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142)
  • 34화

    “신문과 가십지를 나름대로 꼼꼼히 살펴봤지만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없었어요.”

    그에 대해서 아는 게 워낙 없기도 했고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다른 부인들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의상실, 헤어샵, 티파티 등등 들르는 데마다 그 신사분의 인상착의를 설명하면서 물었는데 다들 고개를 젓더라고요.”

    “그래서 말인데요. 제도에 거점을 두고 있는 귀족은 아닌 것 같지 않나요? 여기 있는 우리도 다 본 적이 없잖아요.”

    “맞아요. 그럴 가능성이 크겠네요.”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신사분이 던져 준 단서가 열여덟이잖아요? 윌트슨 공작 부인과 열여덟 살부터 알던 사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윌트슨 공작 부인이 결혼 전 지방 영지에서 만난 인연일 테고요?”

    동그랗게 둘러앉은 여인들이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추리에 추리를 더했다.

    뭐예요? 다들 탐정이세요?

    금방이라도 푹푹 터져 나오려는 짙고 깊은 한숨을 속으로 꾹 눌러 담았다.

    “그런데 여러분… 어째 운동할 때보다 수수께끼 신사분의 신상정보를 캐는 데 더 열심인 분위기가 된 것 같네요.”

    메릴 스웨이드 선생님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투정 아닌 투정의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모두 이구동성으로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

    “어머머! 안 그래요, 메릴 선생님! 운동하고 나니 더 기운이 나서 이렇게 즐겁게 떠들 수도 있는 거죠!”

    “맞아요! 다 선생님 덕분이에요!”

    “그래요!”

    호호호,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운동실 가득 울려 퍼졌다.

    “그렇다면… 윌트슨 공작 부인의 친정 근처에 있는 귀족들부터 조사하면 뭔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느 지방 출신이세요? 제가 이곳 지리를 잘 몰라서요.”

    앨리슨 디아브 백작 부인은 렐바크 왕국 출신이라 쉐리던의 지리는 잘 모르나 보다.

    어라? 그러고 보니 이 세 금발 머리 절친 귀부인들은 각기 다른 지역 출신이었다.

    디아브 백작 부인은 렐바크 출신, 프렛 백작 부인은 허드플란 출신, 데이비스 자작 부인은 쉐리던 출신이었다.

    지난 슈라더 후작가에서의 티타임에 나눴던 대화에 의하면 각 왕국 출신의 귀족들은 서로 어울리기 힘들다고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세 금발 머리 귀부인들은 각기 다른 왕국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친자매처럼 잘 어울려 다녔다.

    “제국 남부의 서덜랜드에 있는 하이그린 백작가 출신이에요.”

    까먹지 않게 잘 외우고 다녔던 친정의 정보를 또박또박 말했다.

    내 전속 하녀 케이트와 주디의 도움이 컸다.

    “왕립 도서관에 가서 귀족 가계도라도 살펴봐야 할까요?”

    “그럴까요?”

    “좋은 생각인데요!”

    나를 제외한 귀부인들은 프렛 백작 부인의 의견에 손뼉까지 치면서 동의했다.

    엥? 왕립 도서관이라고요?

    귀족 가계도라고요?

    그렇게까지 한다고요?

    “그런데 여러분.”

    진심으로 궁금했다.

    내가 기억 못하는 남자의 신원을 알아내는 일이 뭐가 그리 중요한 일이라고 이렇게 들떠서 집중하는 것일까?

    그래서 무례를 무릅쓰고 물어야 했다.

    “네? 왜 그러세요, 윌트슨 공작 부인?”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마냥 해맑기만 한 눈빛들이었다.

    “여러분들은 할 일이 없으세요?”

    순간 정적.

    멀뚱멀뚱.

    그녀들은 내 말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디아브 백작 부인이었다.

    그녀가 생긋, 웃으며 내 팔을 파닥파닥 치며 입을 열었다.

    “어머머! 윌트슨 공작 부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할 일이 없긴 왜 없어요?”

    그녀 입장에선 살짝 때리는 것이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꽤나 아픈 스킨십이었다.

    그녀의 체격은 여기 앉은 여자들 중에서 가장 크고 단단했으니까 말이다.

    “맞아요. 지금 한창 수수께끼 신사분 찾기에 열중하고 있잖아요!”

    “윌트슨 공작 부인은 가끔 이상한 소릴 하신다니까!”

    호호호, 금세 웃음소리가 운동실 안을 가득 채웠다.

    으잉? 내 물음에 담긴 속뜻을 이해 못 했다고?

    여러분들 목 위에 달린 그것들은 알록달록 꽃밭의 꽃들일까요?

    흐음… 나 앞으로 이 그룹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혹시 이러다가 우리가 진짜로 알아낼까 봐 두려우신 건가요, 윌트슨 공작 부인?”

    “누구에게도 들키면 안 되는 비밀 연인 사이였다거나?”

    허걱, 이 사람들이 큰일 날 소리를!

    이래 봬도 나 결혼하고 임신까지 한 유부녀라고요!

