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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33/142)

33화

‘플라워 앤 케이크’에서의 모임이 끝난 후, 메리엔 도론 공녀와 제나 핸더슨 공녀는 한 마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차가 한적한 거리에 접어들자, 핸더슨 공녀가 도론 공녀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아랫입술을 질근 씹은 채 두 주먹을 꽉 말아 쥔 도론 공녀의 모습을 확인한 핸더슨 공녀는 재빨리 제 귀를 틀어막았다.

그와 동시에 도론 공녀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리고 끔찍한 데시벨의 고성이 튀어나왔다.

“아아악! 짜증 나! 꺄아아악! 짜증, 짜증, 왕짜증! 아아아악!”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에서 뜨거운 김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의 고성은 한동안 그칠 줄 몰랐다.

‘꽤나 열받았나 보군.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이쯤이면 됐겠지, 핸더슨 공녀는 제 순발력에 감탄하며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아씨! 짜증 나! 그 여자 대체 뭐야?”

도론 공녀가 다 쉬어 버린 목소리로 발악하듯 외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꺾어 버릴 기세로 세게 말아 쥐었다.

“뭐긴 뭐겠어? 윌트슨 공작 부인이라잖아.”

핸더슨 공녀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손톱을 보며 ‘내일은 손톱 관리나 좀 받아야겠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네가 경솔했어.”

“내가 뭐?”

“웨이를 그런 식으로 운동시키는 건 저택 안에서만 해도 충분했잖아. 밖에서는 좀 조심했어야지. 사방에 깔린 게 다 사람 눈인데.”

“…….”

제나 핸더슨의 타박에 메리엔 도론이 입을 삐죽이며 눈을 흘겼다.

“꼭 오늘이 아니더라도, 너 평소 하는 거 보면 이런 일 한 번 있을 것 같았어.”

“뭐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우리 집 개야! 우리 집 개한테 내가 뭘 하든 뭔 상관이야!”

“…….”

“우리 집 돈으로 먹이고 재우고 있는데!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다 내 맘인데! 아이씨!”

또 확 열이 오른 메리엔 도론이 들고 있던 부채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빼액 소리쳤다.

제나 핸더슨이 얼굴을 와락 구기며 귀를 막았다.

“아휴, 귀청 떨어지겠네. 네가 잘못했다는 말이 아니잖아. 상식적이지 않은 윌트슨 공작 부인 같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지.”

남의 말을 들을 때는 귀도, 머리도 제대로 좀 열어 줄래, 제나 핸더슨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부딪쳐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네. 윌트슨 공작 부인이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제나 핸더슨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윌트슨 공작 부인을 먼발치에서 본 적은 있지만,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눠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낯을 가리고 예민하며, 신경질적이란 얘기는 곧잘 들었던 것 같은데, 그녀에 대한 소문 어디에도 막무가내 쌍또라이라는 이야기는 없었다.

소문의 윌트슨 공작 부인이라면 설령 무슨 일을 벌이더라도 뒤에서 조용히 음습하게 벌일 것 같았다.

이렇게 벌건 대낮에 사람 많은 상가 거리 한복판에서 버럭버럭 시비 거는 모습은 소문의 그녀와는 달라도 한참을 달랐다.

아직 화가 가시지 않은 메리엔 도론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윌트슨 공작은 왜 갑자기 나타나서는 웨이를 사겠다고 한 건데? 그리고 너는? 너는 왜 웨이를 그냥 준 건데?”

아으, 짜증 나! 오늘은 메리엔 도론에게 최악의 날이었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투성이였다.

반면 제나 핸더슨의 얼굴에는 미묘한 미소가 덧그려졌는데, 아까 낮에 봤던 윌트슨 공작이 떠오른 탓이었다.

“윌트슨 공작 나름대로 공작 부인을 구하려던 거겠지. 어차피 공작 부인이 질 싸움이었으니까.”

“그럼 넌? 넌 왜 그런 건데? 어차피 공작 부인이 질 싸움이라면 내가 이길 싸움이라는 건데. 우리 웨이를 왜 줘 버렸어?”

“그걸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아휴, 제나 핸더슨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싸움에서 이긴다고 해도 우리 평판에 흠집이 생길 테니까 그런 거지.”

“평판이 왜? 그 여자가 먼저 시비 걸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상대해 준 것뿐이야. 그런데 내가 왜 그런 걸 신경 써?”

얘는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알려 줘야 하는 걸까.

제나 핸더슨의 얼굴에 슬슬 짜증의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어쨌든 강아지를 마차에 매달고 달리는 건… 잘잘못을 떠나서 보기에 안 좋잖아. 그런 이슈는 한번 여론 잘못 타면 치명타야.”

“그게 왜?”

“야! 너 자꾸 이럴래!”

결국 제나 핸더슨이 폭발했다.

“왜왜왜왜! 자꾸 염불만 외울 거야? 너 스스로 생각이란 걸 좀 해 봐야 할 거 아니야! 언제까지 내가 일일이 다 알려 줘야 해!”

