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142)

35화

다음 날, 나는 제도에 있는 슈라더 후작저로 향했다.

지난 방문에는 제크론과 함께였지만, 이번에는 나 혼자였다.

그래서 한번 와 본 곳임에도 불구하고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후작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본 적 있는 얼굴들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윌트슨 공작 부인. 저는 제국 중앙 신문의 기자, 닐 베이스입니다.”

“그림 기자 필립 빙거입니다.”

두 남자가 나를 향해 꾸벅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들은 내게 꽤나 정중하게 예의를 갖췄다.

하지만 그들에게 허락된 내 시선과 목소리는 냉랭한 것뿐이었다.

“오랜만입니다, 기자님들. 지난 황궁 연회에서 뵀었죠. 아주 잘 기억하고 있어요.”

신문에 별거 아닌 일로 기사를 기다랗게 구구절절 쓰시고, 내 얼굴을 신경질적이고 표독스럽게 그려 넣은 그 분들이시잖아요?

속말을 다 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은… 전쟁터나 지옥뿐이겠지?

목 끝까지 차오르는 울화를 겨우겨우 참아야 했다.

그랬다.

슈라더 후작 부인이 통신 마정석까지 보내면서 다급하게 나를 초대한 이유는 바로 이들의 방문 때문이었다.

우리가 실내악단을 고용한 건에 대해서 인터뷰를 요청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슈라더 후작 부인이었지만 기자와의 단독 인터뷰는 긴장됐으리라.

그렇다고 해서 제국 최대 규모의 음악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처지라 음악의 장점을 강조할 수 있는 인터뷰를 마다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테고 말이다.

그래서 떠오른 묘안이 단독 인터뷰가 아닌 세 가문의 공동 인터뷰였던 것이다.

슈라더 후작 부인이 가운데에 자리 잡았고, 양옆에는 브랜차드 자작 부인과 내가 앉았다.

저택 전체에는 감미로운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브랜차드 자작 부인은 흰머리가 희끗한 60대 여성으로, 60년 넘게 귀족으로 살아온 위엄과 기품이 몸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람이었다.

인터뷰는 곧바로 시작됐다.

닐은 맵시 있게 뻗은 제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질문을 던졌다.

“악단의 연주는 파티나 축제에서나 즐길 수 있는 것이라는 편견을 깨셨습니다. 계기는 무엇인가요?”

“가장 먼저 실내악단 고용에 대해서 제안한 것은 윌트슨 공작 부인이었습니다. 난 음악을 향한 그녀의 무한한 신뢰와 애정에 감동받았고요.”

슈라더 후작 부인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내 차례가 온 것이다.

크흠, 헛기침으로 목청을 다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제가 임산부잖아요? 요즘 제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제 건강이랍니다. 육체의 건강과 정신의 건강이요. 실내악단을 고용하고, 종일 음악이 흐르는 집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제 정신 건강을 위해서 말이죠.”

준비해 온 말을 너무 빠르거나 느리지 않게 뱉어 냈다.

긴장한 탓에 목소리가 떨리긴 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앓고 있는 고질적인 병이었으니까 말이다.

사람들 앞에서 말할 때 목소리 떨리는 병.

닐 베이스는 답변 내용을 열심히 받아썼고, 필립 빙거는 손을 빠르게 놀리며 인터뷰 장면을 종이에 담았다.

인터뷰는 꽤 순조롭게 진행됐다.

“브랜차드 자작 부인께서는 슈라더 음악 아카데미 출신 실내악단의 음악이 취향에 잘 맞으시나요? 과거 허드플란 왕국의 음악과 비교하면 어떠십니까?”

닐의 질문에 먼저 반응한 것은 슈라더 후작 부인이었다.

“이 인터뷰에서 굳이 허드플란 왕국의 이름을 거론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녀는 몹시 언짢은 내색을 가감 없이 내비쳤다.

그때 슈라더 후작 부인을 말린 것은 브랜차드 자작 부인이었다.

“괜찮습니다, 슈라더 후작 부인. 이 정도 질문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느긋한 미소가 브랜차드 자작 부인의 얼굴에 퍼져 나갔다.

연륜이 느껴지는 여유로운 미소였다.

“슈라더 음악 아카데미 출신 악단의 연주에 무척 만족하고 있습니다. 음악에는 국경이 없다는 것, 기자님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네, 뭐.”

“그리고 쉐리던 제국의 음악과 과거 허드플란 왕국의 음악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라미레스 대륙이 다섯 왕국으로 나뉘기 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우리는 하나의 국가였다는 것도 모르지 않을 겁니다.”