    “어머, 연인 사이라니요? 설마요. 아니에요.”

    사실 기억이 하나도 없지만, 그래서 그 말이 사실일까 봐 두려웠지만, 일단은 잡아떼기 작전.

    “아니면 첫사랑인가?”

    “어머, 첫사랑이라니! 로맨틱해라!”

    으엥? 첫사랑까지 들먹이시겠다고요?

    다들 신났네, 신났어.

    “에이, 첫사랑이라니요? 그럴 리가요.”

    두 손을 열심히 좌우로 저었다.

    내가 당황하는 모습이 그녀들에게 기쁨을 선사했나 보다.

    그녀들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고 흘러나왔다.

    “윌트슨 공작 부인은 반응이 워낙 재밌어서 자꾸만 놀리고 싶어요!”

    “그러니까요!”

    나를 제외한 여인들이 꺄르르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뜨악, 나 놀림 당하고 있었던 거야?

    순간 다 때려치우고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전혀 몰랐다.

    그저 장난으로 ‘숨겨진 연인’, 혹은 ‘첫사랑’ 따위의 이름표를 붙였던 신원 불명의 남자가 진짜로 엘프윈의 첫사랑이었을 줄은 말이다.

    *   *   *

    슈라더 후작 부인이 편지를 보내왔다.

    묵직한 편지 봉투를 잡은 내 손이 긴장으로 살짝 떨렸다.

    ‘모임 초대면 어떡하지?’

    도론 공녀와 핸더슨 공녀를 마주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들과 같은 공간에 앉아 하하호호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내 이성과 엘프윈의 몸이 동시에 거부했다.

    편지 봉투를 열었다.

    봉투 안에는 편지 대신 투명하고 납작한 광석이 있었다.

    “이게 뭐지?”

    광석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봤다.

    아름다운 광택을 뿜어내는 보석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내가 곁에 있던 케이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내자 똘똘한 하녀가 입을 열었다.

    “그것은 통신용 마정석입니다.”

    “통신용 마정석? 우와, 폰 같은 건가?”

    “네? 폰이요?”

    “아, 아니야. 어떻게 작동하는 건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이 세계 사람들에게는 낯선 단어를 내뱉게 되는 실수를 종종 범하게 된다.

    “사람의 체온으로 작동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단단히 쥐고 계시면 상대에게 신호가 갑니다.”

    “오호, 그렇단 말이지. 신기하네.”

    새 장난감을 갖게 된 어린아이처럼 마냥 신난 얼굴로 투명 광석을 손으로 꽈악 그러쥐었다.

    몇 초 후, 광석이 밝은 빛을 내며 반짝거렸다.

    오호, 신박하여라.

    그리고 얼마 후, 상대편에서 먼저 말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윌트슨 공작 부인. 편지가 빨리 도착해서 다행이네요.]

    “안녕하세요, 슈라더 후작 부인.”

    그녀의 맑고 기운찬 목소리에 내 기분까지 덩달아 좋아졌다.

    그때 투명했던 마정석에 슈라더 후작 부인의 얼굴이 비쳤다.

    ‘헉! 영상 통화 기능이구나!’

    영상 통화인 줄 알았다면 연결 전에 거울 좀 확인할걸,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얼른 머리를 정돈하며 팔을 쭉 뻗어 마정석과의 거리를 최대한 벌렸다.

    [그날은 그렇게 먼저 가셔서 안타까웠어요. 몸은 괜찮아요?]

    “걱정해 주신 덕분에 이젠 괜찮습니다. 모임 날엔 정말 죄송했어요.”

    [어머, 아니에요. 저도 아이 셋이나 낳은 여자랍니다. 임산부들 몸 상태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는 거 다 겪었는걸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후작 부인.”

    황궁 연회에서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냉랭한 기운이 어렸는데, 이젠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를 걱정해 주는 그녀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달달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이게 다 이 세계의 남자 주인공이자 내 남편인 제크론의 후광 덕분인 것 같아 새삼 그에게 감사의 마음이 뿜뿜 솟았다.

    ‘그러니 제발 모임 초대만 하지 말아 주세요.’

    속으로 빌었다.

    [이렇게 급하게 편지도 아니라 통신용 마정석을 보낸 이유는 윌트슨 공작 부인을 저택에 다시 한번 더 초대하고 싶어서예요.]

    뜨아악… 역시 그러셨군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밑으로 떨어지려는 입꼬리를 겨우겨우 붙잡고 물었다.

    “부부 티파티에 초대해 주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초대해 주시다니요.”

    기뻐해야 하지만, 사실 전혀 기쁘지 않아요.

    그런데 저쪽에서 퍽 난처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윌트슨 공작 부인이 절 도와주셔야겠어요. 제발요. 부탁드려요.]

    슈라더 후작 부인이 내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제국에서 난다 긴다는 고위 귀족들 사이에서도 그녀의 평판이나 영향력은 거의 탑급에 속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기억도 온전치 못한 나, 이 엘프윈에게 도움을 요청한다고?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이런 맥락 괜찮은 건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 내 어깨는 또 왜 이리 들썩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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