제크론 앞에서 우는 일이 많은 것 같아. 역시 다… 호르몬 때문이겠지?’

    끄응, 그제야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얼굴을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단단한 손에 붙잡힌 얼굴은 손수건에 의해 완전히 깨끗하게 건조될 때까지 움직일 수 없었다.

    “황태자비께서 우리를 티파티에 초대했어. 황태자 부부와 우리 부부, 이렇게 넷이서만 갖는 작고 친밀한 파티가 될 거야.”

    “네… 에?”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황태자비라고요?

    티파티라고요?

    “물론 당신 컨디션이 별로면 거절해 버릴 수도 있어.”

    놀라운 것투성이였지만, 이 중에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아무렇지 않게 거절을 운운하는 제크론이었다.

    황태자비의 초대를 거절하다니 말도 안 된다.

    황태자궁에서 열리는 작고 친밀한 티파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옆구리가 간질간질 즐거웠다.

    *   *   *

    늦은 시간의 대신관 집무실.

    대신관 크레이그 셰넌은 어두운 집무실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제국 중앙 신문이 펼쳐져 있었는데, 대신전의 치료를 받고 있다는 윌트슨 공작 부인과 관련된 기사가 바로 보였다.

    크레이그는 위벨 메시나 증서를 가져온 제크론 윌트슨 공작을 떠올렸다.

    당시 크레이그는 물었었다.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무엇이든지요.”

    제국의 전쟁 영웅이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공작께서 이 증서를 사용했다는 것이 알려지는 순간, 제국의 모든 이목이 공작 부인께 향할 겁니다.”

    “산모와 아이, 둘 다 안전하고 건강하게 출산하는 확률이 어느 정도인지 대신관님께서는 아십니까?”

    자신의 물음에 다시 물음으로 답하는 제크론을 보며 크레이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56퍼센트라고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

    “우리 제국의 의료 수준과 제국민들의 건강 수준이 이 정도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출산을 통해 건강한 아이들을 낳고, 건강한 제국민으로 길러 내는 것이 부강한 제국을 만드는 기본 중의 기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군요.”

    흐음, 대신관이 짧은 침음을 흘렸다.

    그는 앞에 앉은 젊은 공작을 찬찬히 살폈다.

    몸만 쓸 줄 아는 애송이 전쟁 영웅인 줄 알았는데 완전히 잘못 짚었다.

    크레이그는 제가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도 떨어졌던가, 하며 자책했다.

    제크론 윌트슨 공작은 정략혼인으로 맺어졌을 아내의 건강을 염려하여 백지 소원권까지 사용하는 애정이 깊은 남자였다.

    게다가 그는 제 가문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 전체의 안위를 걱정하는 진정한 지도자다운 면모를 갖춘 남자이기도 했다.

    빛나는 남자였다.

    “곧 황제 폐하께도 이 문제에 대해 논의드릴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혹, 대신관님께서도 현안과 관련한 의견 있으시면 언제든지 들려주십시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크레이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렸지만, 사실 그의 속마음은 썩 편치 못했다.

    마지막까지 제국의 일꾼임을 자처하는 제크론의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역겨웠다.

    “일개 싸움꾼 따위가….”

    제국의 빛은 위벨교여야 했다.

    갈 곳 잃은 제국민들을 이끌 단 한 줄기의 빛은 위벨교 안에서 비춰져야 했다.

    일개 귀족 따위가 제국민들을 위한다는 말로 감히 빛이 되고자 하면 안 됐다.

    아무리 전쟁 영웅이라 불리는 자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미 한 달 전의 일이었지만, 그때의 대화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크레이그의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게다가 그 여자… 신성수 치료에 몸에서 이상한 반응이 나타났다지.”

    직접 눈으로 본 현상이 아니라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치유 신녀들의 보고로 판단컨대 윌트슨 공작 부인이나 혹은 그녀 몸 안에서 자라는 아이는 결코 보통 존재가 아니다.

    신관이나 신녀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신성력에 반응하는 몸을 지닌 존재들은 세상에 딱 한 부류였다.

    “흐음….”

    짙은 침음이 크레이그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곧 알게 되겠지.’

    *   *   *

    내일은 황태자비의 티파티에 참석하기로 한 날이었다.

    ‘나 요즘 너무 많은 티파티에 초대되고 있단 말이지, 후훗.’

    어깨춤이 절로 났다.

    사실 따져 보자면 그동안 슈라더 후작 부인이 여러 번 초대해 준 것뿐이지만, 굳이 이 자리에서 세세하게 따질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오늘은 내 전속 하녀 케이트와 주디, 둘 다 대동하고 제도의 상점가로 왔다.

    초대에 감사하다는 의미로 황태자비를 위한 선물을 사기 위해서였다.

    제크론은 이번에도 다이아몬드를 주재료로 한 값비싼 선물을 준비할 테니, 나는 아기자기하고 정감 가는 선물을 고르면 될 것이다.

    ‘딱히 눈에 띄는 게 없으면 제크론의 선물에 묻어가도 되고 말이야, 후훗.’

    사실 황태자비의 선물을 사야 한다는 것은 하녀들의 눈속임을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오늘 외출의 최대 목적은 케이트와 주디에게 선물을 사 주기 위함이었다.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지도 이제 두 달이 넘었는데, 그동안 두 하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녀들은 영리하고 눈치가 빨랐으며, 나를 위하는 충성심 또한 높았다.

    실내악단 단장과의 어색한 만남에서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은 주디 덕분이었다.

    그리고 슈라더 후작 부인의 사교 모임에 참여하게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제크론이 깜짝 선물을 준비했는데, 이것도 사실 케이트의 제안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내가 여태까지 별다른 큰 사고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게 다 케이트와 주디 덕분이지, 뭐.’

    오랜만의 쇼핑에 들뜬 하녀들을 보며 조용히 엄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장신구 가게였다.

    “어머, 이 머리핀은 귀여우면서도 우아한 게, 어리신 황태자비 전하께서도 마음에 들어 하실 것 같아요.”

    “흐음, 그래?”

    “황태자비 전하께서는 꽃 모양의 케이크를 즐겨 드신다면서요? 꽃 장식이 두드러진 장신구면 좋을 것 같아요. 이 팔찌는 어때요?”

    “좋은데?”

    나는 작은 수첩을 들고 다니면서 그녀들의 추천 제품을 열심히 적는 척했다.

    하지만 사실 내가 적고 있었던 것은 둘 중 하나가 열심히 추천하는 틈을 타 남은 하나가 조용히 눈길과 손길을 보내던 제품들의 목록이었다.

    그래서 나는 추천해 주는 하녀의 말을 듣고 반응하는 동시에 조용한 하녀의 눈과 손이 오래 닿는 제품을 재빠르게 파악하고 수첩에 갈겨 적어야 했다.

    오감을 풀가동하여 멀티태스킹해야 하는 오늘의 쇼핑은 내 인생에서 최상위 난이도의 쇼핑으로 기억되리라.

    하지만 그만큼 뿌듯함도 클 것을 생각하니 이 정도쯤은 견딜 만했다.

    ‘한 번 더 하라고 하면 못 하겠지만, 끄응.’

    두 시간쯤 상점가를 누비자 체력이 점점 고갈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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