“…….”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우리는 같은 뿌리를 공유해 왔죠. 음악 역시 마찬가집니다.”

브랜차드 자작 부인은 침착한 태도로 해야 할 말들을 차분히 이어 나갔다.

와우, 멋지신 분!

이대로 가만히 참을 수가 없었다.

짝, 짝, 짝…!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박수를 있는 힘껏 쳤다.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순간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윽, 인터뷰 중에 박수라니… 나 왜 그랬대?’

민망한 시선… 받아도 싸다, 싸!

그런데 그때였다.

짝, 짝, 짝…!

슈라더 후작 부인도 박수를 치는 게 아닌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닐 베이스와 필립 빙거마저도 손에서 펜을 놓고 손뼉을 쳐 댔다.

짝, 짝, 짝…!

한동안 응접실에 요란한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아주 잠깐이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브랜차드 자작 부인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분명히 읽었다.

그녀의 눈빛에 담긴 애정 어린 의아함을 말이다.

마침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인터뷰는 끝났다.

다디단 디저트와 함께 담화 시간이 왔다.

슈라더 후작 부인이 권하기도 했지만, 기자들은 눈치도 없이 계속 자리를 지키고 앉았다.

내가 애플파이를 한입 가득 물고 오물오물 씹고 있을 때였다.

새콤달콤한 맛에 정신 팔려 있는데, 닐 베이스 기자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윌트슨 공작 부인, 이번에 대서특필된 기사 보셨는지요?”

“기사라뇨?”

여전히 파이를 씹고 있는 중이라 손으로 입을 가리고 조심히 입을 열었다.

뜨끔했다.

사실 요즘 제국 신문이나 가십지 읽는 것을 게을리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이 세계에 조금 더 수월하게 적응하려면 일정량 이상의 정보가 필수일 텐데… 반성한다. 끄응.

“저런, 모르고 계셨군요. 부인께서 대신전의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라는 기사였습니다.”

“네에?”

파이를 꿀꺽 다 삼켰기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기자의 얼굴에 뿜어 버릴 뻔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순간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신전법에 명시한 환자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치료를 받는 것에 대한 비난 기사인가? 윌트슨 공작가가 나 때문에 여론의 뭇매를 맞게 된 건가? 제크론의 평판이 떨어지면 안 되는데….’

내가 이런저런 나쁜 생각들 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슈라더 후작 부인이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 그 기사 보고 놀랐잖아요. 윌트슨 공작이 공작 부인을 그렇게나 극진히 생각하고 있다니요. 무뚝뚝한 남자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요!”

“…….”

“아마 제국 내 모든 여자들이 다 같은 생각을 했을걸요? 윌트슨 공작 부인이 부럽다고요.”

호호호, 그녀가 유쾌하게 웃었다.

어라?

슈라더 후작 부인의 반응으로 유추해 보건대 비난 기사는 아닌 모양이었다.

‘휴우… 다행이다.’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뿜어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브랜차드 자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기사를 보고도 믿기 힘들었답니다. 공작 부인의 치료를 위해서 대신관이 하사한 백지 소원권을 썼다는 것은… 저 같은 옛날 사람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가 힘들거든요.”

아? 이건 또 무슨 말이지?

대신관이 하사한 백지 소원권이라니?

백지 수표 같은 건가?

“…그게 뭐죠?”

모르는 게 있다면 물어야 했다.

대서특필될 정도로 중요한 사항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저런, 윌트슨 공작 부인께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계셨나 보네요.”

응접실 안의 모두가 당혹스러운 낯으로 나를 봤다.

*   *   *

대체 무슨 정신으로 공작성까지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목적지에 다다른 마차는 멈춰 섰고, 나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빠르게 걸었다.

케이트와 주디가 밝게 인사하며 나를 맞았지만, 그들에게 제대로 된 대꾸를 해 줄 정신도 없었다.

그저 앞으로 걷고, 또 걸었다.

내가 향한 곳은 제크론의 집무실이었다.

그에게 물어야 할 말이 있었다.

똑, 똑, 똑!

방문을 세게 두드렸다.

안에서 대답이 들려오기를 기다릴 여유 따윈 없었다.

그대로 벌컥 문을 열었다.

집무실 안에는 회의 중이었는지, 제크론과 멀론 경이 함께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나를 보고 두 남자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겨우겨우 목소리를 입 밖으로 밀어냈다.

손이 잘게 떨렸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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