“왜 화를… 내?”

깨갱.

풀이 죽은 메리엔 도론이 제나 핸더슨의 눈치를 살피며 우물쭈물거렸다.

“네가 화를 돋우니까 그렇지!”

쯧, 그 모습도 보기 싫어서 제나 핸더슨이 짧고 굵은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자기 집 개를 아주 조금 홀대하는 정도야 아무 일도 아니지. 그래 봤자 동물인데 뭐. 사람도 아니고.”

“…그렇지.”

“하지만 잘했다고 칭찬받을 일도 못 되잖아? 어디선가 쓴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미개한 대중들은 앞뒤 재지 않고 손가락질부터 하고 들 거야.”

“…….”

“그러니까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고. 특히 동물이나 어린아이 같은 약자를 다룰 때는 말이야.”

메리엔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잘 이해는 안 됐지만, 일단 그러려니 받아들이기로 했다.

제나의 말은 언제나 옳으니 이번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둘은 동갑내기 이종사촌이었고, 자매지간인 어머니들이 워낙 친한 탓에 그녀들도 어린 시절부터 늘 함께였다.

갖가지 수업도 함께 들었다.

같은 책으로 같은 시간에 같은 선생들에게 수업을 들었지만 제나는 모든 면에서 메리엔보다 뛰어났다.

어렸을 땐 질투심에 괴롭기도 했다.

하지만 철이 들면서부터는 생각을 달리했다.

좁혀지지 않는 차이를 인정하고 나니 훨씬 마음이 편해졌다.

이렇게 똑똑한 아이가 자신의 이종사촌에다가 마음도 잘 맞는다는 사실이 다행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다음부턴 조심할게. 밖에선 특히. 약자를 다룰 때는 특히 더.”

“그래, 메리엔. 그래야지.”

동갑내기 두 영애가 서로를 마주 보며 생긋, 웃었다.

어느덧 화는 다 가라앉아 있었다.

*   *   *

요소킨 수업 날은 언제나 기분이 들떴는데, 오늘은 공작성 내에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어 더욱 기분이 좋았다.

“흐음… 흐으으음….”

요소킨 운동실로 향하는데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그때 허겁지겁 복도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조쉬 멀론 경과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마님.”

“안녕하세요, 멀론 경.”

그의 표정이 꽤 심각해 보였다.

멀론 경의 손에는 종이 뭉치가 들려 있었는데, 언뜻 보기에는 신문인 것 같았다.

내 시선이 종이 뭉치에 닿는 게 느껴졌는지 그가 손을 뒤로 감췄다.

“멀론 경은 오늘도 여전히 바쁘시군요.”

“아닙니다. 마님께서 걱정해 주신 덕분에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제가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에요.”

“…….”

“급한 일이 있나 봐요?”

“네. 빨리 공작 각하께 보고드려야 할 안건이 있어서요.”

“어머, 그랬군요. 제가 길을 막았네요. 어서 가세요.”

“네, 그럼 즐거운 운동 시간 되십시오.”

그는 내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허겁지겁 제크론의 집무실로 향했다.

‘무슨 일이지?’

멀론 경이 저리도 다급해하는 모습은 처음이라 괜히 걱정이 앞섰다.

나쁜 소식이 아니어야 할 텐데.

‘제크론이라면 문제없이 처리해 내겠지, 뭐.’

나는 운동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   *   *

“자아, 발바닥을 서로 마주 보게 붙여 주시고, 두 손으로 발등을 단단히 잡아 주세요.”

메릴 선생님의 차분한 목소리가 운동실에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나를 포함한 네 명의 수강생들은 그녀의 지시에 따랐다.

“마시는 호흡에 등허리를 바로 세우고, 양 무릎을 바닥으로 최대한 눌러 주세요.”

“흐읍….”

“내쉬는 호흡에 상체를 천천히 앞으로 숙이고, 15초 동안 유지합니다. 골반의 늘어짐에 집중해 주세요.”

“후우….”

“자아, 마시는 호흡에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주세요.”

“흐읍….”

수업 첫날에는 팔과 다리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고 따로 노는 통에 모든 동작이 힘에 부쳤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여전히 근력이 부족한 팔과 다리는 부들부들 떨리긴 했지만 그래도 웬만큼은 내 뜻대로 움직여 줬다.

호흡도 꽤 안정적이었다.

‘나… 점점 건강해지고 있어!’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짠 물기가 눈꼬리 끝에 대롱대롱 맺혔다.

운동 후, 담소의 시간이 돌아왔다.

지난 일주일을 어떻게 지냈는지 등등의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나저나 각자 수수께끼 공략은 잘 하고 계셨을까요?”

앨리슨 디아브 백작 부인이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수수께끼? …아, 맞다!’

그제야 난 그들과 함께 열여덟이란 숫자만 남기고 떠난 남자의 정체를 찾기로 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어쩜 그동안 완전 까맣게 잊고 있었을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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